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47 공동 전선 (4)
[멸망 확률 91.53% → 86.29%]
[5.24%만큼의 업을 획득했습니다]
[업(業) 12.61%]
침묵하는 입을 집어삼키자, 5% 이상 멸망 확률이 줄어들었다. 같은 간부였던 꺾인 손가락에 비해 3배에 가까운 업. 그도 그럴 것이 간부라고 다 같은 간부가 아니니까. 키메라에 불과한 꺾인 손가락과 스퀘어 마스터였던 침묵하는 입을 비교할 수는 없으니까. 오히려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예상했던 반동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나 마력을 소모했음에도 불구하고 늑대가 가진 마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마력이 내부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
갑자기 주저앉은 늑대를 보고 은자림은 눈을 크게 떴다가 뒤늦게 늑대가 무엇을 삼켰는지 떠올리고 아미를 찌푸렸다. 그렇게나 막대한 마력의 정수를 집어삼키고 아무 일 없이 끝날 리 없다. 분명 끔찍한 고통을 억지로 참고 있을 텐데… 조금이나마 가라앉혀 볼 생각에 늑대의 미간에 손을 올렸을 때, 은자림은 기함해 소리칠 뻔했다.
'이런 걸 참고 있었다고?'
함부로 손댈 정도가 아니다. 무모함… 아니, 그러지 않았다면 폭주한 마력의 폭발에 전부 사라지고 말았을 터. 옳은 선택이었지만, 은자림은 입술을 짓씹었다. 늑대는 그런 그녀를 빤히 보다 소매 끝을 물어 등 위로 던져 올렸다.
"지, 지금 무슨!"
진탕된 내부― 통각 내성이 있어 고통은 없다. 움직이는 게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재생이 있으니 머잖아 회복되리라. 무엇보다,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귀화와 흑무가 재생을 늦추고 있다고는 하나, 저거노트의 몸 속이었으니까. 언제 살덩이에 뒤덮이게 될지 모른다.
"그런 몸으로 움직이면…!"
걱정하는 목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발판을 만들어 허공을 밟았다. 저거노트가 자리한 좁은 땅을 제외하곤 검은 태양이 모두 소멸 시켜 깊은 구덩이를 만들었으니까. 그렇게 조금 떨어진 곳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내려섰을 땐, 이미 재생이 상처를 거의 전부 회복시킨 뒤였다.
'그리고…'
[라이프 베슬을 섭취했습니다. 마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들끓던 마력을 갈무리하고 소화하는 데 성공하자, 예전 천년용하를 섭취했을 때와 동일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테이터스를 확인해 본 결과 대략 50에 가까운 정신 나간 상승 폭. 어느새 400에 가까워진 마력에 실소하고 있자니, 분하다는 듯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
―저거노트. 놈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검은 태양이 만든 구덩이는 반대로 놈을 가두는 감옥이 되었으니까. 무한히 재생하는 살덩이 괴물과 굳이 싸워 줄 필요는 없다는 거다.
'이걸로 일단락됐어.'
하지만 전부 끝난 건 아니다. 여전히 시스템의 달성 조건은 이뤄지지 않았으니까. 공략대가 괴멸할 위험… 저 멀리 일어나는 폭풍을 보며 늑대는 숨을 가다듬었다. 이게, 정말로 마지막이다.
―먼 곳을 바라보는 알파를 지켜보던 은자림은 긴 숨을 뱉었다. 정신 고갈의 전조로 머리가 지끈거려왔지만,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 남아있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대답해줘."
자신을 부르는 말에 시선을 돌린 알파의 붉은 눈과 마주하자 잠깐 얼어붙었지만, 은자림은 이를 악물고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여기서 놓쳤다가는 그럴 기회가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알파의 행동은 몬스터라기엔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많았다. 단순히 탕아들을 쫓는 거였다면 서해안의 사람들을 구출하라는 말을 했었을까?
―변절자들을 해치웠고, 인류를 위해 행동했다.
몬스터만 아니었다면 알파의 행보에 누구나 갈채를 보냈을 거다. 몇 가지 의문이 남기는 해도 여태까지 보인 그의 행동은 누구보다 고결했으니까.
"네가 악의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어째서?
몬스터가 왜 인류를 돕는 걸까? 게이트가 열리고 50년, 인류는 멸망의 기로에 섰다. 일견 평화로운 듯 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음을 은자림은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일을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언젠가 들었던 세검사의 말이 뇌리에서 재생되자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인류는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지만, 멸망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이번 습격 또한 그 일환이었고.
