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38 Lava Volcano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덥다는 것이었다. 당장에라도 타버릴 것 같은 강렬한 열기. 주변을 둘러보니,
"화산?"
화산지대. 용암이 흘러내리고 분화구에선 재와 연기를 뿜어내는 틀림 없는 활화산이었다.
"흠… 저번에 왔을 때는 화산이 터지진 않았었는데."
"화산이 터지지 않았었다고? 그게 언젠데?"
"10년 정도?"
환수라 그런지 시간 개념이 남다르다. 어쩌면 환계라는 건… 상념을 떨치고 감지를 펼쳐 확인해보니 이상하리만치 몬스터의 기척이 적었다. 아마 화산에 휩쓸려 사망한 게 아닌가 싶었다.
'아쉬운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몬스터는 붉은 피부의 도마뱀이었는데, 몸 곳곳에 가시가 돋아 있는 이상한 모습이었다. 녀석이 하품하듯 입을 벌리자 입김 대신 불이 뿜어져 나왔다.
[샐러맨더]
[체장 1.56m] [체고 61.5cm] [체중 97kg]
[힘 196] [민첩 168] [체력 238] [마력 195]
'애매한… 아니. 내 눈이 높아졌다고 하는 게 맞겠지.'
러닝 랩터와 갑토랑보다는 수준 높은 몬스터였다. 마력까지 생각한다면 오크와 비등한 정도거나 혹은 그 이상일테니까.
"백록. 보스는?"
"글쎄… 나도 본 적이 없네."
그 말에 조금 기대를 걸며 샐러맨더를 포식하기 위해 다가갔을 때, 녀석이 입에서 불을 뿜었다. 뿜어진 불꽃은 돌풍에 흩어져 휘날렸고, 촉수가 샐러맨더의 목을 휘감고 틈새 사이의 그림자가 마치 단두대처럼 놈의 목을 뎅겅 잘랐다.
[샐러맨더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경험치. 그러던 중, 한쪽 구석에서 페리가 살덩이를 용암에 익혀 먹는 걸 보고 떨떠름해졌다.
"저건 뭔가?"
백록의 물음에 뭐라 답해야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아는대로 말해주었다. 미완성품. 존재하는, 존재하지 않는 모든 종의 피가 섞인 연금술의 산물이라고.
"그렇군."
설명을 듣고 퍽 신기하다는 듯 살덩이를 보던 백록이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거라면 악의가 스며들었을 터. 부정한 것임이 틀림없지. 최적의 먹이를 찾았군."
"…먹어도 괜찮은 거 맞아?"
"괜찮네. 오히려 그런 걸 찾아 먹는 거니까."
그 호언장담에 남아있던 일말의 걱정이 사라졌다. 게다가 아직 페리가 먹고도 한참이나 남을 만큼의 양이 남아있다. 한동안 녀석이 성장하는 데 문제없을 만큼.
"일단."
촉수로 페리를 휘감아 흘러내리는 용암을 피해 뛰어올랐다. 높게 뛴 순간, 아래로 보이는 시야에 또 다른 몬스터들이 있었다.
[레서 드레이크(Lesser Drake)]
[체장 4.51m] [체고 1.87m] [체중 1.11T]
[힘 355] [민첩 311] [체력 406] [마력 296]
[보유 스킬]
[용린(C)]
'상당한데.'
동물원에서나 볼 법한 코뿔소 같은, 아니 그보다 커다란 몬스터들이 한데 모여 무리 지은 모습에 만족스러워졌다. 놈들 하나하나가 아라네아와 비등하거나 살짝 못 미치는 정도인데.
'그런 놈들이 무리 지은 걸 보고 좋아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심지어 놈들은 용의 황무지에서도 본 적 없는 용종이다. 드레이크라는 건 달리 아룡(亞龍)이라고도 불리는 날개없는 드래곤을 일컫는 말.
'그 열등종이라.'
레서라는 이름이 붙어도 이 정도다. 만약 진짜 드레이크라면 어스 서펜트 이상가는 괴물일지도 모른다. 놈들의 무리는 고작 일곱으로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여기 보스는 기대해 볼 만하겠어.'
