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50 무너지는 네버랜드 (2)
백사자는 여전히 공략대를 쫓고 있다. 그 집념에 은자림은 피로를 감추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다행한 점은 안개가 깔려있다는 것. 감각을 교란하는 안개는 놈에게도 유효한 모양인지 여태 들키지 않고 도망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미로의 초입. 거대한 미궁의 문이 보이리라. 조금만 더 가면 스노웰만 따돌리고 네버랜드를 탈출할 수 있을 거라 여겼을 때, 그녀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
위화감. 그 정체는 소리였다. 사각사각, 무언가를 갉아먹는 것만 같은 불쾌한 소음, 노이즈.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은자림이 눈살을 좁혔다. 만약 지금 청각이 교란된 게 아니라면… 혹시나 하는 심정에 확인을 위해 다가간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쓰러진 두 사람의 시체였다.
"옥연 로드…"
침중한 어조로 은자림이 중얼거렸다. 미로에서 여명과 합류한 그녀와는 달리 공략대와 합류하겠다던 김주섭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주교의 시체와 함께 널브러져 있었다. 시체를 갉아먹고 있던 땅굴벌레는 키익거리며 은자림을 위협했고, 그녀는 뛰어오르는 땅굴벌레를 짓밟아 짓이겼다.
"선자, 뭐 하는 거요?"
한시가 바쁜 지금, 은자림이 꾸물거리자 강태호가 의아한 듯 물었으나 두 사람의 시체를 보곤 마찬가지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망할."
―싸늘하게 얼어붙은 몸. 아무리 혼자라고 해도 뛰어난 궁수인 옥연의 로드가 공략대가 선행한 미로에서 죽었을 리 없다. 그 정도 실력자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혼자 보내지도 않았을 테고. 무엇보다 가슴을 꿰뚫은 검상이 그 증거였다.
"…시벌."
신전의 주교. 옥연의 로드. 대구를 이끄는 두 사람이 허망하게 숨을 거뒀단 사실에 강태호는 이마를 짚었다. ―적어도 강훈이 우리보다 먼저 빠져나간 것만큼은 확실하다. 두 사람의 시체를 업으려던 강태호는 천장이 무너져 내려 둘을 깔아뭉개자 이를 갈았다.
"……!"
쾅-! 울분을 참지 못하고 팔을 휘두르자 벽이 무너져내렸다. 붕괴는 더 심해지고 있다. 은자림은 그의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꾸물거리다가 탈출하지 못하게 되는 게 두 분이 원하시는 건 아닐 거예요."
"뭘 안다고…"
뭘 안다고 지껄이느냐. 강태호는 그 말을 내뱉기 전에 숨을 골랐고, 고개를 숙였다.
"…후. 그렇겠지. 미안하오. 얼른 갑시다."
은자림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이러고 있는 순간에도 백사자는 쫓아온다. ―그렇게 달리고 달린 끝에 두 사람은 미궁의 문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친…"
폭삭 무너져 내린 천장이 잔해가 되어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잔해 위에 앉아있던 강태준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탈출했다. 이젠 우리 차례야. 혹시 남은 사람은?"
"없수다. 우리가 제일 늦었어."
그에 강태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강태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궁의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무너진 잔해는 문을 가로막고 있는데 어떻게 탈출한 걸까? 그 의문은 지친 요정용을 보자 곧바로 사라졌다.
"뀨우우~"
―알파의 동료. 강태호는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태준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헤롱거리는 요정용과 시선을 마주했다.
"가능하겠나?"
"…뀨우우우~"
포션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요정용에게 포션이 듣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그 때, 기어코 쫓아온 백사자가 그들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망설임 없이 달려드는 괴물을 본 셋의 손이 이어졌고―
"―――!"
―다음 순간, 미궁의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문 너머에서 분하다는 듯 사자가 울부짖었다. 그리고 이젠 정말 지쳤다는 듯, 비틀거리던 요정용이 은자림의 어깨 위에 올라타더니 색색 고른 숨을 뱉으며 잠에 빠졌다.
"허, 신통방통하네."
혼자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이동할 수 있다니… 강태호는 절레절레 고개 저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여태 알파가 도망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 요정용이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은공. 수고하셨습니다."
어차피 듣지도 못할 텐데 구태여 감사 인사를 한 은자림이 고개를 돌렸다. 미궁의 문밖에서 놈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 ―놈이라면 잔해를 밀어내고 문을 여는 데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 터. 셋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죠."
