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30 용의 황무지 (3)
쿠구구구!
다시 한번 바닥이 꺼지고 어스 서펜트가 아래로 가라앉았다. 삼켜진 나는 강한 충격에 몇 번이나 구르다가 아래턱에 촉수를 박아 가까스로 버텼다. 억지로 목구멍 너머로 넘기려는 걸 견디자 뱀 특유의 끝이 갈라진 붉은 혀가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큭!'
그것이 마치 또 한 마리의 뱀처럼 추격해왔다. 어떻게든 휘감아 식도로 넘기면 끝ㅡ 다가오는 혀를 막으려 귀화를 일으켰다. 검은 불꽃이 닿자 어스 서펜트는 화들짝 놀라 입을 벌렸다.
'됐…?!'
―틀렸다.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거센 물살이 밀려들었다. 언뜻 생각하곤 있었다.
'놈이 기절하지 않았던 이유.'
몸이 젖어있던 이유. 무엇보다, 수영 스킬을 가지고 있던 이유를.
'황무지가 아니었어. 그 아래는…!'
황무지 바닥 아래 광대한 지하수가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 때문에 놈이 받은 충격이 작았다. 충돌한 지면은 얇았고, 그 얇은 바닥을 부수고 물속으로 추락했으니까.
'어떻게 살아가는 건가 했는데.'
이 척박한 땅에서 몬스터들이 살아남은 이유가 있었다. 들이키는 물살이 마치 해일처럼 밀려와 기껏 일으킨 불꽃이 허망하게 꺼졌다.
'어떻게든 나가야 해.'
거센 물살이 끝도 없이 밀려온다. 버티기는커녕 수압에 몸이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모든 피해 감소(D) Lv.7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모든 피해 감소(D) Lv.7 → 모든 피해 감소(D) Lv.8]
가까스로 뻗은 촉수로 놈의 이빨을 휘감으려 했으나, 허망하게 끊기고 말았다. 경화를 사용해봐도 마찬가지였다.
'…미친!'
빠져나가기는커녕 견딜 수조차 없다. 결국 놈의 턱이 다물어질 때까지 허망히 바라보다 물살에 휩쓸렸다. 얼마나 떠내려갔을까? 마침내 유속이 느려지자 안간힘을 써 멈췄다. 가까스로 참았던 숨을 뱉었을 땐 사방이 붉은 살덩이로 가득했다.
'여기는?'
천장에서 떨어진 액체에 살짝 닿은 순간, 털이 녹아내렸다.
'위장이구나.'
그나마 놈이 삼킨 물과 섞여 위산의 농도가 옅어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오래는 못 있어.'
산은 얼마든지 분비된다. 하물며 놈의 덩치로 보면 그 양도 상상을 초월할 터. 가능한 한 빨리 여길 벗어나야 한다.
'열기?'
저 멀리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잠깐 의아해했지만, 곧 상황을 이해했다.
'―맞아. 여기가 위장이라면.'
위장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열기가 무엇이겠는가?
'귀화.'
귀화가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는 뜻이다. 거세게 타오르는 열기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아까까진 황망함에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인제 보니 더없는 호재였다.
'움직인다.'
진동. 그리고 밀려드는 물에 유속이 빨라졌다. 다시 한번 거센 물살에 더 깊은 곳으로 떠밀렸다.
'차라리.'
이렇게 된 바에야. 물의 저항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유선형으로 몸의 형태를 바꾸고, 흐름에 몸을 맡겼다.
[수영(F) Lv.8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수영(F) Lv.8 → 수영(F) Lv.9]
순식간에 휩쓸려 내려간다. 여기가 위장이라면 분명 항문과 연결되어 있다. 차라리 그리로 나가는 게 안전할 거다. 여전히 밀려드는 물은 놈이 아직 수중에 있다는 걸 알려준다.
'대체 어떻게 수영하는 거야?'
아무리 스킬이라지만 이 무식한 몸뚱아리로 가라앉지 않는다는 게 믿기 어려웠다. 놈의 거체에 부력을 줄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깊은 호수란 말인가? 탄식이 나오는 가운데 다시 한번 흔들리며 천장이 눕고, 바닥이 일어섰다. 어스 서펜트가 숨을 참지 못하고 부상하는 모양이었다.
