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26 흑린(黑燐)
안개처럼 스산히 퍼진 검은 마력이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
어둠이 가득 찬 지하에 검은 불꽃과 마력이 넘실거렸다. 서로를 죽이고 말겠다는 살기가 공기를 이완시켰다.
스스스…
견디지 못한 천장이 제일 먼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파편이 시야를 가린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늑대와 마법사가 동시에 움직였다.
"Lanțul corupției―!"
세 겹의 사슬이 늑대를 쫓았다. 좁은 방 안에서도 사슬은 늑대에게 닿지 않았다. 그에 아가일은 이를 악물고 두통을 억눌렀다.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나 보겠다!'
사슬에 이어 검은 마력이 뒤쫓았다. 흉흉한 암흑 속에서 늑대는 망설이지 않고 달렸다. 사슬에 따라잡히기 직전, 늑대가 벽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아가일이 손을 들어 올리자 검은 가시가 솟아올랐다. 예상했다는 듯 선회한 늑대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까불지 마라!"
검은 마력이 이제까지보다 빠른 속도로 추격을 개시했다. 늑대의 동선을 간파한 아가일이 씹어뱉듯 영창했다.
"Congelare."
순식간에 모든 걸 얼리는 극한(極寒).
스산한 한기에 대기 중의 수분이 동결되어 얼어붙는다.
"Sloi de gheaţă― Lansa!"
날숨과 함께 입김이 얼었다. 온도계가 나타내는 온도가 한없이 떨어지더니 견디지 못하고 깨졌다. 얼어붙은 수분은 고드름으로 빚어져 쏘아졌다. 아가일의 2절 영창이 늑대에게 닿지도 못하고 모조리 녹아내렸다.
'다르다.'
늑대의 눈 안에서 무언가가 타오르고 있었다.
'……!'
아주 짧은 순간, 그는 무언가의 편린을 엿보았다.
'뭐지?'
아주 짧은 순간, 흥미 없다는 듯한 시선이 느껴진 듯한…
'착각인가?'
아가일은 고개를 저었다.
'확인해보면 되겠지.'
부패의 사슬을 검은 마력이 휘감았다. 닿기만 해도 죽음은 기정사실이다. 사방을 좁혀오는 사슬과 검은 마력이 늑대를 감쌌다.
'이걸로 끝이다.'
확신에 찬 마법사가 주먹을 쥔 순간, 늑대에게서 광폭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큭!"
덮쳐오던 사슬을 쳐내고, 검은 마력을 밀어낸다.
얼어붙은 방 안. 아직 증발하지 않은 얼음 파편이 흩날렸다. 반사적으로 들어올린 두 팔에 무수히 많은 파편이 틀어박혔다.
"……!"
아가일의 눈에서 안광이 폭사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차가웠다. 저 바람만 조심하면 불꽃이 자신에게 닿을 일은 없다. 냉정하게 판단을 마친 그가 허공을 휘저었다. 아지트를 집어삼켰던 불꽃을 마력이 다시 집어 삼켜갔다.
"차라리 나타나질 말았어야지."
거슬렸던 불꽃이 사그라진다.
도망쳤다면 목숨이라도 건졌을 텐데.
아가일의 조소를 듣는 둥 마는 둥 늑대는 자세를 낮췄다. 그렇게 또 한번 바람이 일자, 늑대가 모습을 감췄다.
'어떻게?'
일순, 늑대는 마법사의 시야를 벗어났다. 잿불로 덥혀진 방. 돌풍이 휩쓴 상승기류가 아지랑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래봤자 짐승이군.'
마력을 넓게 퍼뜨린 아가일이 늑대의 기척을 감지했지만,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달려온다고?'
기습이 아니란 말인가? 놈은 정면에서 달려오고 있다.
'어떻게?'
이미 검은 마력이 방을 잠식하고 있다. 놈의 불꽃은 검은 마력이 모조리 집어삼켰다. 즉, 이 방 자체가 이미 자신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불가능하다.'
곧바로 검은 마력에 당해 쓰러져야 옳다.
하지만 늑대는 달려오고 있다. 그것도 멈추지 않고 곧게…!
아가일의 마력이 마치 기름이라도 된다는 듯,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놈의 눈두덩이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길이 마력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거였나?!'
늑대가 가진 마지막 패.
아가일은 눈을 부릅떴다. 명백한 살기를 띠고, 죽이기 위해서 달리고 있다. 아까까지와는 격이 달랐다. 성질이 전혀 다르다. 단순히 태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탐욕스레 먹어 치우고 있다.
'어떻게 갑자기?'
