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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53화 (53/407)

〈 53화 〉 #25 대전의 밤 (5)

가장 먼저 살의를 느낀 건 일대를 마력으로 잠식하고 있던 아가일이었다. 주문을 영창하던 그는 통로 저편에서 울부짖는 늑대를 보았다.

'짐승?'

아니, 몬스터였다.

커다란 늑대의 탈을 쓴 하얀 두개골을 가진 괴물― 스컬 울프.

'그래. 한 마리 있긴 했었지.'

난리 중에 우리를 부수고 탈출한 모양. 어차피 자신의 마력이 완전히 잠식하고 있는 이곳에선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을 터. 고작 스컬 울프 하나 따위에 낭비할 시간은 없다. 그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주문을 읊었다.

"Esti pierdut. Nu există cale de întoarcere―"

아가일의 말에 담긴 의지가 점차 마법으로 구현되어 갔다.

애착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기껏 만든 조직이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아마 자신이 없는 때를 계속 기다리고 있던 모양인데.

'아넬라.'

덕분에 일이 복잡해졌다. 아가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하니 모조 엘릭서를 뺏긴 건 아니겠지만… 데릭이 죽었다는 게 다소 불쾌했다.

'여기서 누이를 죽인다면.'

어머니께선 슬퍼하실까? 그럴 리가 없겠지. 얼마 남지 않은 마법을 완성하려는 순간.

"―――."

그는 등 뒤에서 자신을 죽이려하는 섬뜩한 기척을 느꼈다.

***

새벽의 정적을 깨는 것처럼 천장이 내려앉았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자색 계단을 타고 로브의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그로부터 천천히 퍼지는 압도적인 마력이― 그 자체만으로 무게를 가졌다.

'중압.'

거대한 마력이 무릎 꿇으라 선고해왔다. 항거하여 마력을 끌어올렸는데도 당장에라도 짓눌릴 것 같았다.

'아가일.'

아가일 모레스트.

어느새 아지트 내부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깊은 어둠에 휩싸였다.

[암시(F) Lv.7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암시(F) Lv.7 -> 암시(F) Lv.8]

내 시선을 눈치챈 건지 놈도 시선을 마주했다. 아주 짧은 시간, 마치 스쳐 가는 듯한 시선.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 버러지를 보는 듯 차가운 눈빛.

'……!'

으스러질 것 같은 압박.

환계와는 다르다. 의지를 가진 마력은 쉽게 흘려낼 수 없다.

뿌드득 이를 갈며 견뎠다. 연구실 너머 숨겨진 공간, 사육장의 처참한 광경을 떠올리자 식어가던 가슴에 다시금 불길이 타올랐다.

지하에서 챙겨온 스크롤을 찢자 옅은 빛무리가 흘러나왔다.

데릭 그리고 아가일. 사각지대의 쓰레기들.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죽이겠다고 맹세하며 스스로 느낄 만큼 격정한 상태로 놈을 노려봤다.

'아가일!'

주문서의 힘으로 놈의 배후까지 공간을 도약했다. 아가일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한계까지 벌린 턱을 닫았다.

"큭!"

몸을 억누르는 압박 때문에 움직임이 늦었다. 입안을 감도는 쇠 비린내가 감미로웠다. 손목이 사라진 놈이 어이없다는 듯 이쪽을 본다.

늑대는 망설이지 않았고, 멈추지 않았다. 돌풍과 함께 잿불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아가일은 손을 들어 올렸다.

마력이 선회한다― 그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늑대였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한 순간, 아가일은 크게 외쳤다.

"Dormi pentru totdeauna în minciuni―!"

거짓 속에 영원히 잠들라ㅡ!

마침내 영창된 최후의 주문. 5절 영창. 그 자체만으로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마법. 일전, 홍유리가 사용했던 대마법. 진홍의 마력 대신 자색으로 이루어진 그것은 심상 그 자체를 끄집어내 늑대의 또 다른 세계를 투영했다.

아가일은 먹힌 손목을 감싸며 차갑게 뇌까렸다.

"쓰레기 주제에…"

저승길 노잣돈으론 과하게 들고 갔다. 인상을 찌푸린 아가일이 포션을 들이키며 숨을 뱉었다.

"과분한 죽음이구나."

고작 몬스터 따위에게 낭비할 마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아가일은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좀 더 늦었더라면 정말 그리되었을지도. 아가일은 비뚜름히 입술을 비틀었다.