'…좋아.'
아까 느꼈던 수압이라면 지금 나가봤자 견디기 어렵다. 탈출은 놈이 뭍에 올라간 뒤에.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갑작스레 느껴지는 위협적인 기척에 얼른 탄력을 발했다.
[고대 용거북]
[체장 4.26m] [체고 2.11m] [체중 1.26t]
[힘 388] [민첩 216] [체력 224]
'……!'
방금 어스 서펜트가 물을 들이켤 때 함께 삼켜진 모양. 놈은 기습이 실패한 게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용거북이란 이름과 달리 용이라기보단 악어와 거북이 섞인 듯했다. 굵은 악어의 몸통에 거북의 머리와 등껍질이 있는 기이한 몬스터. 나는 눈을 빛냈다.
'이 녀석만 먹으면.'
안 그래도 체력이 달리던 참이었다. 재생은 어디까지나 상처를 회복시킬 뿐. 써버린 체력이 돌아올 일은 없다.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경험치를 채운다면. 돌풍을 활성화하자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차오른 물이 소용돌이치며 갈라졌다.
"꾸어억!?"
용거북이 소리침과 동시에 귀화를 일으켰다. 물속에서 불을 일으킬 순 없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뻗은 촉수가 용거북의 굵은 목을 지나 등갑의 빈 곳을 파고들었다.
'시간이 없어.'
놀란 용거북이 강인한 턱힘으로 단숨에 촉수를 끊었으나, 이미 촉수를 타고 불길이 등갑 안을 태우고 있었다. 머지않아 숨이 끊어진 놈을 먹어 치웠고.
[고대 용거북을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20 → Lv.21]
예상했던 대로 체력이 돌아왔다.
***
"……!"
물보라와 함께 어스 서펜트가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늑대는 보이지 않는다. 그에 백록은 깊게 탄식했다.
'내 잘못이다.'
늑대가 가속 스킬의 존재를 알려줬을 때, 좀 더 조심해야 했다. 이럴 가능성을 상정해야 했다. 아니, 그럴 틈조차 주지 않고 더 빨리 달렸더라면. 그럴 수 있었더라면. 부러진 다리를 절뚝이며 백록은 한탄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우행이었다. ―그러나 이성을 잃을 순 없다. 잠든 페어리 드래곤까지 생각해 냉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물러날 수밖에 없다.'
이미 실패했다. 새삼 어스 서펜트에게 덤벼봤자 먹이밖에 되지 않으리라. 땅을 기는 큰 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ㅡ 아마도 자신을 찾고 있었다. 마음을 정한 백록이 참담한 심정으로 몸을 돌릴 때, 어스 서펜트의 입에서 회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
회색 연기. 그것이 뜻하는 것. 어스 서펜트의 내부는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에 백록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살아있다?'
탈출했거나 혹은 그러지 못했거나. 저도 모르게 빌고 있었다. 긴장되는 순간, 하늘이 떠나가라 비명지르는 어스 서펜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벌렸고.
"――――――!"
몇 번이나 이어진 뱀의 헛구역질. 그리고 마침내 늑대가 어스 서펜트의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
체력이 돌아왔으니 망설일 것 없다. 직접 빠져나가는 게 힘들다면 그럴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주겠다. 돌풍과 귀화 그리고 악식까지. 무엇 하나 아끼지 않고 있는 대로 날뛰었다. 칼바람이 갈기갈기 찢어놓고, 더욱 크게 일어난 검은 불길이 살덩이를 태웠다.
'움직인다.'
그렇게 얼마나 날뛰었을까? 놈이 여태 삼킨 물이 급류를 일으켰다. 물살에 휩쓸리지 않게 천장에 달라붙었고, 분비되는 위산은 귀화가 모조리 불태웠다. 끔찍하게 타오르는 고통에 견디지 못한 듯 출렁이더니 위산이, 삼킨 물이 모조리 역류하기 시작했다. 위장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모든 것을 비우겠다는 듯 거센 움직임을 보였다.
'토한다!'
물론 나갈 생각이다. 하지만 그리 간단히 나가주진 않겠다.
