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47 공동 전선 (2)
타오른 턱은 재생이 빠르게 복구했다. 비록 저거노트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D등급 재생은 잘린 사지를 복구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 입속의 화상은 금세 사라졌고, 뛰어오른 늑대는 저거노트의 몸 곳곳을 누볐다.
발이 닿을 때마다 탈식이 효과를 발했지만, 놈이 가진 재생이 순식간에 상처를 재생시킨다. 귀화도 돌풍도 재생에 막히고 심지어 흑무조차도 뚫는 건 힘들었다. 검은 마력을 먹어 치운다는 건 다른 데 할애할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으니.
벌써 세 번이나 같은 식으로 상황이 돌아가고 있었다.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무의미하게 시간을 버리고만 있는 셈이다.
"……."
저 멀리, 지형이 바뀌는 싸움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까진 싸우고 있는 모양이지만, 오래가지는 못하리라. 일단 생각해 둔 방법은 있었지만… 그걸 위해선 우선 침묵하는 입을 쓰러뜨려야만 한다.
[Multiplexarea sferei fulgerului―!]
초조해지는 와중에, 번개를 담은 구체가 수도 없이 쏘아졌다. 수십, 수백… 대부분은 안개가 집어삼켰지만, 물밀 듯 밀려오는 구체가 기어코 안개를 뚫고 늑대에게 쇄도했지만, 늑대는 궤도를 전부 읽고 있었다. 설령 안개가 없었더라도 단 하나라도 늑대에게 닿을 리 없었으리라.
그 사실을, 침묵하는 입도 잘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잠깐 늑대를 떼어놓을 시간을 벌었을 뿐. 침묵하는 입은 마법을 구현하기 위해 주문을 영창했다.
[Dumnezeul tunetului și al fulgerelor, coboară]
첫 번째 영창은 단숨에 이어졌다. 첫음절과 끝음절이 거의 동시에 들릴 정도로 뛰어난 고속영창. 어느새 다가온 늑대가 저거노트의 몸을 기어올랐다. 저거노트는 몸을 비틀고 움직였으나, 늑대는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까뒤집은 저거노트가 자신의 몸을 지면에 던졌다. 수 톤에 달하는 육중한 몸이 부딪치자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살덩이가 출렁였다.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대못과 판금의 조임이 조금 느슨해졌다. 이미 발판을 밟고 멀어져 있던 늑대가 아래를 보며 눈을 빛냈다.
'형상을 유지하게끔 억누르고 있는…'
저거노트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미완성품. 억지로 영성을 부여했을 뿐, 무한히 재생하는 살덩이임은 변함없다. 그렇다면 놈이 두른 철판과 대못을 없앤다면?
생각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늑대는 대못을 밟았고, 탈식으로 먹어 치워 조임이 헐거워지자 저거노트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이게 정답이었나?'
"……!"
전혀 상관없다는 듯 두 팔로 지탱하며 몸을 일으키는 저거노트, 그러나 이전보다 움직임이 미묘하게 불편해진 걸 알 수 있었다. 덕분에 회피하는 게 쉬워졌다.
[Când trage fulgerul, respirația ta se va opri]
―문제는 저거노트가 아니라, 그 안에 숨어서 영창하고 있는 침묵하는 입. 놈의 영창의 매 구절마다 꺼림칙함이 느껴졌다. 내부에서 불길한 마력이 꿈틀거린다.
'뭘 노리고 있는 거지?'
마법에 대해선 문외한이다. 미래를 엿보는 게 아닌 이상에야, 알지 못하는 걸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절벽에서 흑무는 대마법조차 먹어 치웠지만, 저거노트의 안에서 숨어있는 이상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언뜻 들리는 주문은 아까 놈이 사용하지 못했던, 최후의 영창을 흑무가 집어삼켰던 그 마법이다.
'……!'
본능적으로 저것만큼은 완성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이어지는 영창에 늑대는 저거노트를 두른 대못과 판금, 사슬을 재빨리 집어삼켰다.
***
'알파.'