'하지만.'
이곳에서, 은자림은 희망을 보았다. 몬스터, 알파와 함께 싸웠다는 건 다시 생각해봐도 믿기 어렵고 실감이 나지 않는다. 혹시 헛것이라도 본 건 아닐까?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럴 리 없건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만약 생각했던 것과 다른 대답이 돌아온다면…
"뀨우우~!"
―힘을 내라는 듯한 소리에 은자림은 두 눈을 감았다. 알파가 은공을 억압하고 있을 리가 없다. 모든 것은 착각. 불안을 품을 이유가 없다. 다시 한 번, 늑대가 해왔던 일을 되새기며 은자림은 조용히 숨을 골랐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전히 붉게 빛나는 눈이 이젠 두렵지 않았다. 그래서, 가슴이 시키는 대로 물었다.
"너와 나… 우리는 함께 할 수 있을까?"
***
한참을 얼어붙어 있다가 공포에서 벗어난 김주섭은 뒤늦게 공략대와 합류하려다 사람의 기척, 주저앉아 몸을 추스르고 있는 은자림을 발견하고 화색을 띠었다.
"오, 선자……?"
그러다가, 의아한 듯 말꼬리를 끌어올렸다. 어쩐지 상태가 이상한 듯 보여서.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가다듬는 그녀의 표정이 다소 멍한 듯 보였다. 환각이라도 보는 듯한 그녀의 어깨를 짚자,
"……!"
화들짝 놀란 은자림이 기함하며 몸을 돌리자 되려 놀란 김주섭이 동그랗게 눈을 떴다.
"왜,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 박자 늦은 대답과 함께 그녀는 길을 재촉했다. 다만, 그녀의 뇌리엔 아까 들었던 말이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다려라. 내가 널 찾아갈 때까지.'
은자림은 자신의 창을 강하게 쥐었다. 머잖아 늑대가 찾아오면, 모든 의문이 풀리리라…….
"어서 가죠. 공략대와 합류해야 해요."
그런 말과는 달리 은자림의 시선은 알파가 멀어져 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
"망할…"
어깨뼈가 부러지고 전신이 뻐근했다. 옆을 본 강태호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쓰러진 백군태. 널브러진 주교. 그 옆에 머잖아 자신도 드러눕게 되리라.
"좆같은 영감탱이…"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칼을 늘어뜨리고, 상처 하나 없는 갑주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슬슬 체력이 달리기 시작하자 강태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도 좀 지껄여 보라고!"
패태검을 크게 내리찍자, 갑주는 검을 들어서 막았다. 강태호에게 이전 같은 힘은 남아있지 않다. 가볍게 휘두르자, 힘의 균형이 깨지고 강태호는 멀리 나가떨어졌다.
"…시벌."
마른세수를 한 강태호가 입안에 들어간 흙을 퉤 뱉었다. 이미 몇 번이나 끝낼 기회가 있었지만, 갑주 아니 강훈은 그러지 않았다.
"예까지 와서 정이라도 떠올린 거요? 그럴 거라면…"
거대한 패태검에 무지막지한 마력이 담기기 시작했다. 진심을 보인 강태호의 힘은 칠영웅에게도 모자라지 않았다. 남은 마력을 끌어 담은 강태호는 패태검을 휘둘렀고―
"처음부터 그딴 쓰레기들이랑 손잡지 말았어야지!"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력의 파동이 퍼져나가고 이미 폐허가 된 일대가 다시 뒤집혔다. 땅이 울리고 폭풍을 일으켰으나, 갑주는 큰 어려움 없이 강태호의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 그러더니, 투구 너머로 보이는 푸른 불꽃이 섬뜩하게 타올랐다.
"…그렇지."
이 싸움에서, 그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떨쳐냈다는 듯, 이제는 담담해진 태도로 고개를 끄덕인다.
"강해졌구나."
강태호는 고개를 모로 꺾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있었다. 정말 혹시나 세뇌당하거나 조종당하고 있는 거라면… 그런 기대를 품었었다.
"강해졌다고…?"
어리석은 어렴풋한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의심할 여지 없이 갑주, 아니 강훈은 자신의 의지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그에 강태호는 으스러지라 손잡이를 쥐었다.
"하. 그래. 이제 좀 말문이 트이셨소?"
가증스럽다는 듯, 강태호는 입꼬리를 비틀며 그를 조소했다.
