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31. 진화의 갈래
쓰러진 폭군의 위에서 시체 사냥꾼들이 날갯짓했다. 제자리에서 선회하던 코아틀 무리는 어스 서펜트의 죽음을 확신한 듯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까아아아악!"
폭군이 아니라면 겁먹을 것 없다. 심지어 정작 경계하던 검은 늑대는 쳐다도 보지 않는다. 오히려 흰 사슴이 길을 가로막자, 우두머리 코아틀이 불쾌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어딜 까부느냐고 경고하는 순간― 벌집이 되었다.
"까악?!"
이해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우두머리의 죽음. 통솔력을 잃은 무리는 혼비백산해 통일되지 못했다. 몇몇은 도망치려 날갯짓하고, 몇몇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흰 사슴과의 일전을 준비하는 사이.
"까아아아악!"
―검은 늑대가 고개를 돌렸다.
귀기 어린 빈 눈두덩이를 본 무리가 우뚝 굳었다. 뇌가 멋대로 상상해 움직일 수 없었다. 끔찍한 괴물이 아가리를 들이밀고 있는 듯한 모습을. 이미 상상 속에서 수십 번이나 죽은 자신의 모습. 두려움과 공포가 점점 커져만 갔다.
"키, 끼아아악!"
무리는 제자리에서 얼어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마침내 괴물이 고개를 돌려 폭군이었던 것을 탐닉하자 무리는 미친 듯 도망쳤다. 그들은 늑대의 모습을, 기척을 똑똑히 기억했다.
절대 싸워서는 안 될 또 다른 폭군으로.
***
[폭군 :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을 굴복시킨다]
심플한 설명인만큼 이해하기 쉬웠다. 코아틀 무리에게 제대로 먹히기도 했고.
'싸웠으면 귀찮았을 텐데.'
질 리는 없겠지만, 마력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니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위압을 사용했더니 그 효과가 상상 이상이었다. 부리나케 도망가는 코아틀 무리를 보면 통쾌함까지 느껴진다.
'이제까지 얻었던 칭호들의 상위 호환인 것 같은데.'
산의 폭군이나 던전의 공포도 물론 좋았지만, 폭군 칭호에는 장소의 제약이 없다.
'범용성이 높아.'
안그래도 효과적인 위압을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폭군이라.'
폭군이었던 어스 서펜트가 주는 경험치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했다. 살점과 내장이 다 쏟아진 그로테스크한 모습에 시각을 비활성화해야 했지만. 400t에 달하는 거구를 먹어 치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29 → Lv.30]
30레벨. 혹시나 달성 조건에 걸릴까 봐 걱정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로써 시스템도 내 성장을 바라고 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다. 만약 제한을 걸었다면 반대였겠지만.
'...그래도 모르겠어.'
시스템은 도대체 뭘까? 시스템은 여왕을 경계하는 듯했고, 여왕은 시스템을 진리의 일부가 아니라고 했었다. 여전히 모든 방면의 단서가 부족해 실마리를 잡을 수 없다. 생각해도 나오지 않는 답은 어쩔 수 없다.
'업은 좀 아쉽네.'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보스를 처치하긴 했어도 던전이 붕괴한 건 아니었으니까.
'아마 안정화되면 들어올 것 같은데.'
여태 겪었던 가장 수준 높은 던전이었고 가장 강한 보스였다. 그런 던전의 보스를 처치했으니 클리어 이후, 상당량의 업을 얻을 수 있겠지.
'그리고.'
[악식(D) Lv.9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악식(D) Lv.9 → 악식(D) Lv.10]
[악식(D) Lv.10이 최대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악식(D) Lv.10 → 탈식(C) Lv.1]
악식이 마침내 C등급에 도달했다.
탈식(奪喰). 내심 스킬을 빼앗는 걸 기대했지만, 그런 사기적인 스킬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스킬이 C등급일 리도 없고.
'그래도 쓸만해.'
[탈식 : 대상을 먹어 치움으로써 체력과 마력을 한시적으로 빼앗는다]
에너지 드레인. 심플하지만 마음에 드는 능력이었다.
