〈 52화 〉 #25 대전의 밤 (4)
"네가 환영의 나비의 딸이라고?"
잠깐의 정적. 이어진 질문. 꼬리털, 아니 아넬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믿기 어렵나요?"
"환영의 나비에게 딸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는데."
아들이 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그 말에 아넬라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렇겠죠. 후계자는 동생이니까."
"동생?"
"네. 그럼요. 아주 잘난 동생이죠. 당신들이 내 존재도 몰랐을 만큼이나."
갑작스럽기까지 한 감정의 변화. 구진하는 그녀의 말에서 깊은 고랑― 지독한 감정을 느꼈다. 아넬라는 마치 지겹다는 듯 씹어뱉었다.
"당신도 알지 않나요? 마법사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
"재능. 재능. 재능. 재능! 바로 재능이라고요!"
구진하는 비로소 그녀가 드러냈던 경멸이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낙오자. 떨거지라고 했던가?'
"왜죠? 왜 나는…!"
아넬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자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에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아넬라는 생긋 웃었다.
"아~ 미안해요. 조금 흥분했네요? 그렇지. 날 믿을 방법이 있냐고 물었죠?"
"…그래."
"내가 환영의 나비의 딸이라는 걸 증명할 방법은 없겠지만."
아넬라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것이 구진하에게는 마치 일그러진 가면처럼 보였다.
"내가 아는 걸 전부 털어놓으면 조금쯤은 믿을 수 있지 않을까요?"
"……."
"당신. 사각지대의 수장이 누군지 알고 있나요? 아니지. 이쯤 되면 짐작이 가지 않아요?"
발랄한 웃음이 조소처럼, 아니 자조하는 듯 보였다.
"설마."
"그래요. 바로 그 설마랍니다."
고개를 주억인 그녀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아가일이 스퀘어에서 쫓겨난 이유와 사각지대라는 조직이 만들어진 이유를 비롯한 모든 것을. 일그러진 얼굴로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이.
"그랬군."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구진하는 처음으로 꼬리털이 아닌 아넬라와 마주했다.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고 쫓겨난 동생과 그런 동생의 빈자리조차 채우지 못한 누나. 그리고 환영의 나비가 동생을 찾아오라 했을 때, 그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추방된 동생의 그림자를 쫓아 3년이라.'
구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힘 없는 웃음이 입술을 비집었다. 그런 그에게 아넬라는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설마 당신도 날 동정하나요?"
"아니. 전혀."
"그럼 왜!"
고저 없는 그의 목소리에 노한 것처럼 그녀가 무어라 외치려던 순간, 옅은 빛과 함께 누군가가 나타났다.
***
"무슨 소리 듣지 못했습니까?"
"예? 아뇨. 아무 소리도…"
데릭이 인상을 찌푸리자, 마법사가 흠칫 놀랐다.
"아,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황급히 뛰어가는 마법사를 보며 데릭은 한숨을 쉬었다.
'답답하기도 하지.'
이런 것들을 데리고 무슨 일을 하겠나. 그러다 들려온 큰 소음에 이마를 짚었다.
"하아. 메인 쪽이군요. 무슨 일인지 가서 알아보고 오세요."
"그럼 방비가 허술해지지 않겠습니까?"
"전력도 차단했고 차단막도 유지되고 있잖습니까? 빨리 갔다 오…?"
그 말이 떨어지기 전에 복도 너머로부터 무언가가 굴러왔다.
"이, 이거 설마."
굴러온 것은 머리. 이미 죽었음에도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 비명을 지르기 직전, 단말마를 내뱉지도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설마 침입자가?"
데릭은 고개를 저었다. 설마하니 B동의 존재를 알았다 한들 길은 여기밖에 없는데 어떻게? 의아해하던 그는 자신이 움직이고 있단 걸 느꼈다.
'……?'
아니, 아니다. 움직이는 게 아니라 떨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은 팔로, 어깨로, 허리로, 점차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왜?'
그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심장이 미친 듯 요동쳤다.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올린 데릭은 그사이 떨림이 멎었음을 알았다.
'……?'
아니, 멎은 게 아니다. 움직이지 못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 머리와 가슴이 도망치라고 소리 질렀다. 숨이 가빠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졌을 무렵.
"크르르―"
이윽고 들려오는 짐승의 소리에 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여기네요."
흔적을 쫓아 찾아온 것은 외곽, 평범한 폐건물처럼 보이는 아파트였다.
"이런 곳에 이백섬 헌터를 죽인 사람이…?"
"다시 말하겠어요. 우린 어디까지나 임시 수색대일 뿐이에요. 죽은 이백섬 헌터는 B클래스였어요. 빠지려면 지금 빠지도록 하세요."
