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76 대지를 병들게 하는 자
백소율은 늑대와 함께 지상에 내려왔다. 아침이라기보다도 이른 새벽녘. 그에 의문을 표했다가 따라간 곳에서 커다란 용을 만나고 두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
아연한. 압도적인 크기의 용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요정의 언어로 늑대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더니, 금세 말이 끝난 모양. 곧 끄덕인 늑대는 다시 올라가자며 백소율을 이끌었다.
"무슨 이야길 하신 건가요?"
"곧 알게 될 거다."
알게 될 거라고…? 백소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은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제 머잖아 퍼플 스퀘어에서 마중 나올 사람이 오리라. 백소율은 아쉬움을 금치 못하며 마지막 순간을 만끽했다.
"이제 끝이네요…"
그 말에 늑대는 고개를 흔들었다.
"끝은 아니다. 어차피 다시 만나게 될 테니."
"……."
"그때는 약속도 지켰을 테고."
늑대는 백소율에게 손짓했다. 의아해하는 백소율에게 그가 건넨 것은 작고 조그마한 알. 아직 부화하지 않은 알이었다.
"너, 그거…?!"
아직 눈치채지 못한 백소율 대신 놀란 건 홍유리였다. 저 알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으니까.
"그래. 요정용의 알이다."
"요정용의…"
그 말에 백소율의 시선은 페리에게로 향했다.
"위험한 일이 있으면 깨어난 요정용에게 부탁해 환계로 가라."
"……이런 걸 제가 가져도 되는 건가요?"
"가지는 게 아니다."
늑대는 고개를 저었고 페리는 늑대의 앞에 다소곳이 내려앉아 네 쌍의 날개를 접었다. 마치 보란 듯이 늑대의 뺨을 핥는 그 모습이 백소율에게 있어 더없이 부럽게 느껴졌다.
"너와 함께할 동반자가 생기는 거지. …힘내라."
그 말에 백소율은 참지 못하고 늑대를 끌어안았다. 저항도 하지 않고 자연스레 안기는 모습에 홍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고, 페리는 마구 꼬리를 휘두르다 백소율에게 붙잡혀 늑대와 함께 안기게 됐다.
"꼭, 꼭 간직할게요. 절대로… 반드시."
결의가 담긴 눈에 늑대는 말없이 끄덕였다.
이제 백소율과는 작별해야 할 때. 그때까진 달밤의 약속을 지킬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이별은 생각보다 짧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스퀘어가 부유섬 위에 세워진 이유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누군가 저택의 문을 두드리자 백소율은 아쉬움을 숨기지 못한 달뜬 숨을 뱉었다. 끌어안은 팔이 풀리자 페리는 답답하단 듯이 날아올랐고 홍유리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고마웠어요."
"……그래."
"하, 지랄도 참. 아주 신파를 찍네."
비아냥대는 홍유리를 무시하고 문을 열자 마중 나온 아넬라를 볼 수 있었다. 잠깐 저택 안을 훑던 아넬라는 자신의 시계를 보더니, 턱짓했다.
"바로 출발할 수 있죠?"
"…네."
밝고 화창한 아침이었으나 퍼플 스퀘어로 향하는 백소율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이제 정말로 한동안 알파와 만날 수 없게 될 테니까. 그나마 선생님이 깨어난 걸 보고 갈 수 있어 안심이기는 하지만…
"어라~ 혹시 가기 싫어요? 내가 눈치 없이 너무 빨리 왔나?"
눈을 깜빡이며 갸웃거리는 그녀에게 백소율은 고개를 흔들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하겠다고 말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아니에요. 죄송해요."
"뭐가 아니에요. 맞는데. 의외네? 가기 싫어하는 거 보니 생각보다 홍유리 씨가 친절했나 봐요~?"
그 말에 백소율은 쓰게 웃었다. 요즘 이런저런 일에 바빠 터치하지 않는다지만 여명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날들이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굴렀으니까. 그전까지 나름 열심히 했다 생각한 게 허탈해질 정도로.
"……뭐, 좋아요. 누가 담당이 될지는 몰라도~ 소율 양에게 확실하게 기초를 가르칠 테죠! 저희 퍼플 스퀘어는 정말이지 다들 엄격하거든요."
짖궂어 보이는 웃음에도 백소율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이미 각오하고 있는 바였으니까. 오히려 그래 주길 바랄 정도로.
"네. 다른 마법과는 궤가 다르니…"
퍼플 스퀘어 출신이 다른 계파의 마법을 사용하는 경우는 많아도 그 반대는 드물 정도였으니. 아넬라는 알듯 말듯 한 웃음을 띠었다.
"후계자가 되겠다는 생각. 바뀌지 않았나요?"
"바뀌었어요."
"흐응~ 조금 실망…"
"스퀘어 마스터가 될 거니까요."
그 말에 아넬라는 벙찐 눈으로 백소율을 보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눈을 보곤 그게 진심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진심이에요? 여태 당신 스승이었던 홍유리 씨도 후계자조차 아닌데요?"
