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27.5 남매
* 이번 회차는 아넬라와 아가일의 과거 이야기입니다.
조연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굳이 읽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오늘 18시에도 정상 분량으로 업로드됩니다.
발아래 드리워진 그림자. 아넬라가 멍하니 올려다보자, 어떤 남자가 우산을 들고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제 좀 괜찮습니까?"
그의 물음에 아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어차피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으니까."
'괜찮다라…'
담배 연기가 천천히 퍼져나갔다.
"고마워요."
"뭐가 말입니까?"
"전부 다요."
아넬라는 숨을 뱉었다.
"사실 당신이 날 믿을 근거는 하나도 없었잖아요?"
"거래였을 뿐이죠."
그 말에 아넬라는 쓰게 웃었다.
"그랬죠. 걱정 말아요. 약속은 반드시 지킬 테니까."
"……."
"왜요~? 못 믿겠어요?"
그는 고개를 젓곤 조심스레 물었다.
"…스퀘어로 돌아가려는 겁니까?"
"그래야겠죠. 이제 와서 어머니의 뒤를 이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해요. 그래도 거기가 내가 있을 곳이잖아요?"
아넬라는 분명 스퀘어에서도 뛰어난 마법사였지만, 마스터의 자리를 노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 생각은 아가일을 보고 더 강해졌다. 아가일의 잘못은 결코 용서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환영의 나비가 그를 죽이지 않았던 건… 바로 그 재능 때문이 아니었을까.
3년이나 동생의 자리를 채우지 못한 누나. 그 열등감.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
한참이나 정적이 이어졌다. 유골함을 끌어안은 아넬라가 중얼거렸다.
"만약에 제가 그때 용기를 냈었다면 달라졌을까요?"
"용기?"
"그날, 아가일이 처음 사람을 죽였던 날…"
아넬라는 조심스레 과거를 회상했다.
여전히 후회하고 있다.
조급하고, 어리석었던 자신을. 5년 전 그날부터 여태까지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아가일.'
동생은 언제나 뛰어났다.
그게 처음엔 마냥 기뻤다. 하지만 어느샌가 어머니의 관심이 줄었다. 주변 사람들이 기대를 거는 일도 줄었다. 그래도 나는 아가일이 싫지 않았다. 그래. 그가 나를 뛰어넘기 전까지.
'…….'
아가일에게 처음으로 진 나는 기쁜 마음으로 아가일을 축하해줬다.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앵무새를 선물해줬다. 동생은 기뻐했고, 나는 미소지었다.
그 자리에서는.
그날 이후로 점점 동생의 얼굴을 보는 게 힘들어졌다. 하루 그리고 이틀… 점점 아가일에게 지게 되는 날이 늘어갔다.
마침내 그를 이길 수 없게 됐다는 걸 알게 되자, 재능이라는 벽의 두께를 실감한 나는 좌절해 방에 틀어박혔다.
기껏 찾아온 아가일의 얼굴도 보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나 틀어박혀 있다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방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내 존재는 잊힌 지 오래였다.
어머니는 결국 아가일을 후계자로 공표했고, 나는 절망하고 말았다.
이제 내게 기대하는 사람은 남아있지 않다. 내 부족한 재능이 발목을 잡았다. 노력으로 좁힐 수 없는 재능의 벽은 나를 지치게 했다.
그렇게 열등감은 커져만갔다.
아가일을 볼 때마다 내 부족함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게 싫어서 의도적으로 그를 무시했다.
'그래서.'
천천히 모든 것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과도한 기대는 사람을 무너지게 만든다.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은 사람을 좀먹어간다.
아가일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소 대신 냉소를, 웃음 대신 조소를 띠기 시작했다.
여전히 어머니는 무관심했고, 나는 아가일을 따라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나는 열등감을. 아가일은 상처를 품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우연히 동생이 사람을 죽이는 걸 보았다.
왜 그랬냐는 물음에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죽은 이의 옷차림이 너무 수상했으니까.
놀란 나는 방문을 닫고 숨어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문밖에서 아가일이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나가지 못했다. 문고리 너머로 본 동생은 웃고 있었으니까.
'아넬라.'
망가진 듯 울며 그는 하염없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게 너무 두려웠다.
한참을 흐느끼던 그가 사라질 때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떨고 있었다. 방 아래 틈새로 보이는 그림자가 유난히 컸다.
어쩌면 그때, 동생은 이미 악마에게 먹힌 게 아니었을까?
사건은 흐지부지 종결됐다.
그날 이후, 아가일은 살아있는 것에 대해 광적인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때부터였다.
'광기.'
동생의 눈에 광기가 보이기 시작한 건.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아니, 깨닫지도 못했다.
어머니의 채찍질, 주변의 기대. 아가일은 그 모든 것에 부응했다.
