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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75화 (75/407)

〈 75화 〉 #37 뒤처리

서해안의 섬들은 모조리 정리했다. Code 3. 덕분에 정리하는 게 한결 편했다. 크게 일어난 검은 불길이 놈들의 마지막 시설― Area E를 불태우는 걸 보며 늑대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

"……."

요즘 따라, 저도 모르게 감정이 들끓는 것 같아서. 사각지대와 아카데미에선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분노할, 울분을 토할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달랐어.'

직접 본 것도 아니고, 흔적만을 보고 울분이 들끓었다. 나도 모르는 새 끓는 점이 현저히 낮아졌다는 증거였다. 마치 불합리를 보고 분노하는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마치 이렇게 되기를 바란 것처럼. 마치 내가 그렇게 되게끔 유도한 것 같아서. 그리고 그건 분명…

'시스템.'

그 말에 반응하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멸망확률 95.06 → 93.39%]

[1.67%만큼의 업을 획득했습니다]

[업(業) 5.51%]

업. 어느샌가 5%를 훌쩍 돌파했다. 시스템의 정체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아가일의 환상에 빠졌을 때와 진화했을 때 업을 두르며 '그들'의 존재는 확실히 느꼈었다.

시스템은 누구 하나로 지칭할 수 있는 개체가 아니라는 것 또한.

'그리고 업이라는 건.'

바로 '그들'로부터 비롯됐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분명 언젠가는 이에 대한 의문도 풀리리라. 호흡을 가다듬고, 아직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아직 남은 사람들이 있어.'

그들을 다시 본토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

스산한 기운에 은자림은 눈을 떴다. 창선의 제자로서 진전을 물려받은 그녀에게 이 기운은 너무나 생생히 느껴졌다.

"몬스터…!"

갈아입기까지 1분. 새벽녘에 창을 쥔 은자림이 느낀 기운이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ㅡ놓칠 생각은 없다. 단번에 거리를 좁히자 우뚝 멈춰 선 기운.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늑대 형상의 그림자와 마주했다.

'B클래스?'

혹은 그 이상. 언뜻 느껴지는 마력은 그 수준이지만, 왠지 모를 불길함이 느껴진다. 싸워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도대체 뭐지?'

검은 늑대라면 워그가 있겠으나 저런 늑대 몬스터는 여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침음을 흘리던 은자림이 주변을 살폈다.

'사람은 없어.'

놈이 멈춰선 곳은 공원. 주변에 휘말릴 사람은 없다. 가능한 한 빨리 제압하면 된다고 생각한 은자림이 창을 겨눴다. 정순하고 웅혼한 마력이 창에 담기기 직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한 페어리 드래곤의 존재 때문에. 그 때보다 성장했지만, 착각할 리 없다.

"은공…!"

곧 은자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은공과 함께 있는 늑대. 그렇다면 십중팔구 이 늑대는…!

***

'아직도 은공이라니.'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원래는 이렇게 실없는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하지만 은자림을 찾아온 건 정답이었다.

'어디에 놈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아직 충분한 힘을 기르지 못했다. 가능하면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주의할 필요가 있다. 내가 모든 탕아들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탕아들이 없는 곳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이백섬을 잘라낸 은자의 숲이라면.

'그리고 은자림이라면.'

소설 속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라면, 끝까지 고결함을 잃지 않았던 그녀라면 아무리 미래가 바뀌었다 해도 탕아들에게 손을 보탰을 리는 없으리라. 나는 작게 끄덕였다. 창을 겨누기는 했지만, 싸움이 벌어지진 않았다.

'페리 덕분에 일이 좋게 풀렸어.'

은자림과 싸우는 건 무리였고, 불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알파!"

그래도 은자림의 눈동자는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와중에 페리를 힐끔거리는 것이 여전히 내가 페리를 강제하고 있다 여기는 모양. 일전에 대화한 적도 있었는데 헌터가 가진 몬스터에 대한 적개심이 생생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속으로 한숨 쉬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서해안의 섬. 그리로 가라."

"……!"

"거기에 남은 이들이 있다. 그들을 살려라."

할 말은 했다. 돌아가려는 순간, 한 줄기 빛살이 날아와 가로막았다.

[간파(E) Lv.9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간파(E) Lv.9 → 간파(E) Lv.10]

[간파(E) Lv.10가 최대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간파(E) Lv.10 → 뛰어난 간파(D) Lv.1]

빛살 같은 투창이었지만,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저 발길을 막기 위한 투창일 뿐이었으니까. 다시 돌아보자 그녀가 물었다.

"넌 대체 뭘 원하는 거지?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던졌던 창이 어느새 그녀의 손에 돌아와 있었다.

'쉽게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잘은 안 되는 모양. 당장에라도 싸우겠다는 듯, 그녀가 웅혼한 마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대답해. 네 정체는…!"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내가 왜 슬라임으로 전생한 건지 궁금한 건 나였다. 정체성을 묻는 말에 대답할 말은 없다. 하지만 원하는 것이라면.

'바꾸라고 했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결말이라면 당신이 바꿔주십시오]

세상을 올바른 결말로 이끈다면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어찌 됐든, 상황이 변했건 아니건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뀌지 않았다.

