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11화 (111/407)

〈 111화 〉 #50 무너지는 네버랜드

"무너지고… 있어요."

흔들리는 광장. 그래도 데미지가 없지는 않았는지 스노웰이 비틀거렸다. 고통이 없다는 게 충격이 없다는 건 아니다. 백사자는 그 충격을 떨쳐내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고 헌터들은 재빨리 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제1회차― 최초의 공략. 그때, 네버랜드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었던 공략대는 낭패를 겪었다. 상식을 뛰어넘는 보스들과 까다로운 던전. 광장, 1구획이 던전의 끝이라 여겼던 공략대는 이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해 던전을 탈출하려 시도했었다. 하지만, 광란이 시작되자 몬스터들이 끝없이 몰려왔고 그 때문에 헌터의 상당수가 괴멸했었다. 겨우 도망쳐 미궁의 문을 열었을 땐, 다시 제모습을 찾은 스틸레톤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뒤늦게 쫓아온 2구획의 몬스터를 막기 위해 칠영웅이었던 강훈이 공략대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쳤고 이후 네버랜드는 최악의 던전이라 불리게 됐다.

당연히 네버랜드 공략은 조심스러워졌고 이후, 몇 년간은 조사와 탐색이 중심이 됐다. 그렇게 생겨난 불문율들과 알아낸 몇 가지 사실. 광란이 시작되면 반드시 던전을 탈출할 것. 그리고.

"―붕괴가 시작되면 1시간 이내로 폐쇄된다."

그 사실을 구태여 말로 뱉은 은자림이 고개를 돌렸고 거기엔 아직 싸우고 있는 산양과 늑대의 모습이 있었다. 알파를 저대로 두고 가도 되는 걸까? 백사자가 울부짖는 소리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다. 은자림이 입술을 짓씹었을 때, 미로의 경계에서 강태호와 백군태가 소리쳤다.

"빨리 와라!"

쿵- 쿵― 쿵―! 백사자가 달리기 시작한 순간, 은자림은 스노웰을 향해 창을 던지며 하연의 등과 무릎 뒤를 들어 올려 끌어안았다.

"서, 선자?"

마력이 담기지도 않은 창은 백사자와 닿아 너무 쉽게 떨어졌다. 창까지 포기하고 달려도 거리는 좁혀진다. 보폭의 차이 때문에 따돌리는 게 어렵다. 결국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백사자의 앞발이 그녀의 머리 위를 내려찍었으나, 어린 용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헛발질했단 것에 열이라도 받았는지 애꿎은 바닥을 몇 번이나 내리친 스노웰이 거친 숨을 흘리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넘겨!"

강태호의 말에 은자림은 안고 있던 하연을 떠넘겼고 경계 안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미로에 드리워진 안개는 감각을 교란한다. 오감을 믿을 수 없게 된 은자림은 눈을 감고 먼저 앞서 나간 헌터들이 남긴 마력의 잔향을 따라 달렸다. 광장에서 포효한 스노웰이 도망친 헌터들을 뒤쫓아 비좁은 미로의 경계를 비집고 들어갔고, 헌터와 사자의 추격전이 시작된 순간, 흔들리고 부서져 내리는 던전. 무너지는 광장의 벽. 폐쇄되는 네버랜드의 광장에 유일하게 남은 두 괴물이 서로를 향해 울부짖었다.

"―――!"

***

보이지 않는 탐욕―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공허. 늑대가 걸은 길의 갈래에서 새로이 얻은 힘이었다.

늑대는 자신의 싸움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회피를 기본으로 한 움직임. 그림자를 비롯해 필요할 때 적절하게 스킬을 사용하며 예측을 이용해 노련함까지 띄기 시작했으니까. 자신만의 방식을 만들어 낸 셈이다.

하지만, 여태껏 늑대의 싸움. 그 기저에 깔린 심리는 살아남겠다 혹은 죽이고 말겠다였다. 몬스터가 되었다고는 하나, 한때 사람이었던 늑대에게 그것은 의문이 되지 못했다.

워그와 스컬 울프 그리고 음영랑까지.

살의와 살기.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써먹으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처절한 싸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생존을 위한 사투. 그게 늑대의 싸움이었다.