"스승님은 못 하신 게 아니라 안 하신 거예요."
백소율의 고저 없는 목소리와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가 어떤 늑대의 모습과 겹쳐 보이자 아넬라는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전 할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백소율의 눈에 보이는 건 스퀘어 마스터가 아니었다. 꿈 속에서보다 강해지고 말리라. 악몽 속 마녀가 되었던 나보다 더. 그 꿈이 무섭지 않아질 만큼. 알파의 옆에 있을 수 있을 만큼.
"……소율 양은 내 생각보다 훨~씬 당돌하네요? 뭐 좋아요. 그 각오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는 것도 재밌겠네요. 부디 그 마음이 변치 않길 바라죠."
아넬라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대기실에서 잠깐 기다린 백소율은 곧 자신의 새로운 스승이 될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
"갔네."
속이 다 후련하다는 듯한 말과는 달리 표정엔 아쉬움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그에 웃던 늑대는 찌릿한 시선을 받고 고개를 돌렸다.
"너 뭔가 갈수록 능청맞아지는 것 같은데…?"
"착각이다. 밤새 고민은 했나?"
그 말에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그렇지 않단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고민을 하루 이틀에 끝낼 수 있을 리 없다. 목숨이 달린 일인 데다가 살아남아도 종족이 변할 테니까. 아무리 맘 편히 먹으라고 해도 그게 쉬울 리 없으니.
스퀘어의 도움을 구하고 방법을 강구하며 페리에게 부정을 먹이는 나날이 반복되는 동안, 다시 움직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여겼던 질병은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평탄한 시간이 흘러갔다.
***
늑대는 테헤란의 서부까지 페리와 함께 길을 거닐었다. 언제 변혁이 시작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홍유리 또한 동행한 상태로.
"…여긴 벌써 다 걷었네?"
요정용들의 활약으로 테헤란에 드리운 오염은 대부분 걷어낸 상태였다. 이렇게 점점 넓혀가 언젠가는 역병의 흔적마저 완전히 사라질 터.
솔직히 말하자면 공허와 겁화가 있는 이상, 늑대 자신이 직접 한다면 한 달도 걸리지 않아 오염은 사라질 테지만, 그랬다간 그저 사라질 뿐. 요정용들의 먹이로 두는 게 더 나으리라.
마력도 사용할 수 없어 부정에 다가가지 못하는 홍유리의 옆에 선 늑대는 뒤를 돌아봤다.
거기엔 부유섬이 멀어져 있었다.
"셈난이었나?"
"……어."
멍하니 대답하는 홍유리는 요정용들에게 정신이 팔린 듯 보였다. 어쩌면 용종이 될지 모른다는 말에 신경 쓰는 게 아닐까.
시간이 흐른 만큼 다시 보급하기 위해 테헤란의 동쪽 170km에 있는 셈난으로 향하는 스퀘어. 돌아가려면 시간은 좀 걸릴 테지만 문제는 없으리라.
벌써 사흘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질병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놈이 가진 재생 스킬을 떠올리면 상처는 이미 진작에 회복했을 터.
한데도 놈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에 작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다지만, 재앙에 있어 그런 말 따위는 통용되지 않는다. 언제까지 계속 스퀘어에만 있을 순 없으니까.
"……결정은 했나?"
결정이라기보다는 각오. 마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최소 3년 이상은 연명할 수 있을 테지만, 그 시간에 의미가 없다는 건 그녀 또한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각오하는 건 쉽지 않으리라.
"어차피… 으흠!"
헛기침한 홍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차마 늑대를 보며 말할 용기는 나지 않았기에. 그러다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와줄 거잖아? 어떻게 변하든지."
말했다가 얼굴이 화끈해졌다. 처음 말했던 건 분명 알파였으니까.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번복할 리 없는데…… 괜히, 괜히 말하고 말았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설마 듣지 못했나? 알파의 청력이라면 그럴 리 없을 텐데…?
초조함에 볼살을 잘근잘근 씹어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슬쩍 고개 돌린 홍유리의 눈가가 경련하며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다.
늑대는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무시, 무시당했다…? 어이없음에 실소가 나왔다. 곧 홍유리의 이마에 혈관이 돋기 시작할 때, 진중한 저음이 들려왔다.
다만, 그녀가 기다리는 말은 아니었다.
"……타라."
"…뭐?"
홍유리가 눈살을 찌푸리자 늑대는 설명할 시간이 아깝다는 듯 촉수를 뻗었다. 꽤 먼 곳에 있던 페리 또한 늑대의 부름에 점멸을 사용해 곧바로 돌아왔고 그러자마자 늑대는 본신을 드러내 둘을 태우고 달리기 시작했다.