대표 클랜 로드의 말에 그들은 휘휘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혼자 보낼 순 없습니다. 미약하게나마 한 손 보태겠습니다."
오밤중의 새벽에 한 사람도 물러나지 않는다. 잠깐 그들과 시선을 마주한 은자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건물 내부로 진입합ㅡ?!"
은자림의 손끝이 떨렸다. 방금까지 결연한 의지를 보이던 헌터들의 호흡이 빨라졌다. 안색이 창백해지고, 결국 하나 둘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무슨?'
저 아래에서 끔찍하리만치 스산한 살기가 올라오고 있다. 이제껏 느껴본 적 없을 만큼 순수한 살의의 덩어리. 은자림은 입술을 짓씹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크, 클랜 로드! 위험합니다! 이건 정말!"
클랜원이 자신의 어깨를 잡은 순간, 그녀는 그를 거세게 밀쳐냈다.
"……?!"
그리고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가 터져나갔다. 동그랗게 눈을 뜬 헌터들을 비웃듯,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쉽군. 감이 좋아."
자신이 공격했음을 시인하는 목소리. 은자림은 소리가 들려온 허공으로 창을 던졌다.
"흡!"
파공음과 함께 허공에 부딪힌 창이 바닥에 떨어지고 공간을 찢듯 균열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당신은 누구죠?"
"계집. 그러는 너는 알기 쉽군. 창선의 제자인가?"
"…그걸 알고도 저와 싸우겠단 건가요?"
눈살을 찌푸린 은자림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스산한 기운을 흩뿌리는 남자. 눌러쓴 로브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가까스로 보인 남자의 입술이 비틀린 순간.
"그 이름이 널 지켜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남자의 손에서 자색 마력이 마법으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제기랄. 도대체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거야?"
아무것도 없잖아. 또 괜한 히스테리였다. 투덜대며 몸을 돌린 마법사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문… 열어놨었나?'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안에 있는 버러지들이 나오면 어떡하려고? 용기를 낸 마법사가 휙 고개를 돌렸다.
'괜히 쫄았네.'
아무것도 없음에 안도하며 다시 몸을 돌렸을 때, 마법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늑대의 탈을 뒤집어 쓴 괴물이 침을 뚝뚝 흘리며 살의에 가득 찬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괴, 괴물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커다란 앞발이 마법사의 머리를 강타했다. 아주 짧은 순간, 그는 세상이 돌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의식이 끊기기 직전, 돌고 있는 건 공간이 아니라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목 없는 시체를 내려다보던 늑대의 침이 로브의 앞섶을 적셨다.
분을 삭이지 못한 듯, 내부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노기를 삭이지 않고 울분을 담아 낮게 울었다.
"크르르―"
한 발. 또 한 발.
빠드득 갈리는 이빨이, 흉흉하게 퍼져가는 살기가 늑대의 모든 것을 대변했다. 연구실을 나온 늑대는 좁은 통로를 걸었다. 마치 시간을 주겠다는 듯 천천히. 곧 늑대는 좁은 통로에 포진해있던,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마법사들과 마주했다. 모두 열셋. 순식간에 그들의 수를 파악한 늑대가 낮게 울자 그제야 정신 차린 듯, 마법사들이 흠칫거렸다.
"스, 스컬 울프가 탈출했다!"
재빠르게 이어지는 주문 영창. 그런데도 늑대는 유유히 걸었다. 가장 빠르게 영창을 마친 주문. 넘실거리는 불꽃의 창을 만들어낸 마법사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불꽃의 창은 늑대에게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갈가리 찢겨 사라졌다.
"……?!"
유예는 주었다는 듯, 마침내 늑대가 이를 드러냈다.
하얀 두개골 아래로 보이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빛나는 순간, 마법사의 시야에서 늑대가 사라졌다.
"크아, 크아악!"
어느새 자신의 옆에 있던 동료를 물어 죽인 늑대의 빈 눈구멍을 본 순간, 마법사는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히이익!"
도대체 언제 여기까지 온 걸까? 공포에 질린 마법사의 옆을 검은 사슬이 스쳐 지나갔다.
"Lanțul corupției―!"
짧은 시간에 영창을 마친 데릭. 닿은 것을 부패시키는 사슬이 늑대를 휘감았다.
"스컬 울프가 어떻게 탈출을…"
안심한 듯, 영창을 멈춘 건 실수였다. 사슬은 순식간에 끊어졌고, 늑대로부터 짙은 살기가 형상화했다.
"불꽃이?"
