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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90화 (190/407)

〈 190화 〉 #78 vs 질병 (4)

끝이 다가오는 중, 여전히 불리한 건 늑대였다. 질병을 죽이는 게 마냥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그 전에 자신이 죽고 말리라.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방법을 갈구하며 늑대는 거칠어진 숨으로 발판을 밟아 질병에게서 멀어졌다.

거칠어진 숨은 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숨 쉴 틈이 없어서. 무엇보다 늑골이 폐를 찔러 호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체액에 실시간으로 녹아내리는 몸에 겁화를 두른 늑대는 바닥을 굴러 질병의 턱을 피했다.

바닥을 씹어먹은 턱은 마치 지하로 잠수하기라도 하는 듯 숨어들었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땐, 부서진 대지의 갑주는 다시 복구된 뒤였다.

지신의 재료가 될 땅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질병과 싸운다는 건 이 대지 전부를 부숴야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검은 숲과 파편이 자신을 엉망으로 만들어가는 가운데 늑대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갔다.

재생하는 것보다 상처 입는 게 빠르다. 예측하고 움직이더라도 몸이 따라주지 못한다. 부족한 역량을 받쳐주던 기량. 이제 그 기량으로도 커버하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으니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좀 더 좋은 방법은 없었을까. 더 나은 선택은 없었을까.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후회로 더듬거리며 늑대는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 늑대가 가진 이성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 예측과 초감각이 하나둘 자신의 죽음을 보여주기 시작했으니까.

촉수에 꿰뚫리거나 대지에 짓눌리고, 질병에게 삼켜져 녹아 들어가는 그런 미래. 하지만 아직은 피할 수 있다. 죽음을 회피하고 돌아가며 늑대는 끈질기게 버텼다. 최소한의 피해로 살아남고 매 순간 최선의 선택으로 얇디얇은 가능성의 끈을 이어갔다.

탄력을 발해 피했지만, 기다렸다는 듯 일어난 대지의 파편이 함정처럼 갈라져 자신의 하반신을 감싸 우그러뜨렸다. 공허를 일으켜 벗어나려는 그 순간조차 질병은 용납하지 않았다. 대지가 들썩이며 그 꼬리가 튀어나오는 순간 늑대는 그림자로 자신의 반신을 잘랐다. 폭풍으로 밀어낸 늑대는 변이로 반신을 만들어냈으나, 온전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능성이란 끈은 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승리로 이어지는 길은 어느새 생환으로 향하는 길이 옅어지고 서서히 끝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결국 가능성조차 엷어져 끊어진 순간, 늑대의 예측 속에 보인 건 무수한 방법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

질병의 몸속에서 탈출한 늑대가 달리고, 검은 촉수가 뒤쫓고 대지의 파편이 일어나고, 겁화가 불타오르고 질병이 포효하며 땅이 울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싸움.

신화에 가까운 그 싸움. 그럼에도 처절해 보이는 두 짐승의 사투는 계속해 이어진다. 그에 마법사들은 말을 잃고 말았다. 창공에 내리 앉은 정적. 영창하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아니, 사실 주문은 완성돼 있었다. 그저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

지친 질병은 여전히 재앙이었으나 용린을 잃고 부서진 대지를 무작정 둘러싼 채 자신을 숨기고 있다. 용린이 없는 지금이라면 놈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랑과 질병의 거리가 벌어지는 순간. 그래. 그때는 분명 오리라.

하지만 그때가 마랑이 죽은 다음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 질병의 상태가 심각한 것 이상으로 마랑의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으니까.

불길함을 상징하는 듯한 검은 마랑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그 피가 증발해 수증기와 같은 연기로 화해 끓어오른다. 잔상조차 쫓기 힘들었던 움직임은 이제 지치고 상처 입어 느려진 탓에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까지 떨어져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붉은 것들은 찢어진 마랑의 살점과 피 혹은 장기. 언뜻 보이는 하얀 것들은 갉히고 부러진 마랑의 뼈였다. 생물이라면 진작에 죽어 이상하지 않았을 테지만, 마랑은 죽지 않고 싸우고 있었다. 부서지고 찢어진 몸을 변이로 새로이 만들어 사투를 이어간다. 완화, 용혈, 재생과 그가 가진 극기가 늑대의 의식을 간신히 잇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그럴 수 있을까? 인간이 아닌 괴물이기에. 인외의 존재로서 의지를, 이성을 가진 마랑의 싸움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것.

격상의 상대― 재앙의 괴물, 질병을 죽이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고 있다. 하지만 사선 위에서 뛰노는 정도가 아니다. 이미 사선은 마랑의 목을 조이고 있었으니까.

