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63 굴레
환영의 세계에 갇힌 늑대는 그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거나 어쩌면 억겁의 세월이 흘렀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인식할 수 없는 이어짐 속에서 늑대는 온갖 것들과 싸워야만 했다.
자색 나비가 날아다니는 세계.
나비는 때때로 괴물이 되었으며, 때로는 날붙이가 되어 늑대를 위협했다. 마법이 되기도 했으며 알 수 없는 미지가 되고 때로는 세계 자체의 풍경이 변하기도 했다.
무의 세계는 일그러져 빙하가 되고 사막이 되더니 빙글빙글 돌아 거꾸로 된 세계를 만들었다.
중력이 반전하고 달이 가라앉고 정신 차려보면 깊은 심해에서 처음 보는 괴물과 마주하고 있었다.
차분히 시간을 세고 있던 늑대는 어느 순간부터 그러지 못할 만큼 급박함을 느끼고 있었다.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갔으니까. 무수한 환영이, 세계 그 자체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다가오는 압박. 그 속에서 누가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전부를 먹어 치우는 동안, 처음엔 올곧고 굳셌던 정신조차 흐려져 구분할 수 없고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나마 그를 붙잡고 있는 건 스스로를 이겨냈다는 증거인 극기와 여태 지나왔던 시련이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이라면 언젠가 마모된다.
녹슬고 썩어가며 부패하고 만다.
영겁의 환영 속에서 그건 늑대라도 예외가 되진 못했다.
서서히 절망이 드리워지며 환영은 포기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여기서 주저앉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쓰러지고 포기하면 편해질 수 있다고.
늑대는 그 말에 동의했다.
사실, 그 말에 틀린 건 없으니까.
이 세상에 떨어지고 셀 수 없이 생각해왔던 답이었다.
어차피 멸망할 세계. 여기서 쓰러지고 조용히 죽는다면 그것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 고통 없는 죽음을 맞을 수 있다… 거기에 생각이 미쳤을 때, 그건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유혹이 되어 늑대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늑대는 무너지고 있었더랬다.
난데없는 세계에 떨어져 좌절이 차오르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라 조금 더 먼 과거에.
홍유리에게 죽을뻔한 경험을 했을 때, 처음으로 그 울분이 터졌었다.
그냥 다 포기하고 놓아버릴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좋게 받아들이려 해도 갑작스레 죽음의 위기를 수차례나 겪어야 했고 인간이라는 정체성마저 흔들려갔다. 마치 나만이 고립된 것만 같은 그런 암담함.
그 속에서 간신히 늑대를 붙잡았던 건 우습게도 늑대를 끌고 온 장본인이었던 시스템의 말이었다.
……그럴 리가 있나.
늑대는 으드득 이를 악물었다.
흐려진 자아와 의지에 따라 주춤했던 공허가 다시금 일어났다.
모든 건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선택하고 행동하고 여기까지 온 건 다름 아닌 늑대 자신이었다.
여기서 주저앉을 거라면 진작 무너졌어야 했다.
늑대는 스스로 좌절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 불굴에 반응하듯 공허는 점점 더 부풀어갔다.
끝없이 부푸는 공허―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먹어 치우고 말겠다는 다짐이 다시금 새겨진 순간, 늑대의 의지는 다시 한번 담금질 되어갔다.
―환영은 다시 자색 나비로 변했고, 자색 나비의 집합체인 환영의 세계는 늑대의 붉은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두 눈에 담긴 것은 결의.
먹어 치우는 자로서,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에 반응하듯 공허는 끝없이 부풀어 이윽고 거짓된 세계를 덮을 만큼이나 거대해져 환영의 세계를 이룬 모든 나비를 집어삼켰다.
***
환영의 세계를 먹어 치우고 빠져나온 늑대에게 보인 건 핏자국뿐이었다. 예민한 후각으로 환영의 나비의 피라고 알아차린 늑대는 그 피가 아직 마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억겁 같은 게 아니다. 실제로는 10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으리라.
'지금이라면…'
아직, 쫓을 수 있다.
어디로 갔는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저 멀리 보이는 나비의 성을 향해 늑대는 달렸고, 머잖아 환영의 나비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사슬에 묶인 아넬라는 체념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환영의 나비를 앞에 두고 내려온 늑대는 붉은 안광을 빛냈다.
순간, 환영의 나비의 두 눈에 많은 감정이 스쳤다.
복잡해 읽을 수 없는 감정… 그 감정을 보았을 때, 늑대는 걸음을 멈췄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색 도시가, 퍼플 스퀘어가 검게 물들고 있었으니까.
칠흑으로 물들어가는 도시. 그 앞에서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결국 그녀가 오고야 말았으니까.
이단의 탕아들― 변절자들의 수장. 다섯 번째… 아니, 최초의 스퀘어인 블랙 스퀘어의 마스터인 만상의 주인이.
또한, 이 세상에 마법을 퍼뜨린 시조가.
***
검은 밤을 연상시키듯 자색 도시를 어둡게 물들이며 나타난 소녀가 걷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 사실에 환영의 나비, 아멜리아는 좌절해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아멜리아에게 있어선 더 없는 절망이었으니까.
마법을 퍼뜨린 시조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들은 한 줌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원치 않았으니까.
―누구도 그 진의를 읽을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불가해.
