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33. 마녀의 재앙 (2)
"소율아! 백소율!"
"…가면 안 돼."
"무슨 헛소리야! 빨리 와! 시간 없어!"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안 된다. 이리로 가면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위험하다고, 말려야 한다고. 그렇게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꿈과 현실을 혼동하며,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백소율!"
입술을 짓씹었다. 불안이 커지고 초조해졌다. 모든 게 꿈 같았다. 거대한 살덩이가, 무너지는 아카데미가, 도망치는 우리가.
악몽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꿈꾸는 양치기 소녀의 말을 믿어줄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다.
***
"Norii întunecați se adună."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어간다― 으스스 덮어지는 구름이 심해지고 있었다. 입 없는 가면을 쓴 남자의 말에 따라 요동치는 마력이 주문으로, 마법으로써 나타나 기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광휘!"
구진하의 큰 외침과 함께, 광휘의 화살이 창문을 꿰뚫고 날아갔다. 빛줄기처럼 뻗어가는 화살ㅡ 현존하는 최고의 궁수, 광휘의 화살이 침묵하는 입의 마력을 찢어발겼다.
"Tunet de Judecată―!"
그리고 침묵하는 입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파괴된 마력으로 마법을 완성했다. 뇌전의 줄기가 서서히 모이더니, 거대한 벼락이 떨어졌다.
"…어떻게?"
광휘의 화살은 침묵하는 입의 마력을 흩뜨렸다. 컵에 든 물을 쏟았으니, 마실 수 없는 것처럼. 당연히 마법은 발현되지 않아야 했다.
"―Stâlp de foc."
홍유리의 영창과 함께 커다란 불기둥이 치솟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과 바닥에서 솟아나는 불기둥이 만나 커다란 빛을 퍼뜨리더니, 함께 소멸했다.
"뭘 놀라? 못 썼어. 보류해둔 거였다고! 이 등신아!"
답답하다는 듯 홍유리가 소리쳤다. 주문 보류ㅡ 영창하던 마법은 흐트러졌으나 보류했던 같은 마법을 사용한 것뿐.
"미안하다. 흥분했어."
"됐으니까 업고 달려."
구진하의 등에 홍유리가 올라탔다. 영창을 계속하는 그녀를 업고 순식간에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광휘!"
저 멀리서, 광휘가 화살의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슬쩍 눈만 돌아봐 시선이 마주치자, 구진하가 말했다.
"침묵하는 입은 맡기겠습니다. 저흰 살덩이부터 처리할 테니."
구진하는 슬쩍 홍유리를 돌아봤다. 어느새 2절을 넘어 3절에 도달하고 있다. 그 전에 그녀가 마법을 사용하기 좋게끔 상황을 조성해야 한다.
'넷.'
이 좁은 시가지에 4마리. 홍유리를 업은 채로도 구진하는 순식간에 살덩이 네 마리를 섬전처럼 지나쳤다. 어느새 뽑힌 세검에 살덩이들이 한 차례 출렁이며 꾸물거렸다.
'이걸로.'
순식간에 틈을 파고든 구진하는 검집에 마력을 실어 투척했다. 마력이 담긴 검집이 허공을 휘젓고― 어디에선가 꾸물거려 다가온 살덩이에 가로막혔다.
'타이밍이.'
하필이면. 적절한 타이밍이었는데 검집만 버리고 말았다. 살덩이들의 시선을 끈 구진하는 천천히 그것들을 유인해갔다.
'이쯤이면.'
나머지까지 일망타진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지만, 일단 네 마리. 마침 홍유리의 마법이 구현되었다.
"Dispare în flacăra groasă!"
단번에 일소시킨 살덩이들. 과연이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 위력이었다. 그녀의 손으로부터 뻗어 나간 거대한 화염이 살덩이를 넘어 침묵하는 입에게 닿기 직전, 또 한 번 살덩이가 가로막았다.
'우연인가?'
벌써 두 번째. 그리고 그쯤, 타오른 살덩이들이 꾸물거리며 쓰러질 때, 섬에 흩어진 살덩이들이 점차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몇몇 살덩이는 놈의 주변에서 떠나지 않는다. 마치 지키는 것처럼.
"……."
아니, 우연이 아니었다. 여전히 살덩이는 놈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몇 겹이나 둘러싼 방패가 되어 광휘의 화살을 틀어막는다. 어느새 그의 화살통에 남은 화살이 셋― 쓰러진 살덩이의 숫자가 열을 넘었지만, 아직도 끝이 아니다. 덕적도 전체에 있는 살덩이가 몰려오는 듯하다. 그에 구진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마녀는?"
"공원으로 인솔 중입니다. 머지않아 4조와 합류할 겁니다."