미궁― 얼마간을 달렸을 때, 부서진 뼈다귀들이 제멋대로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던전이 흔들려서가 아니다. 복구. 머잖아 되살아나 몸을 일으키리라. 그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셋은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아직 부서져 있는 스틸레톤을 경계한 게 아니다. 여기는 미궁의 끝. 가까스로 문을 넘었을 뿐이지만, 초입이라면? 먼저 부서졌던 스틸레톤은 그만큼 빨리 복구되었을 터. 혹시라도 선행한 공략대가 스틸 자이언트를 마주했다면?
자연스레 그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순간, 미궁의 문이 부서져 날아갔고 모습을 드러낸 백사자가 막 복원되어가던 스틸레톤들을 짓밟으며 맹렬히 쫓아온다. 미궁의 천장에 머리가 닿는데도 멈추지 않는다. 덕분에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지만 무시무시한 집념이었다.
앞에서 다가오는 실루엣― 후퇴하는 클랜원들에 눈살을 찌푸렸다. 합류하긴 했지만, 그들이 후퇴한 이유. 무수한스틸레톤들이 쫓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중에서 유독 커다란 푸른 거인.
"…스틸 자이언트."
강태호와 강태준이 검을 고쳐잡았다. 두 사람이 달려들자, 스틸 자이언트가 팔을 뻗었지만, 두 형제가 스틸 자이언트의 양 발목을 쳐내는 게 먼저였다. 마력이 담기지 않아 베는 게 아니라 둔기를 휘두르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균형을 잃고 스틸 자이언트가 쓰러지자 그 충격에 쫓아오던 스틸레톤들이 휩쓸렸다.
그래봤자 끝도 없이 몰려든 놈들을 지나가는 건 역부족이다. 그리고 우렁찬 포효와 함께 쫓아온 스노웰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에는 스틸레톤의 무리. 뒤에서는 백사자가 울부짖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 강태호가 달리며 스틸레톤 하나의 머리를 단숨에 날려버리고는 기우뚱 쓰러지려는 스틸레톤의 손을 붙잡았다.
"따라와라!"
스틸 자이언트가 일어나기 전에 길을 열어야만 한다. 마치 삼절곤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틸레톤을 휘두르고, 부서지면 새로운 스틸레톤을 휘두르며 길을 뚫었다. 일견 순조로워 보이지만, 그럴 리 없다. 시간이 지체된 만큼 백사자가 바짝 쫓아왔으니까. 아까 억지로나마 쓰러뜨렸던 스틸 자이언트도 일어나고 있었고. 뒤쫓아 온 백사자의 거대한 발이 그림자를 드리운 순간, 요정용이 힘겨이 눈을 뜨고 울었다.
"뀨우우우…"
―마치 이 와중에 무언가를 반기기라도 하듯.
***
미로의 안개는 늑대에게 방해물이 될 수 없다. 탐지로 공략대를 찾아 뒤를 쫓았을 때, 닫힌 미궁의 문 앞에 있는 건 커다란 백사자 한 마리뿐이었다.
'공략대는…'
페리의 점멸로 문을 넘은 모양. ―붕괴하는 던전에서 백사자가 잔해를 쳐부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뚫긴 힘들어.'
공허를 사용한다면 먹어 치울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저 커다란 문을 집어삼키는 건 시간이 걸린다. 그 전에 던전이 무너지고 말리라. 은신한 상태를 유지하며 백사자의 몸 위에 올라탄 순간, 문 앞까지 도달한 스노웰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그림자 속으로 숨어든 나를 찾는 건 불가능했는지 연신 갸웃거리던 스노웰은 앞발을 들어 올렸다.
쾅- 쾅― 쾅―!
백사자가 발을 휘두를 때마다 문이 휘청거렸고, 고작 세번의 발길질만에 문이 부서져 날아갔다. 넓게 탐지를 펼쳤을 때, 스틸레톤이 다시 복구되어 꿈틀거리는 걸 알 수 있었다. 잠깐 고민하던 사이, 스노웰은 비집은 미궁을 비집고 기어코 공략대를 따라잡았다. 그 집념에 혀를 내두르다가 무너지는 스틸 자이언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여명의 클랜원― 그리고 은자림의 어깨 위에 페리가 앉아있는 것을 보며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일렁이는 던전의 경계가 보였다. 당장에라도 닫힐 것처럼 희미한 경계가 보였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할 때, 백사자가 앞발을 내리찍었다. ―스노웰의 공격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림자를 펼쳐 눈을 가렸다. 제아무리 바위가죽이 뛰어난 스킬이라고 해도.