"Lumea din oglindă. Nu te vei întoarce―"

그는 다시금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

"닿지 마십시오. 이건 알파의 능력입니다."

"알파? 당신이 쫓고 있던 그 스컬 울프요?"

"놈의 스킬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넬라는 황당해했다. 고작 몬스터 따위가 이런 스킬을 가지고 있다고?

타오르는 검은 불꽃은 탐욕스레 번지며 서서히 공간을 잠식해갔다.

곧 일대를 감싼 마력이 크게 휘청였다.

'알파인가?'

뜻밖의 기회였다. 마력이 휘청였다는 것은 아가일의 집중이 흐트러졌다는 뜻이니.

"이제 조금은 보이는군요."

어둠 속에 눈이 적응하고 있었다. 불꽃을 비출 순 없었으나, 그 외의 장소라면 아넬라의 빛이 닿았다.

"이 불은 쉽게 꺼지지 않습니다. 돌아갈 길을 찾죠."

"아가일은요?"

"큭… 저 앞에 있어요."

상처를 감싸 쥔 은자림이 정면을 가리켰다. 가장 커다란 연구실… 중앙 연구실이었다.

"감지한 겁니까?"

"방금. 마력이 출렁일 때 아주 잠깐. 어서 서둘러요!"

정면 통로에는 검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덕분에 마력이 넘어오진 못했지만, 여길 지나갈 순 없을 거라 여긴 팀장이 고개를 돌렸다.

"저 길이라면."

"돌아서 가자는 건가요?"

그럴 시간이 있냐는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당할 거였다면 나서지 않았을 겁니다. 놈에겐 그만한 지성이 있습니다."

"하… 지성이요?"

믿기 어렵다는 듯 중얼거린 아넬라를 뒤로 하고 구진하는 오른쪽 통로로 달렸으나 거기엔 역겨운 괴물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키메라? 아니, 조금 다르군."

"화장실에서 나온 것 같은데요."

마치 슬라임을 끈적하고 역겹게 만들어놓은 듯한 커다란 덩어리가 통로를 메우고 있었다.

"키퍼를 세워 뒀을 줄은."

역시 스퀘어의 후계자였던 이 답게 철두철미하다. 통로를 가득 막고 있는 덩어리. 묘한 기시감에 세검을 내려다본 팀장이 한숨을 쉬었다.

'이러라고 있는 게 아닌데.'

터뜨린다면 없앨 순 있겠으나… 마치 통한 것처럼 은자림과 눈이 마주쳤다.

"가세요."

"괜찮겠습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 창을 들어 올렸다.

창선(槍仙)의 제자인 선자(仙子). 그녀로부터 비롯된 마력이 마침내 창을 가득 뒤덮었을 때, 완성을 넘어 완벽에 가까운 자세로 창이 내쏘아졌다.

"Suliţă pentru a-l ucide pe diavol!"

이미 손에서 떠난 창이었으나, 그녀의 주문과 함께 마력이 끝없이 폭증했다. 마침내 점액 괴물과 맞닿았을 때, 창은 소리 없이 괴물을 꿰뚫었다.

"마를 멸하는 창―!"

은자림이 목청껏 외친 순간, 빛이 일렁였다.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춘 빛이 사라지자 통로를 막고 있던 괴물 또한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명불허전이군요."

놀라워하는 구진하와는 다르게 아넬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슨…!"

엉터리였다.

주문과 영창이 하나도 맞물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믿을 수 없었다.

스퀘어의 마법사인 그녀는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마력을 터뜨린 게 아니다. 마력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고도로 계산된 영창과 주문으로 마법을 구현한 게 아니다. 마치 그래야 한다는 듯 마력이 그녀의 뜻을 따랐을 뿐.

상식과는 동떨어진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가세요."

은자림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무릎을 꿇었다.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던 상처가 번지며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경악하는 아넬라를 데리고 구진하는 안개처럼 자욱한 자색 마력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

지독하리만치 생생한 꿈을 꿨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꿈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말이 되냐."

침대에서 일어났더니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불쾌감에 얼른 씻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발가락으로 전원 버튼을 띡 누르자 낡은 고물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잠깐 뉴튜브를 보다가 곧바로 게임을 켰다.

"승급전이었는데…?"

들어가 보니 승급전은 끝나고 점수는 떨어져 있다. 왜? 누가 내 계정으로 돌렸나? 설마 하고 핸드폰을 뒤져봐도 계정 좀 빌렸다는 놈은 없다.

"뭐여. 싯팔."