누군가의 보고에 끄덕인 남자는 뻐근한 몸을 풀듯이 어깨를 빙빙 돌렸다.
"미완성품은?"
"다섯. 각기 성동구, 도봉구에 사용할 예정입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번 일은 그로서도 의문이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일을 벌여야 하나 싶을 정도로. 하지만 '꺾인 손가락'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데 고작 꼬리에 불과한 자신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을 판단하는 건 윗사람이었지,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과연 명불허전이기는 하군."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살벌한 마력. 두말할 것 없이 아카데미의 교사일 터. 하나하나가 최상위 클랜의 헌터들이라더니, 훌륭하게 살덩이들을 밀어붙이고 있다. 건물은 제법 무너졌지만 앞으로 30분도 지나지 않아 사태가 정리될 것 같다.
"움직이자. 기왕 벌인 일이다. 하나라도 더 처리하는 게 수지에 맞아."
말은 냉정해도 남자의 입꼬리는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 모르는 헌터들의 싹. 그중 대부분은 C클래스 언저리로 생을 마감하겠지만, 매년 두각을 드러내는 천재들은 있는 법이다.
그런 놈들을 짓밟을 수 있다… 생각만 해도 희열이 느껴진다. 훗날엔 쳐다보지도 못할 헌터의 미래를 끊는다는 사실에 설렘마저 느껴졌다.
"일단 오는 길부터…?"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선지, 아까부터 가슴의 고동이 요란했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한동안 자제하고 있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지. 자조한 남자가 심호흡하며 감정을 다스렸다. 지금 흥분했다간 죽도 밥도 아니게 되니까. 다시 평정을 되찾고 눈을 떴을 때,
"……?"
그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아무도 살아있지 않았다. 코를 찌르는 피 냄새.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들렸다.
'대체 언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남자는 움직이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숨이 거칠어지는 가운데,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요동치는 고동 소리는 설렘과 희열 때문이 아니라.
"……!"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아래를 내려다본 남자는ㅡ 자신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걸 보았다.
***
'잡았다.'
그림자가 놈의 발목을 붙잡고, 발바닥으로부터 꿰뚫은 촉수가 꿰뚫어 올라간다. 곧 귀화가 크게 일어나 놈의 발끝에서부터 번져가기 시작한 순간― 놈이 자신의 허벅지 아래를 절단했다.
"큭!"
분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은 놈이 재빠르게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Flacără!"
간단한 영창과 함께 불꽃이 일어났다. 일어난 불길이 피가 솟구치는 놈의 상처를 억지로 지졌다. 그런데도 정신을 놓지 않고 두 바퀴 구르며 멀리 떨어진 놈이 거친 숨을 뱉었다.
"씨발…"
이미 통찰로 확인했다. 나머지 놈들은 그냥 말단이지만, 이놈은 분명 꼬리다. 무엇보다 놈들 스스로가 뱉었던 말이 그 증거였다. 집념에 찬 눈으로 놈은 그림자에 숨은 나를 노려보았다.
"누구냐! 누구냐고!"
도망치려던 놈은 자신의 다리를 방금 직접 절단했음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한쪽만 남은 다리로 도망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
주문을 외기 시작하는 놈. 가만히 영창하게 둘 리 없다. 이미 영량이 그림자의 사이를 잇고 있다. 그 속을 타고 들어가, 놈의 배후로 파고들었다. 그때, 예상했다는 듯 놈이 자신의 그림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
이미 그림자를 사용하는 능력을 보여주긴 했다. 그래도 이렇게 판단이 빠르다고? 새삼 꼬리라는 놈들이 보통이 아닌 걸 실감했다.
"Fereastra de flacără!"
회심의 미소를 지은 놈이 기어이 자신의 그림자를 향해 마법을 발했다. 불꽃의 창이 모든 걸 태울 기세로 다가온다. 놈의 예상대로 그림자에 숨어있었던 나는― 귀화를 일으켰다. 검은 불꽃이 날아온 불꽃의 창을 순식간에 집어삼키고, 오히려 번져나갔다.
"……!"
믿을 수 없다는 듯, 넋 나간 얼굴의 놈. 머지않아 귀화가 그 자리에 남은 모든 것을 한 줌도 남기지 않고 불살랐다.
***
'공원이라고 했지.'
틀림없다. 아카데미는 오륜동 전체를 부지로 삼고 있다. 그리고 공원이라고 한다면.
'올림픽 공원.'
마녀. 두말할 것 없이 백소율이다.
놈들은 분명 마녀를 인솔해 4조와 합류한다고 했다. 이들이 몇조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런 조가 3개는 더 있다는 뜻. 위치를 알아채고― 망설임 없이 달렸다. 30초도 되지 않아 공원까지 주파했을 때 두 사람이 탕아들과 싸우고 있었다. 젊은 헌터와 늙은 헌터. 지평선 너머로 어슴푸레 밝아오는 해를 상징하는 마크. 보아하니 여명이었다.