거리 따위는 그녀에게 조금의 걸림돌도 되지 못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모습. 그녀는 드물게 미소 띤 채 다가왔다. 마치 무척이나 기분 좋다는 듯이.
콧노래를 부르며 뒷짐을 지고 종종거리며 걷는 모습은 그 외견과 맞물려 천진난만하게 보여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허나, 늑대는 침을 삼켜야만 했다.
혜견으로 한 걸음 나아간 그의 눈으로 보아도 그녀의 실체를 읽을 수 없었기에.
단순히 읽을 수 없는 게 아니라 비틀리고 일그러져있다. 봐선 안 될 것을 본 듯한 어지러움에 늑대는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차라리 지금 환영의 나비만이라도 죽여야만 한다. 움직이려 했으나 움직이지 못했다. 어느샌가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죽이면 안 돼. 그건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
지척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짓눌린 늑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가는 것이 전부였다.
허나, 먹어 치우겠다는 의지가 충만해졌을 때, 일어난 공허는 늑대를 속박하는 미지를 집어삼켰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
그제야 늑대는 이 힘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특별한 힘 같은 게 아니다.
그저 마력. 한없이 무한에 가까운 마력이 늑대를 짓누르고 있을 뿐.
환영의 세계? 구현화 된 세계라도 정말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리 없다. 환영의 나비가 만든 교묘한 가짜 같은 게 아니다. 마치 세계 그 자체가 누르는 듯한 압박이었다.
―정말 그럴 리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늑대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마치, 삼라만상이 자신을 거부하듯이.
그게 그녀가 만상의 주인이라 불리는 이유였다.
그제야 늑대는 자신이 얼마나 안일했는지를 깨달았다.
처음부터 스퀘어에 와서는 안 됐다. 은신? 비가시화? 그녀에게 그런 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차라리 환영의 나비가 영입되는 걸 감수해야만 했다.
마냥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득한 차이. 평행 세계, 종말을 맞이한 소설 속에서조차 만상의 주인은 쓰러뜨리지 못했었는데.
―멋대로 지레짐작했다.
스퀘어가 질병과 역병을 막지 못했으니, 그녀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고.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그녀가 원했다면 질병과 역병같은 건 진작에 토벌됐으리라.
천진난만한 듯 공허해 보이는 눈동자가 담고 있는 건 질병과 역병 따위가 아니다. 훨씬 더 먼 곳을 보고 있을 뿐. 그녀에게 그깟 짐승들은 대수롭지 않은 벌레에 불과하리라.
그러니까, 처음부터 여기 와서는 안 됐다는 거다……!
움직일 수 없는 늑대를 향해 뻗어오는 손- 늑대는 끝까지 저항하려 했으나 옴짝달싹 하지 못했다.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던 늑대는 들려온 목소리에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걱정하지 마."
그것은 더없이 상냥한 목소리. 아이를 돌보듯 쓰다듬는 손길에 늑대가 느낀 것은―
"죽이지 않을 테니까."
마치 내가 널 죽일 리 없다고 그리 말하는 것처럼. 그 두 눈은 분명한 호의를 품고 있었다.
―그에 늑대는 이를 드러냈다.
분기한 그의 의지를 따라 일어난 공허가 퍼져나가 그녀의 손을 먹어 치웠다. 사라진 손을 보며 의아해하던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변하는가 싶더니,
"아……?"
더 없는 황홀감을 드러냈다.
그것은 광기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것. 자신의 손이 먹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뻐하고 있었다. 한 점의 가식조차 없이 진심으로.
탕아의 주인― 만상의 지배자를 눈앞에 두고 늑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설령 죽을지라도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고 발악한 끝에 죽겠다고 강하게 마음먹은 순간, 정체돼 있던 스킬이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탈식(C) Lv.9의…]
먹어 치운 건 고작 손 하나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 벌써 여기까지…"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그녀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잃어버린 그녀의 손이 다시 자라나 있었다.
그 순간을 초감각으로도 보지 못했다.
재생? 회복? 도대체 언제?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를 맞이한 늑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발아래로 퍼뜨린 영량이 칠흑 속에서 일어나 수많은 가시가 되어 그녀를 꿰뚫지 못했다.
마력에 대해 우위를 가지는 검은 안개, 흑무가 스멀스멀 나아가 그녀의 검은 마력을 몰아내지 못했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공허는 아까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집어삼키지 못했다.
…무슨 짓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다. 다만 그렇게 되어 있었다.
영량은 멈추고 흑무는 사라지고 공허는 억눌러졌다.
이번에야말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늑대는 마지막으로 대마력을 일으켰으나 역시 변하지 않는다. 아무 소용도 없다.
짓누르는 마력에 비하면 늑대가 가진 것은 새 발의 피에 불과했으니까.
그래. 처음부터 승산 따위는 없었다는 거다.
이를 악문 늑대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려 했으나, 이미 할 수 있는 것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것을 드러냈음에도 승산은 보이지 않는다.
압도적인 차이. 지독한 무력감에 늑대는 강한 감정을 드러내며 분기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설령 남은 스킬 포인트를 사용해 새로운 스킬을 획득하더라도 결과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리라.
―다가온 그녀는 늑대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고, 조곤한 그 목소리에 늑대는 얼어붙고 말았다.
다음 순간, 검게 물들었던 도시는 본래의 색을 되찾았지만 늑대의 머릿속은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넌 잃어버린 자들의 희망이니까.'
그건 그녀가 알고 있을 리 없는 사실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