―여태까지는 그랬다.

'먹어 치우는 자.'

여기서부터는 음영랑이 아니라 먹어 치우는 자로서 싸우겠다고 늑대가 다짐한 순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한없이 부풀어 올랐고 ―바람이 멎었다.

"―――!"

순간, 늑대가 산양에게 달려들었다. 여태 회피에 집중하던 늑대가 먼저 달려들자 산양은 당황했지만 금세 정신을 차렸다. 접근할 수만 있다면 유리한 건 오히려 자신이었으니까. 늑대의 행동은 자살 행위밖에 되지 않는다.

코앞에서 뛰어오른 늑대의 모습에 산양은 이를 갈며 손을 뻗었다. 늑대의 발목을 붙잡아 으스러뜨리려 했으나, 오히려 자신의 손이 사라지고 말았다.

"……!"

잘그락- 산양이 붙잡은 늑대의 발목, 족쇄의 사슬이 부딪치며 금속음을 냈다. 붉게 눈을 물들인 늑대가 한계까지 입을 벌렸고 산양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늑대의 발목을 잡고 들어 올린 산양은 자비 없이 늑대를 휘둘렀다.

바닥에 내리찍은 순간, 그림자 속으로 늑대가 사라졌다. 모습을 감춘 늑대는 배후에서 튀어나왔다― 그리 예상해 몸을 돌린 산양의 생각을 늑대는 한 번 더 읽었다. 바닥에서 뻗은 그림자가 산양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림자를 헤집은 산양이 뛰어올랐을 땐, 가죽과 살점이 먹히고 뼈가 드러나 있었다.

섬뜩한 붉은 눈이 그림자 속에서 보이는가 싶더니 산양을 쫓아 뛰어올랐다. 그것은 늑대가 싸우는 방식이 아니었다. 여태까지라면 거리를 두는 건 늑대가 아니라 산양이었으리라.

반사적으로 물어뜯긴 목을 짚은 산양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곧바로 떼어냈는데도 먹히고 말았다. 오싹한 위협을 느낀 산양이 마력을 일으켜 자신을 밀어냈다. 공중에서 떨어져 고개를 든 산양은 자신을 쫓는 늑대와 저 너머, 아지랑이를 일으키는 무언가.

그 무언가가 자신을 본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보이지도 않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도 자신을 먹어 치우겠다고 입맛을 다시는 듯한 착각…….

"……!"

잠깐 한눈판 사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림자가 산양을 붙잡았다. 늑대가 자신을 물어뜯으려 달려들자 산양은 팔을 휘둘렀다. 늑대는 피하는 대신 턱을 벌렸고 산양은 늑대의 턱을 부쉈고 늑대는 산양의 팔을 먹어 치웠다. 위턱밖에 남지 않은 늑대와 팔꿈치까지 먹힌 산양이 서로를 향해 살의를 드러냈다. 대마력. 산양이 가진 심층의 회색 마력이 끌어올라 타오르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검은 불꽃과 흑무. 발 아래는 그림자. 온갖 것에 신경을 쓰고 있던 산양은 눈치채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이미 자신을 집어삼키고 말았단 것을.

"……!"

눈을 부릅 뜬 산양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하지만 그것은 그리 무르지 않다. 완전히 집어삼켜진 산양이 몸부림치나, 서서히 먹혀간다.

'공허.'

그 속에서 비명을 내지르려던 산양은 그러지 못했다. 이미 목덜미를 물어뜯겨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피는 흐르지 않는다. 그것마저 먹혀버렸기 때문에.

―집어삼키고 먹어치워간다.

휘젓던 손이 사라지고 나서야 산양은 마력을 끌어올려 가까스로 그 힘을 밀어낼 수 있었지만, 그 때는 이미 산양이라 부를 수 없게 됐다. 움직이려던 산양은 또 그러지 못했다. …다리가 먹혀버려서.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사지가 먹혀 너덜너덜, 엉망이 됐다. 산양은 언젠가부터 자신이 바닥에 드러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마치 수십 마리 늑대 무리에 유린당한 것만 같다. 산양이 기침하며 피를 토하려 했지만, 드러난 목덜미의 상처로 피가 흘러나와 그것도 하지 못했다. 높은 체력이 기어이 목숨줄을 잇고 있었지만 그게 고작이다. 시간이 있다면 재생으로 회복해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뜨거운 무언가가 머리에 닿았을 때 산양은 삶을 포기했다.