방금까지만 해도 마력이 우위를 점했다. 그런데 어떻게? 설마 여태껏 숨기고 있었다고?
'막을 순 없다.'
마치 귀신들린 것처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검은 불꽃 앞에 검은 마력은 버티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시선이 교차하는 가운데― 표정을 일그러뜨린 아가일이 중얼거렸다.
"…그래. 좋다."
놈의 질주는 막을 수 없다.
아가일은 달려오는 늑대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 나서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놈이 숨기고 있던 것은 검은 마력조차 집어삼키는 탐욕스러운 불꽃― 그렇다면 그것조차 쳐부수면 될 뿐. 아가일은 대기 중에 넓게 퍼진 마력을 이끌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형태를 이뤄간다. 아니, 되찾아갔다.
"――."
불러일으킨다.
검은 장미는 피어나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져 버린 건 아니었다.
주문 보류. 그가 가지고 있던 최후의 마법이 다시금 부상해 떠올랐다.
"O liniște nesfârșită va cădea Totul se va sparge―!"
4절― 그리고 늑대에게 방해받았던 최후의 5절을 영창한다.
아넬라가 그리도 경계하던 대마법이 마침내 세상에 드러났다.
마법을 구현함과 동시에 아가일이 무릎 꿇었다. [대마력 (B)]이 없었다면 쓰러져도 진작에 쓰러졌을 터. 이미 한계치를 넘어 마력을 억지로 끌어낸 탓에 거센 반동이 돌아왔다.
'엉망이다.'
최악이었다.
누군가가 몸 안에 손을 집어넣어 멋대로 휘저은 것 같다. 내장까지 충격이 닿았는지 선혈이 흘렀다. 입가를 훔친 아가일은 당장에라도 끊어질 듯한 의식을 억지로 붙잡았다.
5절 영창. '침묵의 장미'.
몸 상태는 엉망이었으나, 영창을 마쳤다.
이걸로 끝. 아가일은 피어오른 장미가 늑대뿐만이 아니라 결국에 아지트에 자리한 모든 생명을 앗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차라리 잘 됐다.'
번거로웠던 세검사도, 어리석은 누이도, 발목을 잡던 창선의 제자도. 지상에 있던 버러지들까지 모조리.
'모조 엘릭서만 있다면.'
아지트를 빠져나가는 것도. 추격을 뿌리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도 가능할지 모른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건 기적을 모방한 이적이었으니까. 아가일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머님.'
당신이 날 죽이지 않은 건 실수였다. 그래. 누이의 목을 들고 찾아가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냉담한 표정이 조금은 금이 갈까? 그 모습을 상상하기만 해도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곧 찾아가겠습니다.'
***
'저 검은 마력은 힘들어.'
놈의 마력은 모든 걸 부수고 으스러뜨렸다. 그것은 내 잿불이라고 예외가 되진 않았다. 아지트를 가득 메웠던 잿불은 언뜻 검은 마력과 수평을 이룬 듯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서 염원했다.
더 강한 불꽃을. 놈을 쓰러뜨릴 수 있는, 죽일 수 있는 불꽃을. 모든 것을 불사르는 칠흑의 불꽃을…!
'귀화(鬼火).'
[귀화(C) Lv.1를 획득했습니다]
[잿불(D) Lv.3이 귀화(C) Lv.1에 통합되었습니다]
[귀화(C) Lv.1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귀화(C) Lv.1 → 귀화(C) Lv.2]
[남은 스킬 포인트 1]
여태 아끼고 있던 스킬 포인트를 모조리 쏟아부었다.
유일하게 놈을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스킬을 획득했다.
귀화라는 이름답게 귀신들린 불꽃은 탐욕스레 검은 마력을 먹어 치웠다. 이제까지와는 양상이 달라졌다. 검은 마력에 밀리지 않게 된 이상, 쓰러뜨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놈의 마법을 보기 전까지는.
검은 장미가 피어오른 순간부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저건.'
다르다.
마력이나 마법의 규모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질적으로 달랐다. 그때 그 여자가 왜 절망했는지 알 것 같다. 저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힘이었다. 그렇게나 벼려진 살기가, 끓어오른 감정이 흩어질 만큼 두려움을 느꼈다.
'아.'
절망을 느끼고, 가슴이 옥죄어왔다.
생물로서의 본능이 여기서 끝이라고 고했다.
더 나아갈 길은 없다. 남은 시간도 없다. 네 종착점은 바로 여기라고 말한다.
검은 장미는 철저하게 또 처절하게 모독했다.
5절 영창. 마침내 피어오른 그것은 '모든 생명의 종착점'이었다.