'좀 더 빨리 얻었다면 좋았을 텐데.'
구체적으론 용거북을 먹었을 때. 그때 탈식을 얻었더라면 훨씬 편했을 것 같다.
"대단하군. 정말 다 먹어 치울 줄이야. 질리지도 않는가?"
"별로?"
질린 눈으로 묻는 백록. 아마 식탐 때문이겠지만, 맛과는 별개로 질린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없어서 못 먹지.
'일단 경험치는 다 채웠어.'
진화를 위한 조건인 30레벨은 달성했다. 이젠 경험치도 오르지 않는다.
'만약 진화가 예상했던 대로 갈래라면 조심할 필요가 있어.'
되돌아가지 못할테니 신중해야 한다. ㅡ어차피 시스템이 제시한 거니 어련히 알아서 했겠느냐는 어설픈 방심은 금물이다. 나는 정작 그 시스템을 믿지 못하고 있으니까.
'…….'
정말 시스템이 악의를 품고 있다면. 만약 잘못된 길을 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된다면.
'…용의 황무지는 잠깐 킵해두고 싶어.'
이만한 단백, 아니 경험치를 주는 던전은 찾기 어렵다. 경험치가 한계에 달하긴 했지만, 진화한 이후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 같은 점을 백록에게 말했더니 그는 그러라며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도와줘서 고맙네."
사실 헛소리 하지 말라고 일축할까 봐 걱정했는데 시원스럽게 승낙해서 놀랐다.
"안정화라고 해봤자 문제는 땅을 기는 큰 뱀이었네. 내 우행을 자네의 기지와 실력으로 덮어 주었는데.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
적나라한 칭찬이 좀 부담스러웠다. 백록은 이어 말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나가기 전에 세 번째 겨울의 아이를 만나주게."
"세 번째 겨울의 아이?"
"그래. 쓸쓸해하더군."
이래저래 바빠서 잊고 있었는데 가지 말라고 울고불던 정 많은 요정이 떠올랐다.
'아.'
몇 밤 지나면 돌아오냐고 묻던 말에 대충 대답했던 게 떠올랐다.
"요정 중에서도 순수한 아이네. 정이 많아서 그런거니 이해하게나."
"…그래."
요정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달래줄 생각을 하니 조금 막막했다. 한참 시달릴 텐데.
"이 던전은."
"방치해두겠네."
나는 작게 끄덕였다. 백록과 함께 대전까지 걸었다. 축지를 사용한다면 금방이겠지만 백록의 다리가 낫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 대전으로 가는 길에 던전을 방치하면 몬스터들이 나오지 않겠냐고 노파심에 물었더니, 조만간 다른 환수들이 갈 거라 한다.
'알아서 하겠지.'
백록이 호언장담하는데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다.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그러는 중, 두개골 속 페어리 드래곤이 꿈틀거렸다. 일어나는가 싶었는데 다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더 걸리나보네.'
마력 재생으로 커버되지 않을 만큼 깊은 잠에 빠졌단 것이 조금 걱정이었다.
'…일단 진화부터.'
걱정을 억누르고, 당장 내가 할 일부터. 30레벨에 도달하면서 환영의 길과 부정의 길이 모두 열렸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 진화할 수 있다. 혹시나 해 떠볼겸 시스템의 조언을 구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갈수록 말도 없어지는 것 같고.'
이전, 슬라임이던 시절에는 확실한 자아가 있었다. 농담도 주고받았을 정도였는데 이젠 중요한 국면에서만 존재감을 드러내게 됐다.
"백록! 늑대야!"
생각하던 중에 대전까지 도착한 모양. 기다렸다는 듯 요정이 다가와 뺨을 비볐다. 거칠거칠한 두개골에 문지르는 게 그리 좋지는 않을 텐데 마냥 웃고 있다.
"왜 이리 늦어! 기다렸어! 기다렸다구~!"
만나자마자 요란스럽게 칭얼대는 요정을 한참 달래줬다. 배시시 웃는 요정이 뒤늦게 페어리 드래곤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했다.