전적을 뒤져봤더니 탈주란다.

내가 언제 탈주를 했다고?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바로 홈페이지로 들어가 문의를 넣었더니 조금 허탈해졌다.

"개빡치네."

게임 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새로 올라온 빨간 가면 쓴 미친 뉴튜버의 영상을 보면서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보니 그 사이 답변이 돌아왔다.

[문의하신 사항에 대한…]

내가 한 게 맞단다. 그럼 내가 건망증이라도 걸렸단 말인가? 청년 치매? 신경질적으로 인터넷을 끄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묵혀둔 거나 봐야지.'

소설 사이트를 열고 선호작 목록을 눌렀다. 위에서부터 읽어 내려가는 중에 알림을 켜둔 소설이 업데이트되었다는 알람이 왔다.

"오."

계속 좋아하던 소설이었다.

"완결이라고?"

462화 (完).

조금 급한 것 같은데. 외전으로 쓰겠지. 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마지막 화를 꾹 눌렀다.

[나는 죽었고, 세계는 종말을 맞이했다. (完)]

'눈이 침침하나.'

눈두덩이를 비볐는데도 여전했다. 그럼 이게 진짜라는 말인데.

"최종 보스 잡고 해피엔딩 가는 건 어디 가고?"

뒤통수가 얼얼한 기분에 댓글창을 눌렀더니, 작가가 싸질러놓은 댓글이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결말이라면 당신이 바꿔주십시오]

"뭔 씹소리야?"

그러더니 앱에서 튕겼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어이없어하며 다시 들어갔더니, 462화까지 있던 소설은 다 어디 가고 50화짜리 짤막한 소설밖에 남지 않았다.

"아 씨발."

장난치나. 이건 독자를 기만하는 거 아닌가? 곧바로 5700자를 휘갈겨 줄 생각으로 첫 화를 눌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멍하니 읽고 있었다.

"……."

그건 어떤 남자의 이야기였다.

5700자 장문의 댓글을 쓴 끝에 소설로 들어가 몬스터가 된 어느 남자의 이야기.

"답답하네."

때로는 이해되지 않을 만큼 답답하게 행동했다.

"등신같이."

답답하다 못해 등신 같을 때도 있었다.

심지어 등장인물 중에선 개연성을 밥 말아 먹었나 싶을 정도로 애새끼 같은 행동을 보이는 여자도 있었다.

[진짜 정박아 년이 따로 없네]

원래 같으면 하차했을 텐데.

'운 좋은 줄 알아라.'

그동안 읽던 정으로 댓글만 남기고 다음 화를 눌렀다.

"여기서 또 고구마를?"

원작에 있던 미친년에게 죽을 뻔했다.

냉장고에 있던 사이다를 들이켰다. 목이 텁텁할 만큼 고구마였다. 주인공은 답답하고 멍청했다. 저런 등신이 어딨겠나. 그런데도… 어쩐지 계속 읽고 있다. 관성일까? 의리일까? 모르겠다. 그냥. 그냥 읽고 있었다.

"……."

다음 화. 또 다음 화.

'뭔데.'

모르겠다.

사실 내용은 별거 없다. 그냥 흔하디흔한 소설이었다. 굳이 리메이크로 만들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세계관만 공유하고 있을 뿐인 전혀 다른 이야기. 원래의 주인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

"……."

멍하니 읽다가 결국 50화 전부를 읽고 말았다. 어느새 창문 너머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여기서 끝나네."

이걸 여기서 끊네. 미친 절단마공. 그 여운에 멍하니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시야가 흐려졌다.

'……?'

무언가 흘러내렸다. 설마 하고 뺨을 훔쳤더니 그 설마가 맞았다.

"어이없네."

이쯤 되면 기가 막힌다. 그러다가 핸드폰이 다시 한번 진동했다. 아까 봤던 소설이 업데이트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오. 연참?'

아쉽게도 공지사항이었다. 사람을 낚아도 유분수지… 그런데 어쩐지 제목이 익숙했다.

[선택하십시오]

선택하라고? 홀린 듯 방금 올라온 공지사항을 눌렀다.

[나아갈지 혹은 멈추어 설지를]

소설 속에서 계속해서 던졌던 물음.

때로는 주인공을 일으켜 세우고, 조언이 되었으며, 지침이 되는 말이었다.

"컨셉 미쳤나."

미친 작가 새끼.

킥킥 웃으며 앱을 종료했다. 그런데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사라졌다.

"아?"

