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 #76 대지를 병들게 하는 자 (2)
생각보다 더 놈의 속도가 빠르다. 이전에 땅을 파고들었을 때보다 배는 빠른 속도. 도대체 뭐가 다르길래?
폭풍과 탄력을 포함해 있는 모든 스킬을 아낌없이 사용하니 못 쫓을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쉽진 않다. 그렇게 거리를 좁혔을 때, 생각보다 땅 울림이 심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소음 또한 마찬가지.
곧바로 탐지를 사용한 늑대는 지면 깊숙한 곳에 구멍이 뚫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질병이 지나가며 뚫은 게 아니라 이미 진작에 뚫려있던 길. 그건 마치…
'터널?'
그런 터널이 개미굴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다. 동시에 놈이 숨죽이고 있던 이유 중 하나가 이것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터널을 파는 걸 눈치채지 못한 이유는 수백 미터 상공이었기 때문에. 부유섬은 질병으로부터 안전한 장소였지만 놈의 동태를 살피기엔 부적합했다.
이미 뚫려있는 길이라면 지상만큼은 아니더라 빠른 게 당연하다. 준비하고 있던 건 자신만이 아니라는 뜻이리라.
그리고 그 순간, 발아래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니, 홍해가 열리듯 갈라지고 있었다. 갈라지는 대지, 사라진 지면 아래로 언뜻 놈의 비늘이 보이자 늑대는 눈을 빛냈다.
땅이 꺼지고 무너지더라도 그런 건 일말의 위협도 되지 못한다. 홍해처럼 열려 갈라져 열리는 땅 위를 마랑은 달리고 또 달렸다.
그 뒤를 검은 불꽃이 일어나 타오르기 시작했다. 추락 시켜 지하로 끌어들일 생각이었겠지만, 공중을 달릴 수 있는 늑대에게 그런 건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자충수. 땅이 열리는 건 늑대가 바라던 바였으니까.
질병이 추락하길 바랐던 건 늑대였겠지만, 떨어지는 것은 검은 불꽃뿐이다. 터널 사이로 들어가 맹렬한 기세로 지하를 불태워간다.
하지만 질병에게 곧바로 겁화가 닿을 일은 없다. 둘의 고도는 달랐지만 거의 같은 위치에서 달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검은 불꽃이 터져나간, 폭풍이 늑대의 발끝을 밀어낸 순간 마침내 늑대는 질병을 추월해 앞을 달렸다.
그렇게 검은 불꽃이 떨어져 내렸을 때, 괴물의 비명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내려다본 늑대는 그것이 마치 지옥 같다고 생각했다.
깊은 무저갱 속에 검게 타오르는 불길과 그 속에서 괴성을 지르는 괴물. 고통에 몸부림치던 질병은 갈라진 대지를 타고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비스듬히 꺾은 몸이 지면을 타고 지상으로 기어오르자 놈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난다.
다가오는 턱― 그 속도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비상식적. 커다란 턱이 물어뜯는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천지를 집어삼킬 듯 커다랗게, 한계까지 벌어졌다.
살의를 띤 턱을 보았을 때, 늑대는 침을 삼켰다.
그것은 마치 대지 그 자체가 의지를 갖고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만 같았으니까. 다가오는 것들은 그뿐만이 아니다. 땅이 갈라지며 부서지고 찢어진 파편들과 놈이 가진 촉수, 검은 가지들이 끝없이 뻗어졌다.
그 전부가 자신을 향해 쇄도하기 직전, 늑대는 초감각으로 읽은 미래를 확인해 미리부터 공중을 달려 뛰어오르고 있었다. 뛰어오르고 있었지만 그게 벗어났다는 뜻은 아니다.
언뜻 바위처럼 보이는 놈의 비늘이 대지를 긁고 마찰하며 시끄러운 굉음을 만들어냈다. 귀가 먹먹해지는 와중 늑대에게 가장 먼저 도달한 건 검은 가지들― 그것들이 뻗어져 와 늑대가 있는 곳을 노려 점이 되었다.
거기에 담긴 미증유의 힘. 공기를 찢어발기고 뒤늦게 소리가 따라붙어 수십 갈래의 검은 번개를 연상케 했다. 창공으로 거꾸로 떨어져 내리는 그것들은 질병이 뛰어오르며 고도를 높임에 따라 계속해 늑대를 뒤쫓았다.
마치 그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생물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집념을 가지고. 검은 가지에서 다시 가지가 뻗어진 순간, 그 끝에 가시가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지신. 놈의 지배 아래, 셀 수 없는 무수한 대지의 파편이 늑대 하나만을 노렸다. 창공 전체가 검게 뒤집힌 듯한 상황에 늑대는 눈을 부릅떴다.
