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48 선택의 기로에서
"큿…!"
몰려드는 미로의 몬스터. 이미 공략대가 길을 정리했었지만, 지금 그것들이 끝도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에 지휘권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상황이 의미하는 게 너무나 명백해서.
"광란…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상황을 파악한 지휘권자는 공략대에게 지시를 내렸고, 기생 촉수를 비롯한 몬스터들이 몰려오자 가장 바빠진 것은 이은하였다.
"Add…!"
이미 쉬어버린 목으로 계속해 소리 지르며 몬스터의 접근을 경고해야만 했다. 미로의 안개는 감각을 교란하는 효과가 있었으니까. 이미 결절된 성대. 그런데도 이은하는 소리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발아래서 올라오는 땅굴 벌레의 기척- 가까스로 굴러 피하고 손을 움켜쥐었을 땐, 지면을 파고 튀어나와 쓰러진 구진하를 덮치려 하고 있었다.
"Distort…!"
아슬아슬하게 허공에서 붙잡았지만, 이은하는 이를 악물었다. 생각보다 반동이 강하다― 손바닥만 한 벌레일 뿐인데도 마력으로 견디는 게 어려웠다. 기어이 양손을 깍지 껴 겹친 이은하가 가까스로 주먹을 쥐자 땅굴 벌레가 으스러졌다.
'…….'
반사적으로 파우치를 더듬었을 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가져왔던 포션은 진작에 바닥났으니까.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으며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Add! 6시 방향 2!"
끝없이 몰려오는 몬스터들― 지휘권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벽을 두드렸고, 숨어있던 기생 촉수가 옆에서 튀어나오자 놀라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쳐내고 밟았다. 촉수를 짓밟고 일단락되자, 그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걱정되는 건 미로가 아니었다. 비록 선발대장과 공략대장을 비롯해 정예들이 많이 빠지긴 했지만, 지금의 공략대라도 미로는 어렵지 않게 헤쳐나갈 수 있을 거다. 들어왔을 때, 이미 처리했던 길이니까. 하지만 정말 문제인 건…
'미궁이지.'
―미궁의 특성.
스틸레톤과 스틸 자이언트는 부서지고 으깨지더라도 다시 합쳐져 복원한다. 즉, 이대로 미궁을 돌파해야 한다는 뜻인데…
'…힘들다.'
정예가 빠져 공략대의 인원수와 수준이 떨어졌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체력과 소모품의 문제였다. 포션과 스크롤을 비롯해 소모품은 진작에 사용한 지 오래. 심지어 화살마저도 다 떨어져 궁수들도 창칼을 들고 싸우는 처지인데.
'―돌파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돌려봤지만, 결과는 암담했다. 이대로 미궁을 돌파한다면 공략대가 전멸할 게 불 보듯 뻔하다.
'2구획의 몬스터도…'
광란이 일어난 거라면 차원의 틈새를 넘어 던전 밖으로 빠져나오려 할 게 뻔하다. 공략대가 괜히 목표를 변경해서 2구획까지 공략하겠다고 나선 게 아니다. 광란에서 던전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몬스터는 2구획까지기 때문. 아직 공략하지 못한 2구역의 몬스터들이 몰려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만 해도 끔찍하다. 시간은 없는데 상황은 암담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힘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Add! 후방 13…"
열세 마리. 그 숫자를 듣자 지휘권자는 질끈 눈을 감았다.
'설마 2구획의 몬스터가…'
아니다. 그래도 강을 넘어야 하는데 이렇게 빨리 도착할 리 없다. 창칼을 들어 올리며 공략대가 긴장했을 때, 은은한 안개 너머로 드러난 실루엣은 사람의 것이었다. 마침내 그들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지휘권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러분 모두,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외봉의 로드께서 이끌고 계셨군요."
뒤늦게 합류한 것은 은자림 대신 결사대를 이끌던 하연이었다. 13명― 처음보다는 줄었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A클래스 헌터들. 암담했던 상황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여 지휘권자는 조금이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이거라면…'
어떻게든 미궁을 돌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합류한 이들과 함께 길을 재촉해 머지않아 미궁의 문까지 도착했을 때, 지휘권자는 공략대에게 잠깐의 휴식을 취하게끔 했다.
"30분. 딱 30분만 휴식합니다."
던전이 폐쇄하는 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2구획의 몬스터가 몰려오는 건 그보다 빠를 거다. 이 이상 시간은 지체할 수 없다. 불만이 나올 법도 하건만, 대부분이 네버랜드에 참여했던 베테랑이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는 것보다 몸을 추스르고 정비하는 게 1%라도 생존 확률을 높이는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외봉 로드…"
다가온 여명 1팀의 부팀장, 하연을 보고 지휘권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상황을 확인하고 지침을 정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래요. 마지막 문제는 미궁이라는 거군요."
"그게 못내 고민이었습니다. 뒤늦게나마 합류해주셔서 그나마 살 길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1구획의 시작점, 미궁. 그 문을 앞에 두고 하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로 이 격리된 문 덕분에 광란임에도 불구하고 미궁의 몬스터들이 역류하지 않는 거였지만. 지휘권자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100% 탈출할 거라 확신할 순 없지만… 그렇게 약속했던 30분이 지나자 지휘권자는 손뼉을 쳐 대원들의 시선을 모았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그 말에 공략대가 몸을 일으켜 진열을 가다듬고 미궁의 문에 손을 올린 순간― 미궁의 문이 멋대로 열리기 시작했다.
"전투 준비!"
지휘권자의 말에 따라 창칼을 겨눴고, 마침내 문이 열렸을 때,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예상했던 몬스터의 무리가 아니라, 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여, 여명 로드?"