"페리는 왜 이렇게 된 거야~?! 응? 백록~!"
페리. 딱 봐도 페어리에서 글자만 따왔구나 싶어 픽 웃었다.
'그러고 보니.'
새삼 녀석에게 이름을 지어준 적도 물어본 적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번엔 녀석이 없었다면 낭패를 금치 못했을 거다. 백록이나 나나 지금쯤 어스 서펜트의 한 끼 밥이 됐을 터. 용의 황무지를 겪으며, 녀석을 환계에 두고 왔을 때와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이름이라…'
상념에 빠진 내 코를 요정이 토닥였다.
"우 씨! 내 말 안 듣고 있지~?!"
불만이라는 듯 허리에 손을 짚고 잔뜩 볼을 부풀리는 모습. 뭐라고 말했었나? 슬쩍 눈을 돌리자 백록이 하늘 대신 자리한 에메랄드 바다를 고갯짓했다.
"…그래. 여왕님."
"역시 늑대야! 듣고 있었구나!"
아마도 그녀가 날 부르는 모양. 반색하던 요정이 역시 늑대라며 날개를 파닥였다.
"그럼 여왕님은 언제 뵈러 갈 거야~? 혹시 바로 떠날 건 아니지? 응?"
정신 사납게 파닥거리는 녀석에게 대충 주억이며 생각했다.
여왕의 부름은 내게도 바라마지 않는 것이었다. 시스템과 여왕. 풀리지 않은 의문들에 대해 답을 줄 수 있는 건 그들뿐. 그러나 시스템이 입을 열지 않는다면 여왕에게 묻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앞으로도 환계에 들를 일이 잦을 것 같다는 이유도 있었고.
잠깐의 회포를 풀고 나서 저번처럼 불꽃 나비를 타고 올랐다. 그렇게 에메랄드 바다, 나무, 궁전의 문 앞까지 도착해서.
'들어가자.'
심호흡을 하고, 궁전의 문을 열었다. 왕관을 쓴 요정이 화들짝 놀라더니, 양팔을 들고 달려들었다.
"와~! 늑대! 늑대! 괴물 늑대! 약속 지켜줬구나! 놀아주러 온 거야?!"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다음에 찾아와달라고 했었는데 까먹고 있었다.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스컬 울프라 망정이지. 잠깐 칭얼거림을 받아주고 녀석이 내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자, 세상이 변했다.
***
후들거리는 팔로 은하가 울상지었다.
"아, 아직 멀었어요?"
"1분 더."
복부가 당기고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을 더 견딜 자신이 없는 은하가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말을 걸었다.
"1, 1분이나요?"
"꼬우면 미리미리 체력 좀 기르지 그랬어?"
특별한 훈련 같은 게 아니다. 그냥 운동. 체력단련. 설령 마법사라도 최소한은 몸을 단련할 필요가 있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흥.'
사실, 처음 홍유리는 은하가 며칠 견디지 못할 거라 여겼다. 슬라임이니 나발이니 헛소리를 하는 꼬라지를 듣고 짜증 난 것도 있었고. 반드시 재능과 성실함이 비례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2팀의 뺀질이도 그랬고. 물론 못 견디겠다고 때려치운다고 안 시킬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는…'
플랭크 3분 10세트. 처음엔 1분도 견디지 못하던 저질 체력이 요 며칠 부쩍 늘었다. 그래봤자 아직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수준에 불과했지만.
"1, 1분 안 됐어요?!"
"?"
문득 타이머가 진작에 끝났음을 발견한 홍유리가 태연하게 답했다.
"20초."
"거, 거짓말."
암담한 표정으로 자세를 유지하다 결국 20초가 지나자마자 엎어지고 만다. 하얗게 떨리는 입술이 그 심정을 짐작게 한다. 홍유리는 속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생각보다 오래 했네.'
"야. 누가 엎으래? 첨부터 다시 해? 어쭈. 미쳤지? 이 굼벵이 같은 년이! 정신 안 차려?"