검은 가시와 대지의 파편이 자신을 쫓는다. 그 뒤를 무수한 촉수가 받치듯 따라붙고 있다.
초감각이 있더라도 그 전부를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막아내야만 한다. 늑대가 여태 거뒀던 그림자― 영량을 펼쳤고 기나긴 검은 장막이 허공을 덮었다.
다시 장막이 거둬진 순간, 가시도 파편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공허의 힘으로 잠식과 연결된 그림자가 그 전부를 집어삼켰으니까.
소리마저 지워진 정적 사이, 늑대는 이게 끝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파편과 가시를 뒤따른 검은 가지― 저것이야말로 진짜였으니까.
공허로는 막을 수 없다. 아니, 무엇을 사용하더라도 늑대에게 막을 방법은 없다. 공허와 겁화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마력이 담긴 검은 가지. 놈의 몸에 붙어 있는 촉수만큼은 스테이터스와 스킬의 보정을 받고 있어 순식간에 먹어 치울 수 없기 때문에.
또한, 그 아득한 속도는 늑대 자신을 한참이나 뛰어넘어 있다. 치솟는 가지들은 기어코 늑대를 따라잡아 추월하더니 마치 새장처럼 늑대를 감쌌다.
검은 가지, 숲속에 갇힌 늑대의 움직임이 어지러워졌다. 혼돈의 도가니. 규칙 없는 불규칙 속에서 늑대는 초감각을 이용해 생로를 찾았다. 단지 자신을 죽이겠다는 살의만이 가득한 검은 숲 속에서 늑대는 탄력과 폭풍을 최대한 이용해 멀어져갔다. 쫓아오는 촉수가 발판을 깨부순 순간, 늑대는 질병의 촉수를 발판 삼아 뛰어올랐다.
놈의 B등급 촉수는 스킬의 이름 그대로 마수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악랄하다. 늑대가 밟은 곳에서 새로운 가지를 뻗어 늑대를 뒤쫓아왔으니까. 조금. 조금만 더 멀어진다면 벗어날 수 있다 여겼으나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인지 깨달았다.
겁화에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던 질병이 이미 거대한 턱을 벌리며 다가와 있었으니까.
아래에서부터가 아니라 위에서부터 추락하는 거대한 동체. 한계까지 벌어진 턱이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떨어져 내린다. 시야를 가득 메우고 기어코 늑대를 집어삼키려는 순간, 늑대의 모습이 꺼지듯 사라졌고 질병에게 보인 건 그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림자. 갑작스레 닥친 비치지 않는 어둠에도 질병은 멈추지 않았다. 고작 그림자 따위에 상처 입을 자신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그림자 전체를 집어삼킬 듯 벌어진 턱은 멈추지 않고 추락하며 경로의 모든 것을 먹어 치웠다.
떨어지는 질병. 그에 따라 검은 가지들 또한 떨어져 내려 갈라진 대지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필연적으로 일어난 거대한 충돌. 그 여파로 치솟은 파편과 먼지는 지상과 공중을 모두 뒤덮었지만, 그 먼지 사이에 늑대의 실루엣이 그려졌다. 마치 그곳만은 침범할 수 없다는 듯이.
비가시화― 잠깐 모습을 감췄던 늑대가 바람을 두른 순간, 먼지는 흩날리고 충격으로 치솟은 파편 또한 공허에 집어 삼켜져 사라졌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죽었을 터. 그러나 이전과는 다르다. 아예 대항할 수 없는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것은 역병을 먹어 치운 늑대 자신이 한 걸음 더 나아갔기 때문에.
분명 격차는 있지만, 초감각을 비롯한 스킬의 보정이 있다면 어떻게든 피할 수 있다. 단 한 번의 공격이 치명상이 되겠지만 그래도 싸울 수 있다.
―놈이 전력을 드러내지 않은 지금이라면.
겁화에 불타오르던 질병은 괴로워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불길은 꺼지고 말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촉수를 뻗어 불길을 걷어냈다고 하는 게 맞으리라.
무식하기 짝이 없는 체력과 마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면 아래로 모습을 감춘 질병이 움직였을 때, 늑대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뛰어오를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놈이 자신을 쫓아오지 않았으니까.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
역병의 죽음이 놈에게 경계심을 심어준 것인지 저번 스퀘어의 폭격이 그리도 뼈아팠는지 행동의 원인이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지만, 놈은 스퀘어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불에 덴 짐승이 불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질병은 스퀘어와 자신이 위협이 된다고 학습한 것이리라. 굳이 자신이 아니라 스퀘어를 노리는 이유는 그쪽이 더 손쉬운 사냥감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부유섬이 내려앉기만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그건 사실이었다.