'눈까지 단단해지는 건 아니야.'
영량을 펼쳐 그림자를 덮자 공허는 백사자의 두 눈을 먹어 치웠다. 고통은 없겠지만, 시야가 어두워졌다는 불안감에 몸을 비튼 스노웰의 앞발은 공략대가 아니라 스틸 자이언트에게 적중했다. 무시무시한 힘에 단번에 나가떨어져 벽에 부딪혔고, 공략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아갔다.
'됐어.'
일자형 길이니, 눈이 망가졌더라도 쫓아오기는 할 테지만, 주춤할 수밖에 없을 거다. 스노웰을 먹고 싶다는 탐욕이 있었지만, 지금 급한 건 공략대뿐만 아니라 나 또한 마찬가지.
더는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다. 그림자에서 뛰쳐나와 스틸레톤 사이를 달렸다. 강태호와 강태준이 길을 뚫는 와중, 스틸 자이언트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뛰어올랐다. 발판을 밟고 또 밟아 스틸 자이언트의 어깨뼈 위에 올라섰다. 내 존재를 느낀 녀석이 팔을 휘저었고, 그 전에 돌풍을 터뜨려 빠져나왔다. 쫓아오려던 푸른 거인의 경추는 반쯤 사라져있었다. 결국 머리를 지탱하지 못해 기우뚱 기울더니 무너지듯 쓰러졌다.
'죽지는 않았겠지만…'
이제 쫓아오지 못할 터. 달리는 은자림의 어깨 위, 피곤한 듯 힘겹게 눈을 뜬 페리와 눈을 마주쳤다. 녀석에게 느껴지는 마력이 바닥난 걸 보아하니 정말 열심히 도운 모양. 새삼 녀석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빨리! 빨리 들어가!"
강태호와 강태준의 활약으로 공략대는 마침내 던전의 경계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당장 닫히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희미해진 틈새. 강태호는 들고 있던 스틸레톤을 집어 던지더니, 클랜원의 뒷덜미를 잡아 들었다.
"어, 어?!"
"시간 없으니까 착지는 알아서 해라!"
마치 공이라도 던지는 것처럼 하나둘 던지기 시작한다. 비명소리가 이어지고 그렇게 전부 내보냈을 때, 강태호는 잠깐 뒤를 돌아보는가 싶더니, 천장이 완전히 폭삭 무너져내리자 이를 악물고 희미해진 던전의 경계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자마자 던전의 경계는 단 1초의 지체도 없이 꺼지듯 사라졌다. 결국, 네버랜드의 천장이 무너져내리자 사자는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
***
강태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뒤돌아보았을 땐, 던전이 완전히 닫혀 있었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이젠 스틸레톤이건 스노웰이건 간에 아무것도 나오지 못한다. 네버랜드 공략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단락됐다. 강태호는 고개를 꺾고 하늘을 올려다보다 한숨과 함께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시벌."
―미궁 안에 아버지, 강훈은 없었다. 김주섭의 죽음을 생각건대 역시 진작에 탈출한 것이리라. 그에 강태호는 이를 갈았다.
"다들 괜찮나?"
강태준의 물음에 클랜원들이 서로를 둘러봤고,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이들을 제외하면 탈출하지 못한 사람은 없다. 전부 무사함을 확인하자 강태준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곤 강태호에게 다가갔다.
"왜?"
뭐 잘못된 거라도 있었나? 되묻는 자신을 빤한 눈으로 보며… 아니, 아니었다. 그는 형의 시선이 자신이 아니라 묘하게 비껴간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 시선을 따라간 강태호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시벌? 이게 뭐여."
그에 강태준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나와라."
곧 반 토막 난 검을 쥔 강태준이 차갑게 말했다.
"아니면 꺼내지고 싶나?"
강태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던 공략대는 그가 어떤 이름을 꺼내자 마른 침을 삼켜야만 했다.
"알파."
강태준의 시선이 향하는 곳― 거기엔 강태호의 그림자가 불길하게 일렁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