"뀨~ 뀨~?!"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 바람을 둘러 달리고 있다. 갑작스러운 질주에 당황하면서도 떨어지지 않게 몸을 엎드린 홍유리는 달리는 와중에도 늑대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수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지만, 신체 능력마저 범인의 것을 훨씬 초월해있는 그녀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땅이, 들썩이고 있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미세하기는 하지만 대지가 흔들린다. 설마 지진일까? 그럴 리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랬다면 저렇게 무언가가 나아가는 것처럼 움직이는 게 아니라 땅 전체가 흔들렸을 터.
"설마…"
"놈이다."
그 말에 홍유리의 숨이 멎었다. 늑대가 아직 스퀘어를 떠나지 않은 이유…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질병― 대지를 병들게 하는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뜻이니까.
당황하던 홍유리는 이내 침착을 되찾았다. 처음엔 질병이 쫓아오는 거라 생각했지만 놈이 움직이는 방향은 자신들이 있는 곳이 아니다. 여기가 아니라 동쪽으로 달리는…
"동쪽…?"
달리는 와중에도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쪽― 부유섬이 향하는 방향.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니리라.
"설마 스퀘어?!"
"아마도."
그동안 두 괴물에게 부유섬은 귀찮은 존재에 불과했을 터. 특히 질병에게는 더 그랬으리라. 비늘을 깨뜨리지 못하는 이상 대마법으로도 제대로 된 피해를 주긴 힘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역병이 죽음으로써 놈에게 경각심이 생겼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귀찮은 존재에서 자신을 죽일 수 있을지 모르는 위협으로 변모했다면 스퀘어를 처리하려 드는 건 당연한 일.
저 깊은 땅속에 살아가는 이상 질병을 감지할 방법은 없다. 부유섬이 내려앉기 전에 질병을 따라잡아야, 아니 추월해야만 한다……! 하지만 늑대는 이를 갈았다. 도무지 거리가 좁혀지질 않아서. 그리고 도착했다 한들 의미가 없다. 스퀘어가 하강하는 걸 막는다고 해도 셈난의 주민들은 전부 몰살당할 테니까.
"……네가 스퀘어로 가라."
"무슨 개소…!"
"유인하겠다."
그 말에 홍유리는 아연하게 늑대를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는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스퀘어의 하강을 막는 건 자신. 그동안 알파는 자신이 시간을 벌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너 미쳤어?!"
"그게 최선이니까."
"개소리하지 마! 그러다 네가 죽으면?"
홍유리가 소리쳤다. 그 말은… 당연히 이해하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늑대보다 더 냉정하고 차갑게 먼 곳을 보고 있었으니까.
"유인하다가 네가 죽으면? 네가 뒤지면 전부 끝인데…!"
늑대가 죽으면 인류에게 질병을 쓰러뜨릴 방법이 사라지는 셈. 굳이 말로 하진 않았지만, 홍유리의 말은 셈난의 주민을 전부 버리더라도 더 안전한 길을 택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대국적인 의미에서 그녀의 판단은 옳다. 과연 마법사다운 시선이었다. 아니, 어쩌면 질병을 유인하기 위해 주민들을 대피시키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늑대는 고개를 흔들었다.
타협은 하지 않는다. 이제 그런 건 질색이었으니까. 나아가고 나아간 끝에 기다리는 게 죽음이라 한들.
아니, 죽을 생각은 없다. 늑대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질병을 유인하고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그러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이…!
"부탁한다."
늑대의 입에서 나온 '부탁'이라는 말에 홍유리는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고 씹었다. 이윽고 떨리는 목소리가 늑대의 귓가에 들려왔다.
"…죽으면 죽여버릴 거야!"
죽으면 죽여버린다니 그게 무슨 말인지. 늑대는 실소했고 그 순간, 등에서 느껴지던 중량이 사라졌다. 둘 다 환계로 이동한 것이리라. 동시에 거센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치 모래 폭풍이 달리는 듯한 광경. 폭풍을 두른 마랑이 마침내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간을 벌어야만 한다.
최소한 홍유리가 스퀘어에 도착할 때까지……!
***
페리를 붙잡은 홍유리는 스퀘어가 아니라 여태 왔던 방향의 반대로 달렸다.
"씨발…!"
있어야 한다. 있어야만 한다…! 아니, 반드시 있을 거야!
당황하는 페리는 이내 그 의도를 읽어 아끼지 않고 점멸을 사용했고 홍유리는 표정을 구겼다. 이것저것 가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자신이 망설여서 일이 틀어지면 전부 끝이다. 셈난 시의 시민은 물론이고 스퀘어 전체가. 스승인 아스터도 그 싸가지 없는 도로시도 제자인 백소율과 아넬라까지 전부. 용? 변혁? 그깟 것쯤 얼마든지…!
달리던 홍유리로부터 붉은 마력이 새어 나왔다. 들리지 않았지만 속삭임이 들리는 듯한 착각에 까드득, 이가 갈렸다. 대마력을 얻기 위한 수련으로 육신에 마력을 두르는 건 한층 더 익숙해져 있다. 홍유리는 전력으로 달렸다.
테헤란 어딘가에 있을 오래된 용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