물론 입으로 튀어나온 말은 정반대였다. 갈굼과 지옥훈련 끝에 찾아온 건 근육경련. 명백한 오버워크였으나 그걸로 됐다. 은하의 마력이라면 알아서 회복을 도울 터. 자고 일어나면 쌩쌩하게 돌아오겠지.
"오늘 여기까지. 그리고 아까 커피 샀던 네 카드 가져가."
"네?! 그거 제 돈이었어요?"
"그럼 하루 종일 훈련 봐주는데 뭐 하나 마시는 게 아깝냐? 응?"
"그, 그게 아니라. 저 감봉 끝나려면 멀었는데…"
그러고 보니 6개월 감봉이랬나? 우물쭈물하는 은하를 향해 홍유리가 코웃음쳤다.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이리 와."
"또, 또요?"
기어코 딱밤을 때린 홍유리가 만족스럽다는 듯 끄덕였다. 반대로 은하는 이마를 감싸고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몇 달 더 굴리면 써먹을 수 있겠네.'
아무리 몸치라도 체력만 좀 붙으면 구상하던 그림이 나오리라. 앞으로의 향방을 생각하던 중 다급히 문이 열리자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문을 이따위로 열어?"
"네가 할 소리야?"
"뭐야? 너."
급히 들어온 구진하의 모습에 홍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홍유리. 전화는 또 왜 안 받아?"
"몰랐어."
무음 설정이라 몰랐는데 인제 보니 부재중이 와 있었다. 태연하게 답한 홍유리와 달리 구진하는 급한 듯 말했다.
"…일단 자리 좀 옮기자. 은하는 수고했고."
"아, 제가 나갈게요!"
비틀거리면서도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워주자 홍유리는 다시 한번 눈살을 찌푸렸다.
"뭔데 이리 호들갑이야?"
"아넬라. 연락이 왔어."
"아넬라?"
"그래. 아넬라."
홍유리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이미 구진하와 아넬라의 거래 내용― 대전의 밤에 대해 들어 모두 알고 있었으니.
"생각보다 빨랐네. 벌써 고원 놈들 뒤를 캤다 이거지?"
***
또 그 광활한 우주였다. 별 하나 없이 쓸쓸한 공간. 어둠으로 가득 찬 그곳에 멍하니 서 있으니 예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구나. 아가. 기다리고 있었단다】
―여전한 모습. 별을 빚어낸 듯, 막연한 신의 모습에 가까운 여왕. 여전히 아가라고 부르는 말에는 적응되지 않았지만. 내가 그녀를 살핀 것처럼 마찬가지로 나를 살핀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많이 듬직해졌구나. 내 질문에 대한 생각은 해봤니?】
시스템은 진리의 일부가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라. 그녀는 일전의 만남에서 그런 질문을 던졌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 안에서 답은 나오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이제 답을 들려주겠니?】
질문을 빙자한 화두. 물음에 반드시 답해야 한다는 원칙 아래,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돌리지 않고 그대로 말해주자 여왕은 담담히 끄덕였다.
【그렇구나】
답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걸로 끝이라는 듯. 여왕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아니, 답하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를 하나의 답으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어쩐지 조금 아쉬워 보였지만.
"…그래서 절 부른 이유는 그것 때문입니까?"
여왕이 호출한 이유가 단순히 답을 듣고 싶어서였을까?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작은 도움을 주기 위해서란다. 네가 고민하고 있는 길. 그 갈래를 보여줄 수 있으니】
길. 갈래. 의심할 여지 없이 진화의 선택을 돕겠다는 말이었다. 바라마지않던 일. 하지만 어떻게 보여주겠다는 말일까? 순간, 여왕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빛무리가 일렁이더니, 서서히 형상이 드러났다.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녹색 늑대였다.
"이건…"
【네가 나아갈 길 중 하나란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부정의 길임을 알았다.
집채만 한 크기의 초록빛을 띄는 늑대가 걸을 때마다 몸이 흘러내려 뚝뚝 떨어지더니 그것이 바닥에 닿아 대지를 끝없이 녹였다.
'…….'