저번 외눈박이가 있던 던전은 솔직히 말해 실망이었다. 하지만 보스도 아닌 놈들이 이 정도라면.
'20레벨을 달성할 수 있을지도.'
단번에 내려서 놈들의 앞을 가로막자 놈들의 표정이 불쾌해졌다. 고작 늑대 한 마리가 막겠다는 사실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울부짖는다. 몰래 영량을 펼쳤던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림자가 비늘을 뚫지 못했기 때문에.
'안 박힌다고?'
용린(龍鱗). 전신을 두른 용의 비늘. 놈들이 가지고 있는 C등급 스킬에 그림자가 막혔다. 흠집 정도는 낼 수 있겠지만, 그게 고작이었다.
'그림자가 통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돌풍으로도 무리다. 대지를 부수고 달려드는 돌진을 정면에서 막을 방법은 없다.
'망할.'
피하는 건 문제가 없지만, 상성이 좋지 않다. 레서 드레이크가 길게 목을 뻗어 씹으려 턱을 벌렸고, 숙여 피하고 귀화를 일으켰다.
"―――!"
검은 불꽃에 휩싸인 레서 드레이크는 괴로운 비명을 지르면서도 끈질기게 견뎠다. 용종 특유의 질긴 생명력과 화산지대에서 단련된 열기에 대한 내성. 다시 생각해봐도 상성이 좋지 않다.
'그림자, 돌풍, 귀화가 전부 힘들다면…!'
돌진하는 놈을 피하며 촉수로 휘감았다. 기다란 목과 강한 턱힘이 경화한 촉수를 순식간에 물어뜯었다.
'정신 나간 치악력.'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어 놈의 아래에서 튀어나온 순간, 귀화를 일으키며 촉수를 휘감아 목을 당겼다. 1t이 넘는 놈을 당기는 건 무리. 반동으로 내가 놈에게 끌려갔다.
'이걸로 됐어.'
기함한 놈이 몸부림치는 사이, 퍼뜨린 영량이 일렁이며 놈의 목을 파고들었다.
'이번엔 다를 거다.'
원래라면 뚫을 수 없었겠지만, 탈식의 하위 효과에는 악식(惡喰)이 있다. 뭐든지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능력 앞에선 용린조차 마찬가지. 먹어 치운 비늘의 틈새 사이를 그림자가 깊게 파고들었다.
"―――!"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는 놈. 바닥이 꺼지고 용암이 치솟아 올랐다. 다른 레서 드레이크들이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더 버티는 건 무리라고 판단해 떨어졌다.
'쉽게는 안 된다 이건가?'
놈들이 상처 입은 레서 드레이크를 감싼다. 하지만 일으킨 귀화가 놈의 전신을 뒤덮은 이상 소용없는 짓이다. 열기에 대한 내성이 있다고 해도 생물로서의 한계가 있다. 전신의 피가 증발한 것처럼 괴로워하던 레서 드레이크는 머지않아 숨을 거뒀다.
'앞으로 6.'
한 마리를 죽인 순간, 놈들의 눈빛이 변했다. 이제까지 '귀찮은 방해꾼'이었다면 '죽여야 하는 적'으로 인식된 모양. 놈들은 가지고 있는 마력을 전신에 두르기 시작했다.
'마치 갑옷처럼.'
용린 위에 또 한 겹의 갑주가 더해진 셈. 단순히 방어력만이 아니라 힘과 속도에서도 큰 차이를 보일 터. 여기서부터가 진짜였다.
"뀨우우!"
백록은 날갯짓하는 어린 용을 붙잡았다. 페리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돌아보자 백록은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지켜보거라."
두른 마력은 갑주로서만 작용하는 게 아니다. 레서 드레이크의 힘과 속도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돌진하는 놈들을 피하기 위해 늑대가 높이 뛰어올랐을 때, 놈들도 마찬가지로 대지를 박찼다.
"뀨우우웃…!"
걱정하는 페어리 드래곤과는 달리 백록은 안심하고 지켜볼 수 있었다.
'역시.'