'삼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뱉을 때는 그렇겐 안 된다. 찢어진 위장을 촉수 다발로 붙잡고 변화로 칼날 같은 예기를 부여하고 경화했다. 급류에 떠밀려 갈 때마다 위장 벽이 몇 갈래로 찢어졌다.
'B등급 스킬이라고 해봤자.'
바위가죽은 말 그대로 가죽, 비늘, 겉면에 적용되는 것. 몸 내부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살덩이가 타오른 매캐한 연기가 찢어진 위장 곳곳에 스며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휩쓸려 넘실거리는 혀를 다시 보았을 때, 탄력을 발해 단숨에 뛰어올랐다.
'됐다!'
"어서 타게!"
어디선가 들려온 백록의 목소리. 망설이지 않고 등에 올라탔다. 어스 서펜트가 죽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몸을 가누는 것도 힘들어하던 놈은 한참 휘청이더니 결국 각오를 다지고 추격하기 시작했다.
'같이 죽을 생각이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길동무로 삼겠다는 속셈.
"백록!"
실수를 만회하겠다는 듯, 백록은 최선을 다해 달렸다. 마력까지 폭발시키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지만… 뒤틀린 다리로는 한계가 있다.
'일단…'
슬쩍 뒤를 돌아보니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어스 서펜트가 간격을 좁힌다. 놈은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악과 독기로 점철된 최후의 불꽃을 태우고 있을 뿐. 놈의 두 콧구멍으로 연기가 새어 나왔다.
'따돌리는 건.'
힘들 것 같다. 백록도 열심히 달리고 있지만, 속도를 유지하는 건 무리였다. 하물며 충돌의 여파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바닥이 뒤집어진 상태에선 두말할 것 없다.
'아무리 도망쳐봤자.'
백록의 체력이 다하거나 혹은 그 전에 놈에게 잡히거나. 결국 놈과 맞붙는 건 피할 수 없다.
"백록."
"왜 부르는가!"
"내려줘."
기함한 백록이 소리쳤다.
"미쳤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가만히 타고 있게나!"
"안 돼. 이러다 잡혀."
그 말에 반박하려는 듯 달싹이던 백록은 탄식해 고개를 떨궜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건 간에 지금 중요한 건 놈을 죽이는 거였다.
'…오래 걸리지는 않아.'
버티기만 하면 놈의 숨통이 끊긴다. 불사르던 화염이 놈을 완전히 잠식하고 검게 물들이기까지 걸리는 시간― 놈을 상대로 견디기만 한다면.
'가능해. 반드시!'
확신한 순간, 우연히 백록과 시선이 마주했다. 한참 달리더니 서서히 속도가 떨어지고, 결국 멈춰섰다. 망설이지 않고 멀어지는 늑대를 보며 백록이 중얼거렸다.
"…죽지 말게."
***
'돌풍.'
어스 서펜트가 대지에 계곡을 새기며 다가오는 걸 보며 바람을 일으켰다.
'귀화.'
상상하는 건 모든 걸 태우는 화마. 끝없는 불길. 거센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불꽃. 환상처럼 들리는 귀곡성ㅡ 그리고 다시 한번 귀신의 상을 띈다. 거기까지 다다랐을 때, 서펜트가 코앞에 있었다. 튀어 오른 파편과 먼지를 돌풍이 모조리 걷어냈다.
'어스 서펜트.'
땅을 기는 커다란 뱀. 그 이름에 걸맞게 맹렬히 기어 대지와 비늘이 마찰하는 가운데, 놈이 또 한 번 턱을 벌렸다. 목구멍 너머에서 지독한 회색 연기가 뿜어졌다. 위압을 발했지만, 놈은 멈추지 않았다. 죽을 각오를 했으니 협박이 통할 리 없다. ―대신 내가 피하지 않을 거라 착각하게 했다면 족하다. 놈이 내게 닿기 직전, 계속 당기고 있던 탄력을 발했다.
"―――!"
잔영처럼 남은 검은 귀화만을 집어삼키고 입안이 타올라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다. 곧바로 촉수를 뻗어 점성을 부여, 놈의 등 위로 뛰어올랐다.
"시이이이익ㅡ!'
히싱. 위협적인 숨소리. 놈이 몸을 비틀어 떨어뜨리려 한 것을 가까스로 버텼다. 원래라면 귀화로도 놈을 태우는 건 무리였을 테지만, 가속으로 지면과 충돌했던 충격에.