마치 타버린 재를 끌어모은 듯한, 불길한 검은 불꽃이 늑대를 감쌌다.
"뭐 하는 거냐! 영창해! 영창 하라고!"
누군가의 외침에 얼어붙은 마법사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건 싸움이 아니라 도망이었다. 공포에 질린 그들에게 '맞선다'라는 선택은 남아있지 않다. 송곳니를 드러낸 늑대는 단 한 마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학살을 자행했다. 공포에 질린 마법사들이 서로를 밀치고 비집었다.
"비켜! 비키라고!"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있는 칸막이까지 도달한 마법사가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빨리. 빨리. 빨리 내려와라!
'어, 어째서?'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작동하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보며 마법사는 허탈하게 주저앉았다.
'아.'
엘리베이터의 전력 공급을 차단한 것이 자신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마법사는 자포자기한 듯 허망한 웃음을 터뜨렸다.
곧 그의 머리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웠다.
***
[위협(F) Lv.10이 최대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위협(F) Lv.10 -> 위압(E) Lv.1]
셋. 앞으로 셋.
단 한 마리도 놓치지 않겠다. 화장실로 도망친 마법사들을 모조리 죽이고도 울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밖으로 나왔을 때,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불꽃이 작렬했다.
"2절 영창이다! 절대 무사히는…?"
불사르는 화염을 잿불이 집어삼켰다. 돌풍을 일으키자 잿불이 흩날렸다.
"……?!"
눈을 부릅뜬 채 검은 불꽃에 잠식된 마법사.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치는 그를 내려다보다 다른 마법사들이 보이지 않는단 걸 깨달았다.
'어디로?'
감지가 기척을 읽었다. 전기실― 다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함인 모양. 전기실로 가는 길을 가로막은 두꺼운 벽을 마력을 담아 내리찍었다.
그렇게 두 번. 격벽이 날아가며 전기실의 닫힌 문을 박살냈다. 찌그러진 기계들을 넘어 모조 엘릭서가 있던 방까지 망설이지 않고 달렸다.
"흐, 흐흐. 기다리고 있었다!"
마법사 하나가 비열한 웃음을 터뜨렸다. 놈이 손에 쥔 버튼을 누르자 방 안을 마력이 가득 채웠다. 거대한 마법이 발현되기 전에― 마법사의 목이 떨어졌다. 데구르르 구르는 머리를 앞발로 짓눌러 터뜨리자 피와 뇌수가 오물처럼 발을 적셨다.
"……."
앞으로 하나. 냄새를 쫓아 다시 화장실 앞까지. 그러다가 몸을 돌렸다.
'…올라가지 않았어.'
전력을 공급하겠다는 자체가 멍청한 생각. 이미 엘리베이터는 작동하지 않게끔 만들어놨다. ―놈의 기척을 쫓아 여태 들어가지 않은 방으로 향했다.
'여기는?'
흙과 모래. 병장기와 과녘. 주변을 힐끔 둘러보다가 수련장 끝에서 데릭 클라크, 놈을 발견했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가장 먼저 보인 건 놈의 발치 아래 떨어진 종잇조각이었다.
'주문서?'
그래. 마법사들의 아지트였지. 없는 게 더 이상하리라. 놈이 빛에 휩싸이기 직전에 흉부를 꿰뚫었다.
"크흐흑…!"
피를 흘리고 가슴을 부여잡으면서도 놈은 비열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결국 마법사의 모습이 사라지자 늑대는 이를 드러냈다.
살기가 명백한 의지를 띄고, 아지트 전체를 잠식해갔다.
―단 한 마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살의로써.
***
"……!"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그것보다."
미약한 마력. 그리고 빛과 함께 나타난 것은 바닥에 쓰러진 남자. 잠깐 남자를 살피던 세검사는 그를 뒤집었고 심장 어림을 관통당했음을 확인했다.
"죽었군."
이미 숨이 끊어졌다. 확실한 절명에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데, 데릭? 이 남자. 이 남자예요! 데릭 클라크!"
"…당신이 말했던 그 측근인가?"
"맞아요. 아가일과 함께 스퀘어에서 추방당했던. 근데 도대체 왜?"
어디서 나타났는지. 왜 죽어있는지 떠올리기 전에― 커다란 폭음과 함께 천장이 내려앉았다.
곧 먼지가 가라앉자, 파편과 함께 떨어진 여성은 손목으로 입가를 훔쳤다.
"선자(仙子)?"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구진하의 목소리에 은자림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세검사? 당신이 왜 여기에 있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도대체 왜?"
그 의문에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듯 은자림이 천장을 향해 고갯짓했다. 곧 부서진 천장에서부터 자색 계단을 타고 누군가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
구진하는 그로부터 거대한 마력을 느꼈다.