냉정한 시선으로 공략대를 한 차례 훑더니, 곧 급조한 들것에 실린 구진하에게서 잠깐 시선을 멈췄다. 마치 무언가를 곱씹는 것처럼 눈을 감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수고했다."
그 말이 들릴 리 없건만, 지휘권자는 쓰러진 세검사의 표정이 한결 편해진 것 같다고 느꼈다. 공략대의 표정은 하나같이 믿기 어렵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검성…"
현존하는 모든 헌터 중 가장 뛰어난 검사에게 수여 되는 칭호… 수군거리는 술렁임이 커졌다. 문 너머, 미궁의 몬스터가 단 한 마리도 살아있지 않았으니까. 스틸레톤이었던 흔적을 보며 지휘권자는 침을 삼켰다.
―강태준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말없이 공략대를 지나쳤다.
"……!"
폐쇄 직전의 광란임에도 불구하고 하연은 한 점의 의문도 없이 강태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발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아연하게 공략대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당연하다는 듯, 쓰러진 구진하를 제외한 여명의 클랜원 전부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드리운 암운을 걷어냈다면, 찾아오는 건 새벽. 어슴푸레한 여명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공략대의 괴멸을 막는다는 조건이 충족됐다. ―십중팔구 공략대가 던전을 탈출했다는 뜻이 아닐까. 덕분에 30레벨로 올라 진화 조건도 달성한 모양. 강에서 빠져나와 몸을 털려하자 페리가 황급히 점멸을 사용했다. 이번에는 물세례를 맞지 않았다고 의기양양해 하는 녀석. 이런 상황에서조차 픽 웃음이 나왔다. 몸을 돌려 잠깐 강 너머까지 거리를 쟀다.
'이 거리라면…'
[진화 루트]
[비람의 길(飛嵐)] - 진화 가능
[겁화의 길(劫火)] - 진화 가능
[공허의 길(空虛)] - 진화 가능
메시지가 떠올랐던 대로 조건이 충족되어 있었다. 원래부터 가능했던 비람을 포함, 겁화와 공허까지. 어떤 진화를 택할지는 생각해 둔 바가 있다. 여왕을 만날 수 있었다면 좀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으니까.
'어차피 조건이 달성된 거라면 공략대가 괴멸할 일은 없을 테니까 일단 빠져나가서 여왕을 만나고…'
스노웰과 강훈의 싸움― 지금쯤이면 강태호도 1구획으로 넘어가는 데 성공했을 터. 제아무리 강훈이라도 스노웰을 쉽게 이길 수는 없을 테지만… 강훈은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겠지.'
그럴 거라 예상헀다. 내가 했던 걸 강훈이라고 못할 리는 없으니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놈 또한 스노웰을 유인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다. 광란이 시작되면 어차피 스노웰은 던전 밖으로 나왔을 테니까. 암담한 상황인 건 맞지만, 스노웰을 유인해서 강태호를 살렸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일단 던전 밖으로 빠져나가면 지금쯤 상황을 알아챘을 타 클랜이 기다리고 있을 터. 분명 고원도 움직였을 터… 스노웰과 함께 강훈이 빠져나오더라도 쉽게 도망칠 수는 없을 거다.
거기까지 예상했지만, 늑대가 딱 한 가지 놓친 게 있었다면.
―끝까지 영웅이었던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혈육으로서 책임을 지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보단 차라리 함께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거였다.
***
"거, 검공?"
초입에 선 강태호는 뒤늦게 찾아온 김주섭과 은자림을 보았다. 왜 아직 여기 있느냐고 의아해하는 듯한 반응에 강태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고, 초인적인 시력으로 강훈과 커다란 백사자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었다.
"니미럴…"
초입까지 온 건 좋았지만, 이대로 빠져나갔다가는 전부 개죽음이다. 강훈과 스노웰이 네버랜드를 빠져나왔을 때,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결국, 강태호는 옆머리를 긁적였다.
"시벌, 이게 자식 된 도리겠지."
작게 중얼거린 그는 어깨에 메고 있던 둘을 은자림과 김주섭에게 양도했다.
"먼저 가쇼. 그리고 이 둘도 데리고 나가 주고."
얼떨결에 주교의 시체와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백군태를 받아든 두 사람. 은자림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검공께서는…"
"거, 상관마쇼. 할 일이 남았으니까."
"설마 남으실 생각입니까? 대체 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반응에 강태호는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두 사람의 옷깃을 잡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아, 뭐 그렇게 됐수다."
발버둥 치는 둘을 차원의 틈새 너머로 집어 던진 강태호는 2구획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도리와 책임. 그리고 현실. 그는 냉정하게 저울질했고, 자신과 강훈이 둘 다 던전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차라리 여기서 폐쇄된 던전에 함께 남아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강훈의 기척을 느낀 강태호는 집어넣었던 패태검을 다시 꺼내 들었다.
"어디, 장사는 내가 다시 잘 지내 드려야지."
낄낄거린 강태호는 거대한 패태검을 어깨에 짊어 매며 강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
폐쇄 직전의 광란. 끝도 없는 몬스터가 던전 밖으로 나가기 위해 질주하는 상황 속에서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강태호는 끝내 도망치지 않았다. 그 선택을 멍청하다고 비웃을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늑대가 원한 상황은 아니었다. 설령 그와 함께 싸운다 하더라도 강훈과 스노웰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 ―최후의 최후,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늑대는 바랐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힘을.
[――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 선택에 따라 여태까지 쌓아온 업이 늑대를 휘감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