'비늘이 떨어져 나갔어.'
머리를 보호하는 비늘이 없다. 그 틈새를 검은 불꽃이 내달리며 불태워갔다. 타오르는 고통에 몸을 비틀며 지면에 비벼 불을 끄려는 놈의 몸통을 타고 달렸다.
'떨어지면 끝이야!'
직선이 아니라 옆으로 달렸다. 정신을 못 차리고 구르는 어스 서펜트의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역시.'
한계까지 끌어올린 귀화였거늘, 대지와 마찰해 소화(消火)시켜버린다. 하지만― 내부에서 타오른 불길은 그렇게는 안 된다. 여전히 타오르며 놈의 속에서 번져가고 있을 터. 그런데도 놈은 발버둥을 멈추지 않았다.
'…머지않았어.'
악식. '가리지 않고 먹는다'― 그것은 설령 상위 등급의 스킬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집어삼킨 비늘 사이로 귀화가 또 한 번 타올랐다.
'이건…!'
가속까지 사용해서 지면과 부딪히기를 반복한다. 등에 선 내게까지 전해지는 충격. 파편이 솟아오르며 안 그래도 엉망이었던 땅에 발 디딜 틈이 사라졌다.
'미쳤군.'
놈의 비늘이 곤두섰다. 직감으로 거기까지 읽고 뛰어내렸다. 예리함을 겸비한 비늘. 잘못하면 베이고 말리라. 하지만 비늘이 곤두섰다는 건 그만큼 틈이 생겼다는 뜻. 그 사이를 불길이 내달렸다.
"샤아아아악!"
어스 서펜트의 머리가 기이하게 회전했다. 몸을 비틀어 거대한 턱을 들이민다. 513의 민첩에 가속이 더해지자 경이로운 속도와 힘으로― 자신의 거체를 씹었다.
'쉽게 당해주진 않아.'
이빨이 비늘을 관통하고, 그 사이로 검은 불꽃이 새어 나왔다. 그것만 봐도 어떤 상태인지 뻔히 아는데 여전히 살아있다.
'아룡종.'
용의 피가 섞인 괴물들은 유난히 질기다. 그 끔찍한 집념이 향하는 것이 오롯이 나 하나라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 뱀 특유의 세로로 기다란 눈이 나를 쫓는다. 거기엔 놈의 본성이 담겨있었다. ―그래. 결국 죽느냐 죽이느냐. 본질은 그거였다.
'폭군.'
놈의 차가운 동공에 담긴 건 분노였다. 숨기지도 않고 노골적으로 위협적인 숨소리와 함께 살의를 드러낸다.
"샤아아아아―"
기죽지 않고 위압을 발했다. 아주 잠깐, 귀화가 일렁이더니 오싹한 귀기를 흩뿌렸다. 일순 움츠러든 뱀은 그 사실이 못내 치욕스러운지 분노에 차 꼬리를 휘둘렀다.
'피할 수 있어.'
꼬리가 거체에 부딪히며 놈의 몸이 들썩였다. 들썩였을 뿐이랴? 바위 가죽끼리 부딪혀 깨지며 셀 수 없이 많은 파편이 비산했다.
'……!'
파편을 돌풍으로 날려버리고, 칼날 같은 비늘 사이를 주파하자 놈이 한계까지 턱을 벌렸다.
"샤아아아악ㅡ!"
아슬아슬하게 삼켜지지 않고, 촉수를 휘감아 놈의 머리 위로 올라탔다. 휘두른 꼬리. 그 압도적인 풍압에 날아가면서도 끝까지 놈의 비늘을 긁고 촉수로 붙잡았다.
"키이이이익!"
뜯어진다― 잡고 있던 촉수로 뜯긴 비늘을 끌어당겼다. 비늘을 발판삼아 다시 한번 도약. 집요함은 너만 가진 게 아니라는 듯, 늑대는 어스 서펜트를 놓아주지 않았다.
'…….'
백록은 멍하니 바라봤다. 그 사투에는 시선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다. 둘의 싸움은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연극 같았다. 늑대가 움직이는 길을 어스 서펜트가 뒤따른다. 뛰어난 예측. 그것이 둘 사이에 있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까아아아악!"