"왜? 혈육은 손대기 껄끄러우셨나? 아들내미는 못 죽일 것 같더이까?"
당신의 동료는 잘도 죽이지 않았느냐고 무노를 들먹이자 강훈이 우뚝 멈춰 섰다.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랬었지."
시인하는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강훈이 쇄도했다. 그에 강태호는 한껏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강훈이 순식간에 다가와 거대한 검을 내리치자 강태호는 패태검의 손잡이를 잡고 칼등을 팔목으로 지탱하며 가까스로 견뎠으나, 발등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 씻팔…"
가까스로 떨쳐냈을 때, 곧바로 다음 일격이 날아왔다. 지면에 발이 박힌 채로 수 미터나 밀려난 강태호가 가까스로 빠져나오며 곧바로 몸을 굴렀다. 하지만, 강훈의 발길질에 다시 한참이나 날아가고 말았다.
"……컥!"
혈육에 대한 정. 최후의 망설임을 기어코 떨쳐낸 강훈이 강태호를 향해 달렸다. 청염이 타오르는 검을 휘두르자, 강태호는 옆으로 굴러 피했다.
"망할…"
대지가 갈라졌다. 전혀 상대되질 않는다. 지칠 대로 지친 자신과는 달리 여전히 강훈은 건재하다. 손이 떨려서 검을 쥐는 게 힘들다. 천천히 다가오는 강훈을 보며 강태호가 물었다.
"…왜 그랬소?"
묻는 말에 강훈은 대답 대신 검을 들어올렸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뒤집을 방법은 없다. 공략대의 누구라도 강훈과 맞설 수는 없었을 거다. …저 멀리, 암운이 걷어진 걸 보면 어떻게 일은 끝난 모양인데.
'제발 돌아오지 마라.'
강태호는 공략대가 돌아오지 않기를 빌며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검에 체념하고 있었을 때, 별안간 강훈이 몸을 돌렸다.
"……!"
참격을 휘두르자 몰래 그를 덮치려던 검은 안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강태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배후에서 등을 베인 강훈의 갑주가 찢겨나갔고 그사이 거리를 둔 강태호는 패태검을 아공간으로 던져넣고, 주교와 백군태를 업고서는 이를 악물었다.
"시발…"
주교의 숨이 끊어져 있었기 때문에. 시체를 업은 강태호는 망설이지 않고 달렸다. 뒤를 쫓으려던 강훈은 한숨과 함께 멈추더니, 검을 들어올렸다.
제아무리 그라 해도 검은 마력만큼은 쉽게 볼 수 없었으니까. 시선을 돌린 곳에 자리한 늑대에게 강훈은 검을 겨눴고, 늑대는 침을 삼켰다.
'…….'
탈식으로 빼앗은 검은 마력을 전부 토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잠깐 시간을 버는 게 고작이었다. 다시 강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늑대는 죽음이 다가온다고 느꼈다. 예측? 직감? 간파? 전대 검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의 다음 움직임만큼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마치, 자신 이상의 직감과 간파를 가지고 있다는 듯이.
'역시 불가능해.'
강태호라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거지 지금의 내가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딴 건 진작 알고 있었어.'
지금의 강훈이 얼마나 괴물인지는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맞설 수 없다. 내가 아니라 공략대의 누가 오더라도 단 1%의 승산도 없이 확실한 죽음을 맞으리라.
'그래. 공략대에서는.'
쿵― 쿵― 쿵―!
"――――――!"
땅을 울리는 발소리. 천지를 떨치는 포효와 함께, 그 존재가 위용을 드러냈다.
[스노웰]
[체장 67.9m] [체고 28.7m] [체중 794t]
[힘 682] [민첩 563] [체력 659] [마력 637]
[보유 스킬]
[신력(B)] [대마력(B)] [바위가죽(B)] [완화(C)] [급속 회복(C)] [뛰어난 직감(D)] [통각무효(D)] [수영(F)]
거대한 백사자. 2구획의 보스, 스노웰. 굳이 깨우지 않으면 광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보스― 자신을 쫓아온 백사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늑대는 재빨리 은신으로 몸을 숨겼을 때―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2구획의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폐쇄 직전의 광란…!'
던전이 닫히기 전까지 가능한 한 빨리 네버랜드를 빠져나가야만 한다. 필사의 도주― 몸을 돌려 도망치려던 늑대는 떠오른 메시지에 눈을 빛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29 → Lv.30]
[진화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마침내 기다리던 때가 찾아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