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 #62 환영의 나비 (3)
이미 늑대는 코앞까지 도달해있었다.
영창 하는 말소리. 물론 마법을 준비하고 있단 사실은 알고 있다. 설령 대마법이라 한들 적중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허나, 환영의 나비에게 그 말은 통용되지 않는다. 그녀의 대마법은 조금 다르니까.
영창은 가속에 가속을 더했고 늑대도 박차를 가했다. 탄력으로 달리는 중, 무수한 가시를 발출하나 자색 마력이 벽이 되어 막아섰다.
그림자와 촉수를 채찍처럼 휘두르며 수많은 구현체의 마법을 쳐내며 늑대는 기어이 돌풍을 터뜨렸다.
그 순간, 바람이 되어 날아간 늑대의 턱이 한계까지 벌어졌고 환영의 나비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늑대를 쫓지 못한 마법들은 배후에서 폭발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나비가 날갯짓해 늑대를 뒤쫓았다.
흑무를 덮고 기어이 마력의 벽을 뚫어낸 늑대. 그림자는 곧바로 환영의 나비를 꿰뚫었다.
고통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까.
격정을 띠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환영의 나비는 입술을 달싹였고 늑대는 눈을 부릅떴다.
여기서 끝을 내야 한다- 하지만 공허를 부르는 것보다 살짝 빠르게. 그림자가 찢어발기는 것보다 빠르게 펼쳐진 마법이.
아직 남아있는 그녀의 구현체들이 마력을 두르고 실체 없는 그림자를 붙잡아 늘어지고 말았다.
끈질기고, 간절함조차 느껴지는 그 행동은 환영의 나비에게 절실한 미세한 시간을 벌어주는 데 성공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환영의 나비는 외부의 상황 따위는 깨닫지 못했다. 자신이 꿰뚫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내부의 격정과 감정에 사로잡힌 나비는 극한의 집중을 발휘하여 마침내 대마법의 마지막 주문을 외웠고.
―세계가 개변했다.
벌어진 늑대의 턱에 씹힌 것은 자색 나비의 날개. 그것들이 입안에서 제멋대로 폭발하고 날갯짓하고 날붙이가 되어 늑대를 엉망으로 만들어갔다.
턱이 부서지고 잘리는 순간, 불렀던 공허가 이제야 뒤늦게 찾아와 자색 나비를 모두 먹어 치웠다.
주변을 둘러본 늑대는 결국 그녀의 대마법이 발해졌음에 이를 악물었다.
결국, 환영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허상을 구현화 하는 그녀의 스킬이 있는 이상, 대마법은 현실이 되고 만다.
개변한 세계는 무의 공간. 이 순간, 그녀는 세계 하나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비록 무수한 나비가 무언가를 바라듯 날갯짓할 뿐인 허무한 공간이지만, 이 모든 게 구현된 또 다른 현실.
개변한 세계가 현실이 되었듯 나비 또한 구현된 것이리라. 그 말인즉, 그 나비의 숫자만큼 환영이 벌어지고 현실이 된다는 것.
이 거짓에서 벗어날 방법은 오로지 하나.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나비를 죽이고 빠져나가는 것뿐이리라.
―환영의 나비의 손길이 그녀의 딸에게 닿기 전에.
***
스퀘어 마스터 셋의 대마법이 발출하고 나서야 역병은 가까스로 물러났다. 군세의 진격은 멈췄고 테헤란은 완전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부서진 도시 위 마력을 소진해 기진맥진한 마법사들 사이에 홍유리 또한 마찬가지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퍼부은 것 같은데…
여기서 쓰러질 거라 생각했다. 한계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여러 번 벽을 맞닥뜨렸음에도 불구하고 나아갈 수 있었다.
그건 묘한 기분이었다. 한계가 조금씩 멀어져가는 기분. 마치… 벗어나는 것만 같았다. 정신 고갈의 여파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충분히 견딜 만 하다.
홍유리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여태 보던 것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시선은 돌아가 스퀘어의 가장 높은 지붕을 조심스레 흘겼다.
…어느새 그녀는 사라진 뒤였다.
지쳐서 헛것이라도 본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런 존재감을 착각할 리 없다. 만상의 주인은 분명 그곳에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멍하니 올려다보던 홍유리는 누군가의 손이 어깨를 짚자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수고했다. 그동안 많이 늘었구나."
"……그래도 대마력은 없는데요."
자신의 칭찬에 퉁명스레 대꾸하는 모습에 아스터는 인자하게 웃었다.
"너는 그리 생각하고 있구나."
"……사실이니까요."
어쩐지 치기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에 홍유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찌 됐건, 지금은 다음을 준비해야 할 때. 물론 그 일은 이미 스퀘어 소속도 아닌 자신이 왈가왈부할 게 아니다.
대마력… 사실 별것도 아니다. 그걸 얻는다고 역병과 질병을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수많은 마법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놈은 이번에도 죽지 않았다.
되려 우리를 비웃듯 유유히 사라졌을 뿐. 놈들을 죽이는 건 역시 인류에게 불가능한 건 아닐까…
아니, 그렇지 않다. 홍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세 번이나 대마법을 견뎌낸 괴물도 쓰러뜨리지 않았나. 무너지지 않는 화산의 의지. 늑대와 함께 쓰러뜨렸던 괴물을 떠올린 홍유리는 숨을 들이켰다. 그래. 역병과 질병도 상처는 입는다. 놈들 또한 무적은 아니라는 소리.
그렇다면 언젠가는 쓰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발버둥이나 발악 같은 게 아니라…
정말 오랜만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헤집는 것처럼 몇몇 마법사가 황급히 달리고 있었다.