언제부턴가 죽음의 향기를 맡고 몰려온 시체 사냥꾼(Scavenger)들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제 곧.'
서서히, 끝이 다가오고 있다.
***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격한 움직임에 서서히 체력이 달리기 시작했다. 보고도 피하는 게 버거워지고 있었다.
'아직 버티고 있어.'
아룡종의 용혈(龍血). 그것이 놈의 숨을 잇고 있었다. 심장과 폐가 타오르는 고통 속에서도 놈은 멈추지 않는다.
"―――!"
높은 곳에서부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폭군의 죽음을 기다리는 듯 코아틀 무리가 하늘을 비행하고, 저 너머에서 와이번이 하강했다.
'이건…!'
―폭군은 머지않아 죽는다. 그렇다면 늑대부터. 그런 계산이 담긴 눈빛. 놈의 뒷발이 닿기 직전, 촉수를 뻗어 피막으로 형성된 날개를 찢었다. 당황한 놈이 멀어지려 한 순간, 거대한 꼬리가 휘둘러졌다.
'……!'
나는 피했지만, 와이번은 그러지 못했다. 황급히 피막을 꿰뚫은 촉수를 되돌리기 전에 나까지 얽혀 바닥으로 추락했다. 부서진 지면에 등을 부딪쳐 갈비뼈가 으스러졌다.
'망할.'
하필이면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던 게 허사가 됐다. 덕분에 이젠 뒤가 없다. 아직 살아있는 와이번의 심장을 꿰뚫어 절명시켰다. 그러자 비룡의 죽음을 반기며 코아틀 무리가 까악거렸다. 마지막 기회를 얻은 폭군이 다가온다. 이미 시선은 흐리멍덩하고 동공은 풀려있다. 죽은 거나 다름없는데도 여전히 집념만큼은 살아있다.
가속. 거기에 마력까지 폭발시키고 있다. 뒤가 없는 일격. 실패하건 성공하건 죽어가는 숨으로 지면과 충돌하면 죽는다.
'한 번. 딱 한 번만.'
발악. 발버둥일 뿐이다. 원래 받아 줄 필요도 없었지만, 와이번 때문에 상황이 꼬이고 말았다.
"도망치게!"
백록이 멀리서 뛰어온다ㅡ 그것보다 빠르게, 놈의 턱이 지면과 충돌했다. 땅을 기는 큰 뱀. 놈의 뒤를 생각하지 않는 공격에 턱이 대지를 꿰뚫고 몇 미터나 들이간다. 다행히 턱 사이로 들어가 피할 수 있었다. 지면을 타고 전해진 충격과 비산하는 파편에 아찔하다가도, 한숨을 내쉬었다.
'살았다.'
확신했다. 어스 서펜트는 지금 죽었노라고. 놈의 공격은 실패했고 허망히 스러졌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놈의 살덩이가 꿀렁거리며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설마.'
죽어서는 움직일 수 없다. 그건 당연하다. 하지만 헤집어진 위장과 진탕된 내부. 놈이 억지로 발했던 마력은 알고 그랬던 모르고 그랬던.
'설마?'
무언가가, 아니 놈의 모든 것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검은 불 너머로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
바닥에 깊게 박힌 턱. 빠져나갈 길이 없다. 악식으로 물어뜯고 귀화를 사용해도 늦는다. 놈의 핏물, 살점, 장기. 그 전부가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망할!'
이건 피할 수 없다. 답도 없는 상황에서 황망히 올려다보는 늑대의 머리 위로 온갖 오물들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간발의 차로 백록이 늑대를 잡아당겼다.
"괜찮은가?"
돌아보니 어스 서펜트의 뜯긴 비늘을 뚫고 틈새를 만들어놨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폭음. 그리고 틈새 사이로 뒤늦게 핏물이 흘러나왔을 때 가까스로 긴 숨을 뱉을 수 있었다.
"그래."
―그렇게 황무지를 지배하던 폭군은 최후를 맞이했다.
***
벌떡 일어난 소녀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아."
몇년이나 시달린,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 꿈. 믿을 수 없는 악몽. 소녀는 그 악몽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부디, 내가 다른 누군가를 죽이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