만약 내가 저 앞에 서 있었다면 어땠을까? 또 다른 환영이 스멀거리더니, 어느새 오크가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다. 오크도 절대 작지 않은데, 녹색 늑대 앞에선 초라하게만 보였다. 가까스로 용기 낸 오크는.
"구오오오오오오오!"
포효하며, 무기를 휘둘렀다. 오크가 휘두른 무기에 맞은 늑대가 크게 출렁였고, 사방으로 액체가 튀었다. 그러더니 그것에 닿은 모든 것들이 타들어 녹아내린다. 끔찍한 산(散). 한참을 태우더니 그것에 닿았던 오크가 서서히 썩어들어갔다. 끔찍한 독(毒). 괴로워하던 오크는 그렇게 숨을 거뒀다.
"……."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오크 수십 마리가 나타났다. 달려드는 무리를 향해 녹색 늑대가 크게 포효하더니, 전신에서 수십 개나 되는 눈이 뜨였다.
'―전부 마안이야.'
아라네아가 가지고 있던 마안처럼. 경직되고 마비되고, 중독되고 녹아버린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지 세기도 힘든 마안. 당연 이후로는 늑대의 일방적인 유린이었다. 오크도 약한 몬스터는 아니건만, 녹색 늑대에겐 전혀 상대도 되지 않았다. 결국 모든 오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늑대는 하늘을 향해 높게 울부짖었다.
【더럽히는 것. 모독자(Defiler)라고 한단다】
부정(不定)이면서 부정(不淨). 모독자라는 이름이 뇌리에 아로새겨졌다. 마침내 모독자의 모습이 천천히 사라지고, 이번엔 나타난 건 또 다른 늑대였다.
"이건…?"
보이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형체는 있지만 형상이 보이지 않았다. 스멀거리는 그림자를 둘러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 이번에 적으로 나타난 것은 수십 마리나 되는 랩터들이었다. 러닝 랩터들이 늑대를 향해 도약한 순간, 늑대가 사라졌다.
'어디로?'
사라진 늑대. 점프했던 랩터들이 다시 착지한 순간,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 속에서 튀어나온 늑대가 랩터를 물어뜯었다. 화들짝 놀란 랩터들이 다시 늑대를 향해 달려들었을 때, 검은 안개, 아니 그림자가 서서히 퍼져나갔다. 이윽고 안개는 여러 갈래로 변해 기이하게 넘실거리며 랩터들의 급소를 정확히 관통했다. 그러더니 늑대는 쓰러진 랩터들의 그림자와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마치, 그림자가 늑대를 섬기는 것처럼.
【그림자를 지배하는 늑대. 음영랑(蔭影狼)이라 한단다】
여왕이 보여준 진화의 두 갈래.
모독자. 그리고 음영랑. 상상 이상이었다. 막연히 상상하던 '슬라임 늑대' 와 '그림자 늑대'가 아니었다. 특히, 모독자의 마안과 그림자를 지배하던 음영랑의 모습이 뇌리에 강렬히 남았다.
【아가. 네 선택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감사합니다."
작은 도움 정도가 아니었다. 덕분에 진화의 갈래에 대한 마음을 정할 수 있었으니. 여왕은 속마음을 꿰뚫어본 듯, 웃으며 배웅했다. ―환계로 돌아가는 와중, 그녀가 속삭였다.
【기억하거라】
【멸망과 종말은 다른 것이란다】
***
진화보다도― 여왕의 마지막 말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여왕은 알려줬었다. 아둔한 내가 깨닫지 못했을 뿐. 이미 넌지시 말해주지 않았던가.
【그래. 알고 있단다. 머지않아 이곳에도 멸망, 아니 종말이 찾아올 것임을】
그 말은 힌트였다. 왜 별생각 없이 지나치고 말았을까. 아무 단서도 없던 게 아니다. 단서를 내가 흘리고 말았던 거다. 문득 떠오르는 어떤 말에 아득해지고 말았다. 종말.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나는 죽었고, 세계는 종말을 맞이했다. (完)]
'―이 망할 세계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암담했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