"설마 우리 여기서 뒈집니까?"
"헛소리 말고 칼질이나 해라!"
각기 창검을 휘두르며 맞서 싸운다. 실력은 괜찮았으나, 수적으로 열세였다.
이미 그들 뒤로 쓰러진 학생이 엉망으로 엉켜있었다. 아마 저들이 오기 전부터 탕아들이 학생들을 참살하고 있었던 모양. 뒤늦게 막아선 모양이지만… 이미 절반 이상이 숨을 쉬지 않는다.
제아무리 아카데미 학생이라고 해도 탕아들을 이길 순 없다.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인데…
'…….'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흥분해선 안 된다. 흥분해선, 백소율을 찾을 수 없다. 길게 숨을 뱉어 억지로 머리를 식히고 먼저 할 일을 정리했다.
'일단 저 쓰레기들부터.'
―마력과 함께 영량이 서서히 그림자를 퍼뜨려갔다.
***
"거기까지다."
"……."
"백소율! 너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멋대로 그렇게 이탈하면 어떡해? 얼른 돌아가자. 다른 애들도…"
"거짓말. 당신이잖아요."
"무슨 소리야? 지금 급한 거 안 보여? 빨리!"
"정말 급하다고 생각했으면 당신이 날 쫓아올 리가 없어요."
선생은 한참이나 백소율의 눈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모로 꺾었다.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
다정함을 가장한 선생의 목소리는 자신의 말이 맞는다고 시인하고 있었다. 그에 잘근잘근 입술을 씹은 백소율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5m는 넘는 담. 마력을 사용하면 넘을 수는 있겠지만, 이 남자가 가만있을 리 없다.
"하하. 우리 소율이가 그렇게 잘 뛸 줄은 상상도 못 했네."
"……."
"왜 말이 없니?"
대답 없는 백소율에게 선생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죽이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진 말고. 넌 쓸데가 있거든."
백소율의 두 주먹이 울분을 담고 부르르 떨렸다. 또 꿈에서처럼― 그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여기까지 온 건 정답이었어.'
만약 그대로 함께 도망쳤다면. 이 남자가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여기서 나 혼자만.
"더는 말 않으마. 소율아. 이리로 와라."
"……."
"빨리 안 오면 죽는 사람만 늘어날 뿐이야. 넌 잘 알고 있잖아? 왜. 꿈에서 봤다며?"
"쫓아올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알면 뭐가 달라지니?"
비웃음을 띄고 점점 가까워져 왔다. 지척까지 다가온 순간, 백소율은 크게 외쳤다.
"Suliță de gheață!"
노리고 있던 일격. 이 좁은 거리에서 피할 순 없다. 백소율의 예상대로 들어맞았고, 구현된 얼음송곳은 훌륭히 적중했다. ㅡ그의 주먹에 으스러지면서.
"주문 보류… 아직 졸업도 못 했는데 벌써?"
"……."
B클래스. 그게 이렇게나 암담한 거였나. 그 손에서 얼음 알갱이가 떨어져 내렸다. 회심의 일격이 소용없게 되자 백소율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웠다. 준비했던 건 여기까지. 애초부터 자신을 미끼 삼을 생각으로 도망친 거였으니까. 쫓아왔을 때부터 이리되리라 짐작했다.
"…이렇게 도망쳐봤자 나 말고도 걔넬 죽일 사람은 많아."
"……."
"왜, 너 하나만 도망치면 나머지는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
순진하긴. 기회가 왔는데 싹을 뽑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선생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주먹이 다가오자 백소율이 질끈 눈을 감은 순간―
"―Distort!"
공간이 왜곡됐다. 의지를 갖추고 휘감은 마력이 그를 멈춰 세운다. 그리고 머지않아 위태로운 마력이 무식한 힘에 끊어지기 전, 그녀가 소리 질렀다.
"빨리 가!"
한 손으로 손목을 감싸고 있는 것이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처럼 불안정했다. 막다른 길에서, 백소율은 발끝에 마력을 모아 높은 담을 훌쩍 뛰어올랐다. 고작 5초. 이를 악물고 견디던 은하는 결국 왜곡이 끊어졌음에 한탄했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아니, 그 덕분에 도망갈 시간이라도 벌 수 있었던 거지. 홍유리와의 수련은 허사가 아니었다. 마침내 마력이 끊어지자 그가 열 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명?"
"……."
"왜 끼어드는 겁니까? 저 아이가 이 사태를 초래했습니다! 지금 놓치면 저 살덩이들이 더 불어날 겁니다!"
"……."