더 이상 내가 그와 비교되는 일도 없었다. 이미 서로 비교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격차는 벌어지고 말았다.
자신이 죽어라 노력한 일을 동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 버린다. 내 속은 점점 곪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기대에 처음으로 부응하지 못한 아가일은 키우던 앵무새를 죽였다.
내가 선물했던 앵무새였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아가일은 죽인 앵무새를 박제해 장식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앵무새의 빛이 바랬을 무렵, 그래.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아가일은 스퀘어 소속의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아무리 그라 해도 처벌을 피할 순 없었다.
아가일은 고개 숙이고 있었지만, 언뜻 보였던 눈동자가 미친 듯 떨리고 있었다.
그건 희열이었다.
동생은 살인에 희열을 느끼는 미치광이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라는 듯, 어머니와 내 이름을 불렀다.
"어머님 그리고 아넬라."
섬뜩했다.
아가일이 날 죽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나는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부탁이었던 것 같다.
제발 자신을 좀 말려달라고.
거기서 열등감을 버리고, 조급함을 버리고 말을 걸었다면. 조금만 용기를 냈더라면 우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웃고 있었다.
그 대단한 동생이 처벌을 받는다. 어쩌면 스퀘어 후계자 자리를 박탈당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건은 또다시 흐지부지 종결되고 말았다.
그때쯤, 나와 아가일은 서로 얼굴도 보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동생의 더한 죄가 드러났다.
나도 이후에 들은 거지만, 아가일은 다른 사람들의 마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고 한다. 무척이나 잔혹한 방법으로. 결국 아가일은 추방당했다.
의외였다. 어머니는 아가일을 죽일 거라 생각했는데. 자비였을까? 아님 아쉬움이었을까?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흘렀을 때, 어머니는 내게 말했다.
'아가일을 찾아 데려오렴.'
잔인한 말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동생의 그림자를 쫓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 나는 결국 동생의 그림자도 되지 못했구나.
'어머니.'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어머니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나는 아가일을 데려오고 싶지도 않았고 데려올 수도 없었다.
무슨 생각이셨을까. 결국, 내가 죽어야만 속이 시원하셨던 걸까?
…모르겠다.
그렇게 3년. 스퀘어의 도움은 받고 있었으나 소극적이었다. 아가일과 싸운다는 그 자체를 꺼리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다. 어머니가 직접 오시는 게 아니라면 그 누구도 아가일을 잡을 순 없다는 것을.
동생의 소식만을 어렴풋이 들으며 허망한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그때쯤 나는 포기하고 있었다. 그냥, 그냥 이대로 살아가자고 생각했다.
'구진하.'
그때, 이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여명의 3팀장. 수준 높은 검사… 어쩌면 이 남자라면 아가일을 멈출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남자를 만났을 때, 식었다고 생각한 가슴 속 열망이 다시 타올랐다.
3년. 이미 아무렇지도 않은 3년이었다.
하지만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자 그 3년이 한탄스러워졌다. 그래. 이 남자는 내게 희망이었다.
그렇게 아가일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나는 그와 함께 동생이 만든 사각지대를 부쉈다. 뒤늦게 찾아온 아가일과 싸우게 됐다.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3년간의 일이 끝나고, 동생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이었다.
동생은 괴물이 되어 있었다.
결국 나와 그는 환영에 빠지고 말았다.
환영 속에서 내가 본 건 어린 시절의 우리였다.
점차 시간이 흘러갔다.
환영속에서 우리는 달랐다.
즐거웠고, 행복했다.
이렇게 파탄 나지 않았었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용기를 냈더라면.
'…….'
그래서 환영이란 걸 깨달았다.
위화감이 너무 커서, 가짜란 걸 알면서도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 그리고 동생.
환영 속에서 우린 행복했다. 그게 너무나 비참해서 깨고 싶지 않았던 환영에서 깨고 말았다.
그래서였다.
현실로 돌아왔을 때, 죽은 아가일을 하염없이 바라본 것은. 그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그런 게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럴 수 있었다고. 결국 그가 원했던 건.
나는 힘없이 자조했다.
'너무 늦었어.'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
동생의 죄는 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덮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연히 죗값을 치러야한다… 그렇게 그는 어떤 늑대에게 죽음을 맞았다.
'…….'
가슴이 먹먹하게 메왔다. 고인 웅덩이에 빗물이 떨어지자 마침내 그녀는 기나긴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을 꺼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코트를 벗어 둘러주었다.
"괜찮습니까?"
"괜찮대도 그래요. 저 아무렇지도…?"
결국, 눈꼬리를 타고 무언가가 흘러내리자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그녀는 힘 빠진 듯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 참 눈치 없네요."
뜬금없는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산… 치우라고요."
그녀는 유골함을 끌어안았다.
그날은 그렇게 종일 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