공중에서는 방향 전환이 쉽지 않다― 하지만 늑대에게는 촉수와 탄력이 있다. 휘감은 촉수로 자신을 당기고 탄력을 이용해 레서 드레이크의 목 위로 안착한다. 이어지는 결과는 아까와 동일. 레서 드레이크가 마력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늑대도 마찬가지로 마력이 있다.
'게다가.'
마력의 양과 질이 크게 늘었다. 또 저런 상황에서조차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다. 여섯 마리 모두의 움직임을 읽고도 다음을 생각한다는 뜻. 잠깐 현계로 돌아갔을 뿐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괄목상대라는 말이 이리도 어울릴 줄이야.'
물 흐르듯 움직이는 늑대. 한 번 회피했다 싶으면 그와 동시에 레서 드레이크를 공격한다. 더 볼 것도 없이 이미 승부는 불 보듯 뻔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변이 없다면― 늑대는 머지않아 놈들을 모조리 먹어 치우리라.
***
'마력은.'
아직 한참이나 남아있다. 대마력 스킬로 인해 스테이터스보다 월등히 많은 마력을 보유하게 됐으니까. 게다가 탈식의 효과로 부족한 마력이 보충된다.
'놈들은 멈추지 않아.'
귀화를 일으킬 시간도 없이 몰아붙인다. 놈들의 돌진은 이미 생물의 영역이 아니다. 한 번이라도 부딪치면 그건 치명상으로 이어진다.
'한 번이라도 당하면 치명적이야.'
전부 피해야 한다. 한 번이라도 공격을 허용하면 피하는 게 점점 어려워질 테니까.
'그래도.'
남은 숫자는 어느새 넷. 쓰러뜨렸다는 건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거였다. 무엇보다, 놈들의 공격이 단조로웠다.
'물어뜯거나 달려들거나. 아니면!'
섬뜩한 채찍 소리에 몸을 낮췄다. 가늠하기도 어려운 속도의 꼬리 채찍이 아슬아슬히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돌진하는 드레이크를 피하자, 저 먼 곳에서 두 마리 레서 드레이크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설마?!'
믿기 어렵지만,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다. 엄습하는 위기감에 눈을 부릅뜨고 그림자 아래로 숨어든 순간, 목구멍 너머로 언뜻 일렁이는 불길이 순식간에 솟구쳐 대지를 녹였다.
'망할.'
그림자가 일렁였다. 설마 하는 심정에 몸을 피하지 않았더라면 방금 걸로 당했을 터.
'브레스(Breath).'
아룡. 그것도 열등종임에도 불구하고 용의 상징과도 같은 숨결을 토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바닥이 드러났어.'
화성암이 녹고 드러난 건 흐르는 용암이었다. 타버릴 것처럼 뜨거운 증기를 내뿜고 있지만, 문제는 용암 그 자체가 아니라.
'이 아래.'
이를 악물고 질주하자, 한 박자 늦게 거대한 용암이 아까까지 내가 있던 자리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다시 한번 뛰어오르더니, 레서 드레이크들이 용암 아래로 끌려들어 갔다. 똑똑히 보았다. 용암을 두르고 뛰어오른 괴물을.
'프로미넌스 크로커다일…!'
통찰로 확인한 놈의 이름이었다.
프로미넌스(Prominence). 즉, 태양의 홍염. 불기둥을 이르는 말.
'…불기둥.'
용암을 두르고 뛰어오른 놈은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 바다나 강이 아니라 용암을 헤엄치는 악어. 놈이 튀어 오르며 치솟은 용암이 레서 드레이크들과 나 사이를 갈라놓았다.
'즉, 이 던전의 메인은 화산지대가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용암지대였다는 거다. 그 속을 헤엄치는 수많은 기척. 감지를 펼쳤을 때, 몬스터가 적다고 생각했지만, 그 실상은 용암 지대에 숨어 있었던 거다. 아마 보스도 마찬가지로 저 아래에 있을 터.
'백록이 보지 못했다고 한 이유가.'
이거였다. 용암을 두른 놈들과 싸울 방법은 없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고개 돌렸을 땐 이미 늦고 말았다.
"……!"
백록과 페리의 뒤에서 거대한 용암이 마치 불기둥처럼 솟아오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