역시, 있었다. 알파는 이리저리 괴인을 교란하고 있다. 그 현란하고 재빠른 움직임. 걸음마다 의미가 있었고 다음 수를 준비하는 모습에 은자림은 시선을 빼앗겼다.
'…터무니없어.'
수많은 마법을 무위로 돌리고, 대적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검은 마력을 밀어내고 압도하고 있었다. 얼마 전, 대전에서 알파와 대화했을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이길 자신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게 됐다. 이 자리에 모인 헌터 중 알파의 움직임과 동선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지금 도망친다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돌아본 은자림은 누군가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변했다. 알파가 괴인을 붙잡고 있다면 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 시간은 알파가 벌어줄 테니까. 여기서 끼어들어봤자 개죽음밖에 되지 않는다. 냉정하게 생각해 물러나서 공략대와 합류하는 게 옳은 판단이다.
1구획. 광장은 가로막지 않을 테고, 미로는 어떻게든 돌파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미궁이었다. 공략대의 남은 인원이 미궁을 돌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거기에 힘을 보태는 게 정답이다. 지금 이 틈에 결사대도 후퇴하는 게 백번 옳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세요."
곧, 은자림은 허락의 말을 뱉었다. 결사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 묘한 어조에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먼저 가도록 해요. 금방 따라갈 테니."
"선자, 지금은…!"
하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 깃든 강한 의지가 자신은 물러서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어.'
헌터들이 잘못된 게 아니다. 그들은 옳고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괴물들끼리 싸우고 있는데 그 싸움에 목숨을 걸고 끼어들 필요는 없다― 정답이다.
'하지만…'
은자림은 그러지 못했다. 은공에게 빚이 있어서가 아니라, 2구획에 들어오면서 느꼈던 불안 때문에. 그녀가 가진 고유의 감이 여기서 물러나는 걸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랬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고 계속 속삭이고 있었다.
'반드시, 여기서 담판을 지어야만 해.'
한참이나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던 하연은 결국 깊은숨을 뱉었다.
"말려도 소용없겠네요."
애초에 설득한다고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무인은 자신의 감을 믿었고, 마법사는 이성으로 판단해 남은 이들을 이끌기로 했다. 다만, 하다못해 무인인 그녀에게 어울릴 인사말을 건넬 뿐.
"…무운을 빌겠어요."
은자림은 양손으로 창을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녀는 괴인이 있는 곳까지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하연은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일단, 합류부터 하죠."
***
대못과 철판의 연결이 끊어지고 저거노트의 몸이 출렁였다. 부정형과는 다르지만, 결국 미완성품의 집합체. 살덩이에 불과하다. 그것을 마도와 연금술로 억지로 붙잡아 눌렀을 뿐.
'아직 전부는 아니지만.'
이미 두 팔은 어깨와의 경계가 희미해져 뭉개졌다. 시간이 갈수록 일그러질 터. 저거노트가 형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면 놈과 침묵하는 입을 분리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혹시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떠올랐을 때, 침묵하는 입이 네 번째 영창을 읊었다.
'망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일말의 희망이 생겼더라도 그 희망을 이룰 시간이 부족하다. 여전히 내겐 놈을 뚫을 수단이 없다. 단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그럴 기회만 있다면…!
"……!"
날아오는 마법을 이를 악물고 피했다. 탈식의 덕으로 체력이 달리진 않았지만, 싸움이 이어질수록 정신적으로 지쳐간다.
'…제길.'
문득, 불안감이 엄습했다. 은자림과 마주했던 건 고작 두 번뿐이다. 내가 알고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소설 속에서 보여줬던 모습일 뿐. 그런 얕은 믿음에 페리를 보낸 게 혹시 실수는 아니었을까. 만약에 일이 잘못된 거라면…?
'…….'
애써 고개를 털었다.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그렇게 발판을 밟고 뛰어오른 순간, 한 줄기 섬전이 번쩍였다.
"…를 멸하는 창!"