죽음 그 자체를 형상화한 것 같은 공포. 나아가던 다리가 후들거렸다. 당장에라도 멈추고 싶었으나, 어째서인지 그러지 못했다.
등을 돌리고 달아난다면. 어떻게든 도망간다면 영원한 침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망쳐.'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가슴은 울부짖었다.
이대로 도망칠 거냐고 소리쳤다.
정말 그걸로 괜찮겠냐고 물어봤다.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느샌가 들려온 목소리가 계속해서 물어왔다.
답할 여유는 없다.
그저 계속 달리고 있다.
달리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걸까?'
모르겠다.
결국 이기지 못했다.
그게 못내 분해서.
분하고 분해서….
주마등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시간이 느려져 갔다.
태엽이 풀린 것처럼 점점 느려지더니, 마침내 의식이 가라앉았다.
***
끝없이 물어오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네가 원하는 건 뭐야?'
호기심 많은 요정처럼. 그러나 그것은 요정처럼 온순한 존재가 아니었다.
'살고 싶어?'
그래. 살고 싶다.
머리는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것을 웃도는 감정이 있었다. 타오르는 감정은 사각지대의 모든 것을 끝내기 전까지 절대 꺼지지 울분이었다.
'그럼 죽이고 싶어?'
…죽이고 싶다.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흔적도 남기지 못하게끔 모조리 불사르고 싶다. 맹세했다. 그들 모두를 죽여서 눈 없고 혀 없는 자들을 위해 바치리라고.
그러니까 쓰러질 수 없다. 물러날 수 없다. 이 감정에 등을 돌려선 안 된다― 그리하여 나는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넌 멍청해.'
그것이 키득거렸다.
천하의 바보천치라고 비웃었다.
그래도 좋다. 이 울분을 풀어낼 수만 있다면. 그 맹세를 지켜낼 수만 있다면.
'바보~ 그건 네 감정도 아니잖아?'
그것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생각했다. 꼭. 꼭 나를 위해서만 화낼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을까. 그러자 그것이 자지러지듯 웃었다.
'얼간이! 멍청이! 괴물이 이타심이라니!'
데굴데굴 구르며 한참을 깔깔거리던 그것이 눈꼬리에 맺힌 방울을 훔쳤다. 그러더니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좋아. 도와줄게.'
선심 쓴다는 듯한 태도. 그것이 양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그러곤 마치 재는 듯이 속삭였다.
'잘 들어. 내 이름은…'
***
태엽이 다시 감겼다.
세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의아하다는 듯 아가일이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무언가를 느낀 것 같은데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싸움은 여기서 끝이다. 끝없이 달리던 늑대는 어느 순간 멈춰섰다. 이제 와서 죽음을 받아들인 걸까?
"차라리 오질 말았어야지."
어리석은 짐승 같으니. 아가일은 늑대를 조소했다. 덕분에 골치를 앓았다. 아, 그래. 버러지치고는 꽤 분발한 게 아닐까.
'이제…!'
검은 장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환희 속에서 아가일은 전율을 느꼈다. '침묵의 장미'에서 검은 마력의 향이 퍼져가기 시작했다. 닿는 생명을 침묵시키는 죽음의 향― 검은 장미의 향기를 맡으며 아가일은 깊은 황홀경에 빠졌다.
'이거다.'
5년 전 그날부터. 그가 강욕에 삼켜진 날부터 쭉 바라왔던 순간― 그것을 방해하는 것처럼 무언가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
아가일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검은 불꽃이 또 다시 타오른다. 최후의 발악. 쓸데없는 발버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헌데… 늑대에게서 피어오른 불꽃이 어째서인지 꺼지지 않았다.
'……?'
일대에 만연한 마력을 놈의 불꽃이 집어삼켜 갔다. 그에 아가일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개화를 마쳤는데?'
검은 장미가 피어올랐는데. 자욱한 향이 일대를 뒤덮었는데, 어떻게 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
전조는 그것이었다.
"……."
작게 중얼거린 늑대로부터 불꽃이 피어올랐다. 검고 짙은 아니, 그 어떤 색조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오직 검은 불꽃이었다. 밝아온 새벽조차도 그것을 밝히지 못했다.
되려 그것이 빛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지하에 피어오른 칠흑의 불꽃은 빛을 모조리 집어삼켜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였다.
밝아온 여명을, 지하에 피어오른 한 줄기 불꽃이 모조리 집어삼켰다.
세상은 다시 어두컴컴한 밤으로 변했다. 칠흑으로 덧칠된 세상에서, 나는 조심스레 그것의 이름을 불렀다.