'이건 어쩌면 홍유리보다…!'
도대체 누가 이런 마력을? 구진하의 의문에 아넬라가 씹어뱉듯 말했다.
"아가일…!"
"그럼 저 사람이?"
"맞아요. 사각지대의 수장이자…"
찍어누르는 듯한 마력에 저항한 아넬라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 망할 동생이죠."
바닥을 디딘 아가일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죽은 데릭의 시체에 잠깐 시선이 머물렀다.
"그렇군. 여긴 이미 다 정리했다 이건가."
차가운 목소리가 지하를 울렸다.
"아가일!"
"그래. 아넬라. 너도 있었군."
서늘한 시선이 닿자, 아넬라는 이를 악물었다.
"항복해! 우리 셋을 상대로 승산이 있을 것 같아?!"
여명의 3팀장인 세검사. 은자의 숲 클랜 로드인 창선의 제자까지. 아가일은 차게 식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반대로 묻지."
자색 마력이 퍼져나갔다. 서서히 커지는 마력은 끝없이 부풀어 방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중압감을 발했다. 마침내 대기를 휩쓸어 바람을 일으키고 후드가 휘날려 얼굴이 드러난 그의 눈이 시린 빛을 발했다.
"고작 너희 셋이서 날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거대한 마력의 폭풍에 구진하는 이를 악물었다.
'망할.'
뒤늦게 이 장소가 놈의 아지트임을 떠올렸다. 마법사의 아지트에서 싸운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야단났군.'
상황이 좋지 않다. 하지만 벗어날 방법이 없다.
"싸울 준비 하세요."
마력의 폭풍을 걷어낸 은자림의 말에 구진하는 작게 끄덕였다.
아가일은 물러날 생각이 없다. 설령 여기가 놈의 아지트라 한들, 물러난다면 얼마든지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텐데.
'마치 그럴 수 없는 것처럼.'
순식간에 영창을 마친 아가일이 손을 들어 올렸다.
"―Halucinaţie."
"Halucinaţie―!"
미리부터 준비되어 동시에 발해진 같은 마법이 개전을 알렸다. 고작 1초도 되지 않아 아넬라의 마법은 아가일의 마법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순식간에 간격을 좁힌 구진하와 아넬라는 각자의 무기로 아가일을 공격했다.
"됐군."
싸움은 생각보다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심장을 찌른 감촉에 손목을 털자 세검을 적신 아가일의 피가 바닥에 초승달을 그렸다. 설령 아지트라 하나 정면에서 모습을 보인 건 마법사. 마법만 조심한다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그런 착각.
"정신 차려요! 뭐 하는 거예요!"
"……!"
마력을 담은 외침에 구진하의 눈이 번뜩였다. 아슬아슬하게 검은 사슬을 피하자 아가일이 코웃음 쳤다.
"이겼다고 생각했나?"
"…언제부터?"
언제부터 환각을 보고 있었던 걸까? 그제야 스퀘어. 그중에서도 퍼플 스퀘어가 달리 어떻게 불리는지를 떠올렸다.
"환영(幻影)의 계파."
눈앞의 이 남자야말로 환영의 나비의 후계자였음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이게 아넬라가 말했던 재능인가?'
"큭…!"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은자림이 신음을 흘렸다. 도대체 언제 당한 건지 그녀의 복부에 깊은 상처가 남아있다.
'허세가 아니다.'
놈은 정말로 자신들을 쓰러뜨릴 힘이 있었다. 무너진 천장 너머로 내려온 희미한 빛. 그리고 구름이 달빛을 가린 순간, 그나마 내려오던 빛조차 사라졌다.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구진하는 침음을 삼켰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마력 감지를 사용해봤자 놈의 마력을 뚫지 못하니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다.
"괜찮습니까?"
"견딜만해요."
담담한 대답이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다. 부패의 사슬. 서서히 썩어들어가는 상처를 마력으로 억지로 누르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오래 버티진 못하리라.
"아넬라. 빛을 밝힐 수 있습니까?"
"Ușoară!"
그녀의 손끝으로부터 빛이 떠올랐다. 어둠 속을 찬연히 밝히는 빛. 분명 환하게 밝혀야 했을 텐데?
'어째서?'
빛이 어둠을 밝히지 못한다. 어째서? 의문에 답하듯 어둠이 타올랐다.
'이건?'
어둠이 아니라 마치 칠흑과도 같은 불꽃.
언젠가 보았던 기시감에 그는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통로 저편에서부터, 낮게 우는 울음소리가.
그리고 그보다 더한 살의가― 아지트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