"―――."

흔들리고 무너져내리는 던전에서 늑대는 낮게 울었다. 흐려져 가는 시야. 최후의 순간, 산양이 본 것은 붉게 빛나는 늑대의 눈이었다.

―그리고 늑대는 망설임 없이 산양을 먹어 치웠다.

***

"후우우우!"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온 공략대가 한숨을 쉬었다. 스틸레톤이 쓰러진 미궁을 빠져나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부서진 푸른 뼈다귀가 흔들리는 미궁의 길을 막는 유일한 장애물이었다. 무사히 던전을 탈출했다는 사실에 지휘권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언제 나오려는 거지."

던전의 경계가 희미해져 간다. 나오기 직전, 분명 던전이 흔들리는 걸 느꼈었다. 붕괴하고 있다는 뜻… 머잖아 던전이 닫히리라. 그에 지휘권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왜…'

검성― 여명의 로드는 도대체 왜 던전 내부로 들어갔을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걸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공략대를 습격한 괴인들의 모습이었다. 암운을 드리웠던, 정작 모습은 보지도 못한 마법사와 수 미터나 되는 로브를 뒤집어쓴 거인. 그리고 언뜻 보았던 창염이 타오르는 갑주를 입은 대검의 괴인.

'대체 누구이길래…?'

생각해봐야 알 수 있는 문제는 아니리라. 고개를 저은 지휘권자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역시 봉쇄조는 남아있지 않다. 몇몇 헌터의 얼굴은 보였지만 원래 있어야 할 봉쇄조는 아니었다. 일단 공략대를 추스르고 상황을 보고하는 게 먼저라 여긴 지휘권자는― 딱딱하게 굳었다.

"……!"

아까 그가 떠올렸던 창염의 갑주. 대검의 괴인이 던전의 경계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친 공략대를 마력으로 짓누르고 그는 천천히 걸었다. 막아야 한다는 생각은 했으나, 어떻게?

'역시 검공은…'

저 괴인에게 당한 게 아닐까. 상처하나 없는 모습. 압도적인 마력이 짓누르는 압박- 현실적으로 그를 막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괴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숨 막히는 압박이 사라졌다.

…한심하게도 살았다는 안심부터 들었다.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괴인. 지휘권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대체 던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

[바포메트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EXP 317933 / 463579]

―Lv.15 까지 상승하고도 경험치가 30만이 되었다. 달성 조건이 바포메트를 쓰러뜨리는 것이었는지 한계에 걸리지 않고 레벨이 상승했다.

아무튼, 경험치의 상승 폭까지 생각해보면 바포메트 한 마리가 200만이 훨씬 넘는 경험치를 획득했다는 뜻이다. 말도 안 되는 경험치에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네버랜드의 구획보스임을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리라.

'먹어치우는 자.'

도망치고 도망쳐서 기회를 노리는 약자의 싸움이 아니라 물어뜯고 늘어지는 치열한, 대등한 싸움이었다. 강적을 먹어치웠다는 사실. 네버랜드의 구획 보스. 감히 대항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처형자를 홀로 쓰러뜨렸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젠 스스로 강하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됐다.

'…….'

한 박자 늦게 실감이 들어 늑대는 고개를 꺾었다. 예전, 괴물 늑대를 쓰러뜨리고 지리산을 정복했을 때처럼 희열이 차올랐다.

"―――!"

무너져가는 광장에 홀로 남은 늑대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렇게 한참을 울부짖던 늑대는 눈을 감고 숨을 가다듬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백사자는 헌터들을 쫓고 있을 터. 그리고 그중에는 페리도 있다. 강훈의 행방도 알 수 없는 지금, 기쁨에 젖어있을 시간 따위는 없다. 스노웰 혹은 강훈. 혹시라도 페리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늑대에게 다시 위기감을 불러왔다. 폐쇄 직전의 광란, 던전을 탈출해야만 비로소 올바른 마침표를 찍을 수 있으리라.

―산양을 집어삼킨 늑대가 사자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