"제기랄! 지금이라도 쫓아야합니다! 저 아이, 저 애라고요!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감정을 호소하는 목소리에 은하는 어이없이 실소했다.
"저기요. 다 들었거든요?"
그 말에 선생의 표정이 사라졌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처리하는 수밖에."
순식간에 쇄도하는 주먹에 은하는 직감적으로 숙이며 굴렀다.
'……!'
무지막지한 속도. 도무지 몸이 따라가질 않는다. 그나마 피한 건 마력 감지 덕분에. 두 번째는 절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은하는 미리 준비했던 대로 빛무리에 휩싸였다.
"…단거리 이동 주문서?"
인제 보니 떨어진 종잇조각이 흩뿌려져 있다. 처음부터 찢었던 모양. 애초에 싸울 생각 없이 도망칠 심산이었다.
"쯧. 하필이면."
그는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여명의 헌터에게 정체를 들킨 것은 뼈아프다. 하지만―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백소율을 놓칠 순 없다. 냉정한 판단을 내린 그는 백소율의 뒤를 쫓아 담을 넘었다.
***
젊은 헌터의 창이 다가오는 탕아의 어깨를 꿰뚫었다. 이대로 끝을 내려던 젊은 헌터는 다급히 창을 들어 올렸다. 양손으로 내리찍은 칼에 손목이 시큰거렸다. 당장에라도 창을 놓칠 것 같았다.
놈들 개인은 강하지 않다. 문제는 놈들의 머릿수가 이쪽보다 세 배는 많다는 점. 뭐 하나라도 시도해 보려 하면 귀신같이 다가와 방해한다. 도무지 타개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젊은 헌터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차라리 튀면?'
도망칠 수는 있을 터. 슬쩍 늙은 헌터를 보았지만, 그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미치겠네. 진짜.'
혼자 도망칠 수도 없고. 덕분에 무덤을 파게 생겼다. 한숨 쉰 젊은 헌터는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반대로 놈들은 차륜전처럼 정교하게 침착하게 몰아붙여 온다. 이대로 간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
'될 대로 되라지!'
답답한 심정에 젊은 헌터는 끌어올린 마력을 담아 창을 던졌다. 놈이 당황하며 물러섰고, 그사이 다른 탕아가 휘두른 검을 한 발 나서며 들이받았다. 숄더 차지. 놈의 검이 견갑을 반쯤 파고들었으나, 노림수였다. 덕분에 이 짧은 순간 놈의 무기는 무력화됐다. 하지만― 두 명까지는 그랬으나 나머지 하나는 방법이 없다.
'하나는 맞는다!'
옆에서 날아오는 칼침을 맞을 각오로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하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왜?'
아저씨가 도와준 건가? 모르겠지만 기회였다. 넘어뜨린 놈을 마운트해 그대로 마력을 담은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아스팔트 바닥과 주먹 사이에 처참히 맞물려 수박 깨지듯 터져나갔다.
'일단 하나.'
소매로 입을 훔친 젊은 헌터가 등을 돌렸을 때, 어째선지 늙은 헌터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저씨. 왜 멍하니…?"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가자― 젊은 헌터 또한 그것을 보았다.
"…어떻게?"
바닥에 비친 그림자가 아니라, 눈앞에서 일렁이는 그림자.
"……."
그림자는 늑대의 형상을 그리고 있었다. 두 헌터가 딱딱하게 굳은 사이, 그것으로부터 언어가 흘러나왔다.
"ㅡ남은 탕아들은?"
늑대의 형상. 그림자를 두른 늑대의 말에 숨이 멎었다. 명백한 말소리. 어떻게? 얼어붙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알만 데구르르 굴려 본 늙은 헌터가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 떨리는 손으로 검을 쥐고 있었다.
"……."
그림자 속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한 순간, 숨이 멎었다. 질식할 것 같은 압박 속에서 머리가 새하얗게 변할 때, 침묵을 대답으로 들은 듯 그것이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렇게 놈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둘은 너 나할 것 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후, 후우. 후우."
거친 숨을 내뱉으며 호흡을 안정시키지 못하는 모습. 침착함을 가장하던 것은 모두 허세.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다리가 풀리고 말았다. 한심하게도 당분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저거, 저거 대체 뭡니까?!"
젊은 헌터의 당황과 두려움 섞인 물음에 늙은 헌터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엔 처참히 죽어버린 탕아의 시체들만이 있을 뿐. 늙은 헌터는 똑똑히 보았다. 놈에게서 뻗어 나온 그림자와 무수한 촉수를. 애먹었던 상대를 꿰뚫고, 찢어발기는 모습을. 늙은 헌터가 장담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싸웠으면 확실하게 죽었을 거란 사실 뿐이었다.
두 헌터는 어둠 너머로 사라진 늑대를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