'흑린.'
[일시적으로 흑린(黑燐) 스킬을 획득합니다]
등급 불명의 스킬― 계속 속삭여왔던 목소리.
"……?"
의아해하는 아가일의 시선을 느끼며, 검은 장미의 향을 주시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모르겠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염원.'
바라는 것에 흑린이 응답했다. 검은 장미를 불사른다― 마치 그래야 한다는 듯, 일대에 자욱했던 향까지 모조리 사라졌다.
'…….'
멍하니 피어오른 칠흑의 불꽃을 보았더니, 그것이 재촉하듯 일렁였다.
'오래가지는 않아.'
다음으로 나는 아가일을 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놈이 크게 소리쳤다.
"무슨 짓을 한 거냐!"
크게 소리치는 아가일.
믿을 수 없다는 듯, 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그의 등을 찢어발기고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욕.'
알고 있다.
놈이 가진 죄의 상징이자 낙인.
스킬로 발현된 악마의 형상. 마침내 강욕이 입을 벌리자 아지트의 천장에서 바닥까지 닿았다. 그 기괴한 모습으로 모든 것을 먹어 치우겠노라 입을 벌린 강욕이 천장과 바닥을 씹어 삼켰다. 저돌적인 움직임. 놈의 돌진은 멈춰 세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불사르면 된다.
내 염원을 받아들인 흑린이 강욕을 불살라 소멸시켰다.
"……!"
악마가 사라지자, 아가일이 날뛰었다.
여태까지의 이지적인 모습을 모두 벗어던지고 혈안이 된 눈을 부라렸다.
"너, 너…!"
―대가 없는 힘은 없다. 모든 힘에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랬구나.'
흑린이 대가로 가져가는 건 내 감정이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분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아가일 하나뿐. 이미 마력이 바닥을 드러낸 모양인지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다.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헌터를 웃도는 포텐셜. 멍하니 보고 있자니 그것이 조용히 속삭였다.
'어떡할래?'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흑린이 키득거렸다.
'역시 넌 바보야.'
그럴지도.
달려드는 아가일을 향해 마주 달렸다.
"――!"
놈이 무어라 외쳤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내 마력도 진작에 바닥을 드러냈다. 마법사와 늑대는 시선을 교차했다. 처음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서로를 죽이겠다는 의지가 남아 있었으니까.
살기와 살의가 서로를 겨눴다.
아가일이 주먹을 뻗었다. 높은 포텐셜에서 비롯된 웅혼한 주먹이 공기를 갈랐다.
'빨라.'
눈으로 보고도 쫓기 힘든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눈보다 앞서는 것이 있다. 직감과 간파. 놈이 그렇게 움직일 거라 이미 알고 있었다. 몸을 낮춰 녀석의 주먹을 피했다. 곧 뒷발에 탄력을 부여해 낮은 자세에서 뛰어올랐다. 놈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다. 한계까지 벌린 턱. 이미 돌아가기에는 너무 깊게 들어왔다. 그걸 깨달은 모양인지 아가일은 반대쪽 손을 휘둘렀다.
"……!"
깊게 파고든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놈이 승리를 확신한 일그러진 미소를 띠며 아래서부터 주먹을 휘둘렀다. 400에 가까운 힘. 거기에 더해 완벽에 가까운 타이밍.
'피할 수 없어.'
이미 늦었다. 새삼 탄력을 발휘해봤자 피하지 못한다. 내 힘까지 더해져 카운터로 들어가는 깔끔한 일격. 쩍 벌려진 턱이 놈에게 닿기 직전, 놈의 주먹이 아래에서 위로 두개골을 쳐올렸다.
"큭…!"
마법사는 희열에 가득 차 웃었다. 손에 남은 감각이 말해주고 있다. 더할 나위 없는 감촉이었다. 분명 싸움은 여기서 끝났다고 그는 확신했다.
그러나―
"……!"
끄드드드득.
늑대의 이빨이 맞물렸다.
아가일은 무엇 하나 틀리지 않았다.
설령 마력이 없다고 해도 그는 B클래스 이상 가는 실력자. 마법사의 주먹은 늑대의 두개골을 일격에 분쇄할 만한 위력이 있었다.
'근데 어떻게?'
의문에 가득 찬 아가일이 늑대의 턱을 올려 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아."
그제야 눈치챈 모양인지 그는 외마디 소리를 뱉었다.
"하…"
늑대의 두개골을 친 것은 손목. 주먹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물어뜯겼었지.'
최후의 순간, 그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망할."
그리고, 늑대는 일말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