"끝을 막는 것."

멸망 그리고 종말을 막는 것. 오직 그것 하나만을 보고 달리고 있을 뿐. 페리를 바라보자, 녀석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나와 녀석은 그렇게 다시 환계로 돌아왔다.

***

"일이 좋게 풀려 다행이군요."

구진하의 목소리에 은자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해 앞바다에 띄워진 수많은 배. 늑대가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서해안의 사람들을 구출하는 데 손을 보탰다.

"놀랍군요.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놈들을 좌시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서해안 뿐만이 아니라 모든 섬을 확인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마침 몬스터의 모습이 드러나자 은자림이 창을 던졌고, 어김없이 꿰뚫었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커다란 상어의 모습에 사람들이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린다. 은자림은 힐끔 구진하를 곁눈질했다.

"나는 당신이 여기 왔다는 것도 놀랍군요."

"…일이 겹쳤을 뿐입니다."

구진하는 쓰게 웃었다. 덕적도.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일이었는데 아카데미 습격과 무노의 죽음 같은 커다란 사건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구출할 수 있어 다행이었지. 사람들이 하나 둘 내리는 모습을 보며 구진하는 은자림에게 물었다.

"알파가 그리 말했습니까?"

"그래요. 끝을 막는 것."

무엇을 원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정체불명의 그 늑대는 그리 답했다 한다. 끝― 막연히 떠오르는 것은 있지만.

'…….'

일견, 인류는 안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조금만 주의하면 되는 것처럼. 이제 평화가 찾아왔고 던전을 막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순간에도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 유럽은 멸망했고, 질병과 역병은 여전히… 또, 자색의 흑호는 백두산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놈이 움직인다면 막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거기다 바다의 재앙으로 인해 인류는 섬과 바다를 포기해야만 했다.

'끝이라.'

인류에게 있어 멸망이 다가오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막을 수 없는 재앙이 밀려오면 언젠가는 분명히.

'알파가 말한 끝이라는 게 인류의 멸망이라고 생각하는 건.'

편의주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파는 어디까지나 몬스터였으니까. 지난 50년이란 세월 동안 인류는 학습해야만 했다. 인류와 몬스터는 결코, 절대 공존할 수 없음을.

'하지만.'

정말 만약에 알파가 바라는 끝이라는 게 인류의 멸망을 말하는 거라면. 그리고 놈이 바라는 끝을 막는다는 것이 인류의 멸망을 막는 것이라면.

"……."

어쩌면 알파만큼은 인류와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일순 그의 뇌리를 스쳤다.

***

"백록."

"이제는 자네가 오는 것도 완전히 익숙해졌군."

환계로 이동하자마자 백록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찌뿌둥한 몸을 털어내는 모습이 마치 고양이 같다. 빤한 눈으로 바라보자 백록이 왜 그러냐 되묻는다.

"아무것도. 그것보다."

"하나 있네. 바로 가겠나?"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백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걷는 와중에 페리가 날갯짓하며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뀨우."

"정말 많이 성장했군. 자네나 그 어린 용이나."

"…그러게."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페리의 성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새 500g을 돌파한 녀석의 체중은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4배 가까이 커졌으니까. 무엇보다 100을 돌파한 마력이 압권이었다.

'환수가 괜히 환수가 아니긴 하네.'

마력을 다루고도 이성을 유지하는 것이 영물. 거기서 나아간 것이 환수라고 백록은 말했었다. 과연 그 이름에 걸맞은 마력. 아직 이렇게 작은데 시간이 지나면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뀨우우~!"

물론, 지금의 녀석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어느새 던전에 도착해있었다.

"여길세."

서울의 남산ㅡ 어떤 던전일까? 던전의 경계 앞에 서자 생각이 깊어졌다. 눈앞의 던전 때문이 아니라.

'네버랜드.'

문득 떠오르는 이름. 잘 기억나진 않지만, 은자림을 만나러 대전까지 가는 길에 TV 보도로 언뜻 들었던 것 같다. 네버랜드가 열릴 시기가 되었고 각 클랜이 참가할지 안할지 어쩌고저쩌고 하는 내용을.

'지금은 69년.'

이 시기에 네버랜드 공략을 어떻게 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실패했다는 것. 네버랜드 공략이 성공하는 건 훨씬 더 이후였으니까. 게다가 무노의 죽음과 아카데미 습격이라는 사건이 연달아 이어진 이 혼란한 시기에 새삼 클리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갈 필요가 있어.'

공략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네버랜드의 특수성 때문에.

'리셋.'

네버랜드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폐쇄되고, 다음번에 열렸을 때는 몬스터를 비롯 모든 것이 리셋되는 던전이다. 이 조건이 없었더라면 제아무리 난도 높은 던전이라고 한들 십수 년의 세월 동안 공략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 조건은.'

내게 최고의 호재였다. 불규칙하기는 하지만 일정 주기로 리셋되는 수준 높은 던전이라면 최고의 경험치 공급원이 되어 줄테니까.

'하지만 일단은.'

당장 열리지 않은 네버랜드보다 눈앞의 던전에 집중할 때.

마음을 가다듬고, 던전의 경계를 향해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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