지켜보기만 해도 아찔한 싸움 속에서 재앙의 괴물은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승리의 가능성이 짙어진 만큼, 그다음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싸움을 계속해선 안 된다. 물론 마랑을 죽일 순 있겠지만 그다음은 자신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마랑을 죽였다간 곧바로 마법의 폭격에 당하고 말리라는 것을. 이대로 마법에 직격당했다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리하여, 질병이 내린 판단은 도망. 일단 물러나 후일을 기약하는 것.

이대로라면 목숨을 장담하지 못한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나 대마법이 닿지 않을 만큼 깊은 지하에 숨어든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도망친다면 결국 승리하는 건 자신. 회복한 다음 다시 먹어 치우면 될 뿐이다.

그렇게 도망치려던 재앙의 괴물은 그러지 못했다. 끈질기게 자신을 막아서는 늑대가 죽음을 불사하고 눈앞에 있었으니까.

여전히 펼쳐진 가능성은 죽음뿐. 그럼에도 늑대는 맹목적으로 흐린 의식과 이성으로나마 흩어진 가능성을 더듬었다. 지금 놈을 놓쳤다간 두 번 다시 기회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아직, 아직이다.

――딱 한 가지. 아직 방법은 남아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도 죽지 않는 늑대에게 질렸다는 듯, 질병은 촉수를 휘둘렀다. 비키라는 듯 가볍게 휘두른 촉수에는 힘이 빠져있다. 그럼에도 음속을 우습게 여기듯 넘어선 속도. 늑대는 그것을 보고 피했으나, 순간 자신의 의식이 아주 잠깐 끊어졌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

피했지만, 스치고 말았다. 잠식으로 인해 강탈한 체력은 아직 남아 있었으나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이미 재생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상처 입고 너덜너덜해져 있었으니까. 육신의 대부분이 변이로 이루어져 있을 만큼이나.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어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다가오는 촉수를 보고도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변이로 만들어낸 살덩이가 억지로 자신을 끌어당겼지만, 한 번 피하는 게 고작이었다. 살덩이는 붙지 못한 채 떨어졌고 늑대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흐린 의식이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역병과 싸웠던 그 때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떠올릴 수 있는 게 없다. 대체 자신은 무얼 하려 했을까? 아직 남은 방법이 무엇이었기에 질병을 가로막았는가.

수십 갈래 촉수가 꽃봉오리처럼 끝에서 한데 뭉쳐졌다. 스킬로 발현된 시각은 흐려지지 않았으나 의식이 흐려져 뇌로 밀고 들어오는 정보를 보고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럴 만한 의식이, 이성이 남아있지 않다.

피할 수 없다. 죽고 말리라. 마법사들과 질병은 그리 생각했고, 늑대 본인 또한 그리 느꼈다.

다만, 마지막으로 강박적으로 떠올린 것― 모조 엘릭서. 승리로 향하는 유일한 길. 흐린 의식 속에서 떠오른 기억. 지금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 늑대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아공간이 열리는 순간, 늑대는 어설프게 만들어진 촉수로 마개가 닫힌 플라스크를 집어들었다.

"―――!"

그 순간, 질병은 짐승으로서의 감으로 저것이 역전의 발판이 될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포효하며 손을 뻗은 순간, 마법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Muntele înghețat se va ridica―!"

거대한 얼음 산이 솟아오른다. 둘 사이를 가르는 극빙의 벽은, 너무나도 간단히 잘려 나갔다. 당연하다. 아무리 커다랗다 해도 고작 얼음 따위로 재앙의 괴물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겨울의 주인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을 때, 홍유리는 다시 한번 나선창을 던졌다.

"Arde în abis și transformă-te într-o suliță neagră―!"

회전하는 비틀린 나선창. 하지만 맞지 않는다. 맞을 리 없다. 이미 한 번 당했던 만큼 질병은 나선창을 경계하고 있었으니까. 유일하게 거리를 좁힌 상태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대마법. 그것이 빗나간 순간, 홍유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직감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마랑이 죽으리라고. 얼어붙은 산을 깨부수고 나선창마저 피해낸 질병을 가로막을 건 남아있지 않다.

거대한 턱이 벌어지며 그것보다 빠르게 검은 촉수가, 숲이 늑대를 죽이기 위해 조여들기 시작했다. 늑대의 턱이 병째로 플라스크를 먹어 치우는 것보다 조금 빠르게 질병의 검은 촉수가 늑대의 촉수를 절단했다.

……모방한 신의 피. 모조 엘릭서가 담긴 병이 데굴데굴 굴러 멀어져간다. 유일한 가능성조차 사라지고 죽음이 성큼 다가온다.