어디, 어디 간 거지?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짜증은 짜증대로 나는데 눈시울은 계속 붉어졌다. 아까 한 방울 흘렀던 눈물은 어느새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 씨. 쪽팔리게."

선임한테 까였을 때도 이렇게 울어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흐르다가, 흐르다가. 안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시발."

오늘따라 이상했다.

알 수 없는 일들이 자꾸만 벌어졌다. 그러더니, 화룡점정을 찍는 것처럼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아갈지를 혹은 멈추어 설지를]

애써 잘못 들은 거라 생각하고 무시했지만,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멍하니 굳어 있다가 들려오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뀨르륵. 뀨르륵!"

고개를 돌려보니 처음 보는 생물이 창문에 찰싹 붙어서 나를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뭐야. 저게.'

뱀도 아닌 것 같고. 새도 아닌 것 같고. 뱀처럼 생긴 기다란 몸에 날개가 달린 이상한 생물. 그것이 심통이 난 것처럼 꼬리로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뀨루루룩! 뀨루루루룩!"

열어줄 리가 있나. 냉장고로 가서 먹을 게 없나 뒤져봤다. 참치 캔에 밥을 대충 비벼서 전자렌지에 덥혔다.

'맛없네.'

평소엔 잘만 먹었는데 왠지 좀 답답했다.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아.'

머릿속에 안개가 끼어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잊고 있는 게 무엇인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뭐지? 내가 뭘 잊고 있지?'

목이 멨다.

웬 칭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담담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내면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먹는 둥 마는 둥 밥을 먹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아직 그 생물이 창가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넌 뭐냐?"

구경이나 할 겸 창가로 다가가자 그것이 반갑다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강아지 같네.'

해를 끼칠 것 같진 않다.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창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들어온 그것이 멋대로 방안을 휘저었다.

"야! 야!"

방안이 온통 빛가루로 가득 찼다. 그러더니 녀석이 내게 다가왔다.

"…뭐?"

안아달라는 듯 날개를 벌린다. 내가 미쳤나.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더니, 녀석이 뒤통수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 씹!"

그러더니 쏙 들어가 사라졌다.

"어?"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프지 않다. 아니, 어쩐지 평온함까지 느꼈다.

'내일 병원이라도 가볼까.'

환각이라도 본 모양이다. 진짜 미쳐가는구나. 한숨을 쉬며 침대로 몸을 던졌더니, 우지끈 무너져내렸다.

"씨발 진짜!"

되는 일이 없다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팔이 이상했다. 팔이 있어야 할 곳에 발이 있었다.

"뭐야. 이게?"

앞발. 커다란 짐승의 검은 앞발이 부서진 침대를 밟고 있었다.

어느새 내 모습이 변해있었다. 하얀 두개골에 검은 털을 가진 커다란 괴물 늑대로. 두개골 안에 있던 페어리 드래곤이 왜 그러냐는 듯 갸웃거렸다.

'내가 잊고 있던 게.'

기억이 부상했다.

잊고 있던 의식이 떠올랐다.

점점 기시감이 커지자―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고 마침내 세상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부글부글 끓고 있던 것이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

좌절. 분노. 실망. 의심. 죄책감과 무력감. 그리고 울분.

"아."

그것은 괴물이 된 남자가 느꼈던 감정― 그래. 바로 내가 느낀 감정들이었다.

[선택하십시오]

텅 빈 허공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나아갈지를 혹은 멈추어 설지를]

남자는, 아니 나는 언제나 같은 선택을 했었다. 그리고 분명 이번에도 그러하리라.

[그렇다면 나아가십시오]

그러나 어떻게? 이 정교한 가짜 세상에서 어떻게 벗어나라는 말인가?

[환상이란 나약한 자가 보는 거짓된 세계]

목소리가 변했다.

여태까지와는 달랐다.

시스템이 아니라 '어떤 이들'의 목소리였다.

후회로 가득한. 마치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듯 회한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자신을 이겨내고 마침내 진실을 보아라]

페어리 드래곤이 꼬리 끝으로 두개골을 쓸었다.

얼른 나가자고. 여기에 더 있기 싫다고 칭얼거렸다.

'아. 그래.'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환상을 쳐부술 방법은―

[극기(克己) : 4 → 10]

그리고 세상이 무너져내렸다.

***

무너진 세상, 사라진 늑대.

아무도 없는 심상 세계를 둘러보다 조용히 중얼거렸다.

[…기다리겠습니다]

머지 않은 미래. 당신이 나를 찾아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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