자신이 없는 스퀘어는 질병을 죽일 수 없고, 스퀘어가 없는 자신은 혼자 힘으로 질병에게 대적할 수 없었으니.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시간이 부족하다. 어떻게든 조금 더 시간을 끌어야만 한다. 좀 더. 좀 더 놈을 유인해야만 하는데… 순간, 늑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갈라진 대지였다.
***
요 며칠간은 참 이상한 일투성이. 스승님은 자신이 기억을 잃은 거라고. 기억 상실증에 걸린 상태라고 하지만 쉽사리 믿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 없다. 스승의 말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역병이 죽었으니까. 어디에도 무리는 없고 그걸 막기 위한 군대와 헌터들도 주둔하지 않는다.
듣기로는 뜬금없게도 마랑이 쓰러뜨렸다는 말은 들었지만, 몬스터가 역병을 쓰러뜨렸단 걸 쉽사리 믿긴 어려웠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을 잊을 수 있었을까? 스승님에게 물어봤지만 그것만큼은 도저히 답해주시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도로시는 머리 한구석에 안개가 낀 것만 같은 기분에 답답함을 느끼곤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다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에 눈살을 찌푸렸다. 마력을 돋워 확인한 그것의 정체는 수십 미터에 달하는 기다란 용.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끔뻑였지만, 여전히 눈에 보이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설마 환각이라도 보고 있나?
용의 모습에 어쩐지 기시감이 들가 했지만, 몬스터가 스퀘어에 접근하는 것을 가만히 둘 수는 없다. 레드 스퀘어의 후계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도로시로부터 마력이 퍼져나갔고, 영창의 말이 읊어졌다.
"Stâlp de flacără― Gigantic. Multiplex."
순식간에 완성된 주문― 갑작스레 생겨난 거대한 불꽃 기둥이 도로시의 의지에 따라 폭발하듯 뻗어져 단번에 용의 모습을 가렸다. 하나로 끝난 게 아니라 두 겹 세 겹. 결국 수십 개의 불기둥이 하늘을 수놓았지만, 도로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냐하면, 놓쳤기 때문에. 격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용의 모습이 꺼지듯 사라져서. 정말 환각이라도 본 걸까? 혼란해 하던 도로시는 다음 순간,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아까 그 용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대체 어떻게? 생각은 뒷전으로 미루고 재빨리 영창을 읊던 도로시는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에게 소리치자 눈을 끔뻑였다.
"이 미친년이!"
아니,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다가오는 검은 무언가― 홍유리의 신발 밑창에 그대로 밟혀 바닥에 처박힌 도로시가 영창 하던 주문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호, 홍유리! 너 진짜 미쳤…?!"
미쳤냐고 물으려던 도로시는 멱살이 잡혀 끌어올려졌고 그 순간, 홍유리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해 딱딱히 굳고 말았다. 왜냐하면, 타오르는 눈동자 속 동공이 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찢어진 것처럼 보였기에.
"넌 그냥 닥치고 있어."
으르렁거리는 듯한, 신경질적인 목소리. 지난 사흘간 홍유리 또한 도로시가 기억상실증에 걸렸단 건 들어 알고 있었다. 깨소금처럼 고소했지만, 막상 마법이 향하자 이를 갈아야만 했다.
아슬아슬하게 환계로 피하지 않았다면 자칫 잘못했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후계자라는 자리를 도박해서 딴 건 아니라는 뜻. 짜증이 나지 않으려야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상황을 떠올리고 가까스로 인내심을 발휘한 홍유리는 심호흡하며 속을 가라앉히다 도로시를 냅다 던졌다. 평소에도 개차반 소리를 듣긴 했지만, 마력의 사용으로 용의 피가 달아오르는 지금은 감정을 주체하는 게 유독 힘들다.
"이 씻팔, 당장 부유섬 띄워! 띄우라고 이 등신들아! 질병, 질병 온다고!"
난데없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말에 어안이 벙벙하던 마법사들은 곧 상황을 이해하곤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광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둔한 이가 스퀘어의 마법사가 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던 홍유리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스퀘어는 머잖아 다시 떠오르리라. 문제는 셈난의 주민들… 부유섬만 멀어진다면 셈난의 주민들은 피할 수 있다. 부디 알파가 조금만 더 시간을 벌어주길 바랄 뿐… 마법사들이 일사불란히 달리는 와중, 홀로 남겨진 용은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