검은 숲이 늑대를 완전히 덮었다. 사방팔방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조여드는데도 늑대는 멍하니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보고도 떠올릴 수 없었다. 의식이 날아가고 이성이 사라진 곳에 남은 건……

"―――?!"

……본능이었다.

검은 촉수가 사라지고, 질병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무엇이 일어났는가. 보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지독한 살기가 퍼져 나왔다. 붉게 물든 늑대를 다시 검게 물들이는 듯한 불길한 살기. 그 속에서 질병은 붉은 무언가를 보았다.

그것은 피로 갑칠된 마랑의 전신이 아니라, 그보다 붉게 빛나는 눈동자. 충혈되어 핏줄이 돋은 살기로 물든 짐승의 눈이었다.

의식은 없다. 이성도 남아있지 않다. 극기로도 버틸 수 없을 만큼 그 의지는 흐려져 가라앉고 말았다.

……그럼에도 굶주려 있다고. 마랑의 붉은 눈을 본 자는 누구라도 그리 생각하리라.

늑대의 기다란 붉은 혀가 자신의 입가를 핥았다. 피가 닦여, 붉게 물들었던 털이 본연의 색을 드러냈다. 고작 그것뿐인데 괴물은 재앙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허기. 굶주림. 식탐. 공복. 갈망… 생물임에도 생물을 벗어난 존재. 식사도 수면도 필요 없는 몸. 따라서, 거기에 굶주림도 배부름도 있을 리 없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어 치우고 싶다는 생각만이 늑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니, 그건 생각이 아니다. 그저 원초적인 본능일 뿐.

이성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갈구하는 것. 인간이었던 이성 쪽이 아니라 짐승이 된 본능이 원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늑대가 가지고 있던 모순이 마침내 풀리기 시작했다.

먹어 치우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먹어 치우겠다는 본질. 굶주림을 느끼지 못한다는 그 모순이.

그리하여, 아지랑이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건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다.

그저, 늑대가 여태 다루지 못했던 힘이었을 뿐.

잿불과 귀화를 다뤘던 늑대에게 불이란 낯선 것이 아니었으나 공허란 더 없이 이질적인 것. 어떤 힘도 그와 비슷하지 않다. 겁화는 다룰 수 있었지만, 그 훨씬 이전에 얻은 공허의 힘을 늑대는 여태껏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그 힘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이성이 있었으니까. 짐승이 아니었으니까. 이성에 갇혀 이성 속에 행동하는 늑대가 그 힘을 온전히 다룰 수 있을 리 없다. 아무리 먹어치우겠다고 생각해봤자 '꾸며진 생각'에 불과하니까.

모순적이게도 여태 그를 지탱해왔던 이성이야말로 그의 발목을 붙잡는 걸림돌이었던 것. 상처 입고 비루해지고 극기로도 이을 수 없을 만큼 희미해진 의식이 가라앉고, 그렇게 궁지에 몰린 뒤에야 마침내 늑대의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불길한 마랑― 먹어 치우는 자의 본질이.

"―――."

낮은 울음소리는 여태까지와는 달랐다. 무언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 순간, 지금의 늑대에게는 들릴 리 없는, 보일 리 없는 시스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공허(A)― 격의 상승 1/3]

온전한 자신은 그런 게 아니라는 듯, 먹어 치우는 힘은 단번에 질병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부풀었다. 그것에 닿은 순간, 지신의 힘으로 만들어 낸 대지의 갑주는 잠시도 견디지 못하고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힘. 공허.

오롯이 드러난 그것을 목도한 순간, 질병에게 싸우겠다는 생각 따위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저 살아남고 싶다는 본능이 소리지르고 있을 뿐.

그저 한 마리 겁 먹은 짐승으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지신의 힘을 불러일으키자 일대의 대지가 모여들어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다. 깊은 지하로 이어지는 기다랗게 반 토막 난 아치형의 터널이 질병을 마중했고, 거기에 이성을 완전히 잃은 채, 그저 먹어 치우겠다는 본성만이 남은 마랑이 재앙을 뒤쫓기 시작했다.

***

점칠되는 불안에 백소율은 연신 뒤를 되돌아보았다. 지금 자신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리란 건 그 자신이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남들보다 조금 마력이 나은 정도. 장점이라고 해봐야 그 정도 밖에 없었으니까.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적어도 그녀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건 시간. 인지하고 있지만 아쉬움은 금할 길이 없다. 믿고는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걱정하는 마음이 사라질 리는 없다. 그런 백소율을 아넬라가 이끌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소율 양."

고개를 끄덕이지만, 시선은 계속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환계는 거울처럼 현계를 비추는 또 다른 세계였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쑥대밭으로 엉망이 되어가는 대지를 백소율을 포함한 마법사들은 그저 멍하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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