누군가의 목소리. 곧 섬전은 섬광으로 변했다. ―스킬로 발현된 시각조차 가득 메우는 새하얀 빛은 내 불안과 의심을 전부 날리고도 남았다.
"뀨우우웃!"
먼 곳에서, 그녀의 어깨 위에 올라탄 페리와 눈을 마주쳤다.
'성공했구나.'
창에 꿰뚫려 복부가 깊게 파인 저거노트가 분노에 차 질주했다. 놈의 상처가 드러난 지금 기회인 건 분명했지만…
'부족해.'
복부가 아니라 흉부여야 한다. 좀 더 확실한 기회가 필요하다. 저거노트로부터 은자림을 살리기 위해 달렸지만, 500이 넘는 민첩으로 달리는 거구를 날아오는 마법까지 피하며 따라잡는 건 쉽지 않다.
"……!"
그래서, 달리지 않았다. 이미 저거노트의 발목에 붙여놨던 촉수가 나를 끌어당겼고, 무시무시한 힘에 끌려가 거리를 좁힌 순간 탄력을 발하고 돌풍을 터뜨렸다.
"――――――!"
포효하는 저거노트. 어느새 가슴께의 상처가 전부 아물어 있다. 아직 낙하 중인 은자림을 잡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페리의 점멸이 그녀를 이동시켰다.
"아, 알파―?!"
가까스로 저거노트의 손에서는 벗어났으나 여전히 떨어지고 있다. 소리치는 그녀의 뒷덜미를 물고, 아슬아슬하게 발판을 밟았다.
저거노트와 잠깐 간격이 생긴 사이, 탐지를 사용했다가 목을 비틀어 꺾었다. 한 바퀴 돌며 뛰어오른 은자림이 떠오른 순간, 그녀의 창이 빙그르르 회전하며 돌아왔고 뻗은 손에 잡혔다.
"…이건."
아연한 표정으로 믿기 어렵다는 듯, 은자림이 중얼거렸다. 지금 그녀는 늑대의 등을 타고 있었다. 알파가 자신에게 등을 내주었다는 사실에 은자림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사실이 너무나 명백했으니까.
'여기서부터는.'
혼자서는 힘들다. 함께 싸워야만 한다.
―저거노트와 침묵하는 입의 공격을 회피할 수단이 내게는 있다. 하지만, 저거노트를 뚫을 공격력이 없다. 반대로 저거노트를 뚫을 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저거노트를 따돌릴 방법과 검은 마력을 막을 방법이 없는 그녀.
그렇다면, 놈들이 그런 것처럼 함께 싸우는 수밖에 없다.
"―다시, 방금 일격을 준비해라."
흉부를 노리라는 말에 은자림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순간, 딱 한순간만 상처가 벌어져 틈이 생긴다면 그걸로 족하다. 흑무가 파고들 수만 있다면 놈과 저거노트를 분리할 수 있을 테니까.
'쓰러뜨릴 수 있어.'
승부의 행방은 놈의 대마법이 먼저 완성되느냐, 그 전에 은자림이 저거노트의 흉부를 꿰뚫느냐― 싸움의 흐름을 읽은 늑대의 눈이 붉게 빛났다.
***
뗏목 위, 후퇴한 공략대에 합류한 이은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상처 입은 구진하를 내려놓는 것이었다. 곧바로 회복 스킬을 가진 대원이 달려와 구진하를 살폈지만, 와짝 표정을 구겼다.
"…어떻게 숨이 붙어 있으시기는 한데."
문제는 산 송장이라는 점. 전신 골절을 시작으로 대량의 피를 흘렸고, 잃어버린 팔은 대체 무엇에 당한 건지 회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문제인 건 진탕된 내부와 엉망이 된 장기였다.
포션을 쏟아붓듯 마시고서야 가까스로 숨이 돌아왔지만, 딱 거기까지다. 잠깐 연명했을 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원은 식은땀을 훔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최대한 빨리 밖으로 이송시키는 것밖엔…"
고개를 젓는 대원을 보던 이은하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멀어진 곳을 쳐다보던 그녀는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자신의 나약함을 저주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