'퍼플 스퀘어?'
자색 마법사들이 무언가를 두려워하듯 달리는 그 모습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는 분명 알파가 잠입해있는 곳이었으니까.
***
"……."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상처투성이가 된 몸. 조금만 늦었더라면 죽는 건 자신이었으리라. 각혈한 아멜리아는 입가를 닦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격동하는 심장과 격정하는 감정을 억누른 아멜리아는 다시금 환영의 나비로 되돌아갔다.
결국, 승리를 취한 건 자신이었다.
구현화한 또 하나의 세계.
그건 단순한 대마법이 아니다.
그녀가 가진 또 다른 스킬, 환영 지배의 자색 나비를 기반으로 구성된 세계는 스킬과 마법이 얽힌 또 다른 영역에 걸쳐져 있다. 사용자인 환영의 나비 또한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마법 아닌 마법. 심지어 그걸 구현화하기까지 했으니까. 절대 벗어날 수 없으리라.
…당연하다. 이건 그녀를 죽이기 위해 준비한 마법이었으니까.
환영의 극의.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를 쏟아부었으니.
또 하나의 세계에서 격리된 채 살아가거나 혹은 죽게 되리라. 이제 두 번 다시 마랑을 볼 일은 없다. 비록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아가일의 원수를 갚은 셈이다.
환영의 나비는 쓰러진 아넬라를 향해 걸었다.
그래. 이제 두 번 다시 마랑과 마주칠 일은 없으리라.
한시라도 빨리 아넬라를 숨기고 다시 소환진을 그리고…
무거운 걸음으로 딸의 앞에 선 환영의 나비는 치솟는 울혈을 뱉지 않으려 입을 막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와 흐르고 있었다.
몸 상태는 최악… 그래도 가만히 있을 시간 따위는 없다. 아넬라에게 다가간 환영의 나비는 흐릿한 시야로나마 그녀가 정신 차렸음을 알았다.
"…어머니?"
메마른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떨림이 전해져온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환영의 나비는 아주 잠깐 아멜리아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나에게 소중한 것이 생겨선 안 된다. 그게 너여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너마저…
감정을 죽인 아멜리아는 다시 한 번 마법사가 되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무표정을 유지한 채 손을 들어 올렸다. 걷기조차 힘들었으나 마력은 남아 있다. 자색 사슬은 순식간에 아넬라의 전신을 포박했다.
저항하기 위해 마력을 일으키던 아넬라는 이내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무리였다. 자신으로선 엉망진창인 어머니에게도 이길 수 없다. 그래. 차이는 그렇게나 극명하다. 알파조차 역시 어머니에겐 닿지 못했던 모양…
"…절 죽이실 건가요?"
그럴 리 없다… 그 물음에 답하는 건 환영의 나비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아넬라의 목소리를 그저 흘려들었다.
콕콕,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것만 같았다.
마랑에게 당한 상처도 아프지 않았건만, 이것만큼은 견디기 힘들었다.
"이번에도… 결국 어머니께선…! 차라리 절!"
울먹이는 목소리와 거친 몸부림은 조여드는 사슬에 그치고 말았다. 완전히 체념한 아넬라는 고개를 떨구었고, 그보다 오래전에 체념했던 환영의 나비는 보이지 않게 입술을 짓씹었다.
재능… 그게 내 죄였다.
차라리 마법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아니, 재능이 없었더라면.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눈에 들고 말았다.
그녀의 눈에 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면… 이렇게 엇갈리지 않았을 거다. 어쩌면 평범한 삶을 구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결국 모든 건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을 뿐.
그렇다 해도 새삼 바뀌는 건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해야 그녀의 섬을 무너뜨리겠다는 하잘것없는 협박뿐이었으니까. 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차라리 전부 놓아버리고 그녀의 뜻대로 하는 것도 이젠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럴 순 없다.
그랬다간 여태까지 해 온 일들이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 테니.
굴하려면 에드가 죽기 전에 그랬어야 한다.
…그래. 차마 그녀가 이끄는 조직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결국 이렇게 엇갈리고 말았다. 엉키고 얽혀서 풀 수 없을 만큼이나 꼬이고 말았다.
체념한 딸을 데리고 어미는 하염없이 걸었다.
걷고 또 걸어 성 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실수는 없었을 텐데… 마법은 성공했고 거기서 끝이었을 거다.
그랬을 텐데…
환영의 나비는 허탈히 웃었다. 그 붉은 눈에 비치는 것은 여전히 자신이었으니까.
환영의 극의. 현실로 구현화한 세계조차 마랑을 잡아두진 못했다는 거다.
'―묻겠다. 배신했나?'
그 물음에 답하는 편이 좋았을까. 아니, 그럴 순 없다. 어찌 됐건 아가일을 죽인 건 마랑이었으니까.
하지만 조금 솔직해져 보자면… 조금 부럽기는 했다.
그녀에게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앞만 보고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제 환영의 나비에게 그럴 기력은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여기서 마랑에게 물려 죽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묶인 아넬라를 보고 아멜리아는 안심할 수 있었다.
이 아이에겐 자신과 아가일 같은 재능은 없으니까.
지금 여기서 내가 죽는다면 적어도 아넬라만큼은 이 지독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다가오는 마랑을 보며 아멜리아는 모든 걸 놓아버렸다.
그 환영에서조차 벗어났다면, 어차피 이제 마랑에게 이길 방법 따위는 남아있지 않으니까.
포기하고 천천히 다가올 끝을 기다리던 아멜리아는 결국, 절망하고 말았다.
어느새 자색 도시가 검게 물들고 있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