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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191화 (191/407)

〈 191화 〉 #79 깨지지 않은 약속

질병은 사력을 다해 도망쳤다. 지하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발악. 자신의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맞설 생각은 들지 않는다.

질병이 지난 길은 지신에 의해 막혀 사라지고 있지만 굶주린 짐승은 허기를 채우기 위해 멈추지 않고 쫓고 있다. 막힌 길을 공허가 먹어 치우며 억지로 열어젖힌다. 침을 질질 흘리는 그 모습에서 본래 가지고 있던 지성의 편린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상처 입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불사하는 그저 한 마리 짐승. 거리가 좁혀졌을 때, 질병이 뻗은 촉수를 짐승은 공허를 두른 채 물어뜯고 피를 흘리면서 뒤쫓아오고 있었다.

대지진. 질병의 지신이 닿는 범위 안에서 유례 없을 정도의 지각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굶주린 짐승은 빈사 상태의 몸으로 우그러지고 뜯겨나가며 상처 입어갔다.

허나, 그 상처는 대단치 않다. 그 대부분은 공허가 먹어 치우고 있었으니까.

공허와 지신은 동등한 격을 지닌 스킬― 그렇지 않다. 늑대의 이성이 아닌 본성, 짐승이 다루고 있는 한 공허는 분명 이 순간, 지신의 위에 있었다.

[공허(A)― 격의 상승 1/3]

무엇보다 그것을 시스템이 증명하고 있다.

물론 그 본성 또한 늑대의 일부임에는 분명하나, 겁화를 두르지도 미래를 보지도 않고 언어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먹어치우기만 하는 굶주린 짐승을 늑대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잠식 때문에 악화한 체력과 상처는 질병을 느리고 둔하게 만들었지만 반대로 짐승은 점점 더 빨라졌다. 의식적으로 스킬을 사용하는 건 아니더라도 재생은 상처를 회복시키고 있었으니까.

바닥을 드러낸 체력에 결국 도망칠 수 없다 여긴 질병은 도망치는 걸 멈췄다. 아무리 깊은 지하로, 멀리 숨더라도 괴물은 쫓아올 테니까.

한껏 벌린 입으로 자신을 먹어치우려 하리라. 그래봤자 자신의 반의반도 미치지 못하는 조그마한 짐승이건만. 울분 혹은 격노를 토해내며 질병은 짐승이 오는 길을 향해 한껏 입을 벌렸다.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짐승은 그렇게 지층째로 단번에 삼켜지고 말았다. 대지를 병들게 하는 자, 질병의 이빨과 혀가 짐승을 유린했다.

그럼에도 상관없다는 듯이 짐승 또한 마주 물어뜯는다. 질병의 안에서 체액으로 녹아가면서도 물어 뜯고 찢어발기고 있었다. 마치 아귀도를 보는 듯한 참상. 목숨이나 뒷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허기를 채우려 할 뿐이다.

재앙의 괴물, 질병은 더 저항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짙디짙은 붉은 눈에 드러난 감정은.

―――끝없는 굶주림일 뿐이었으니까.

***

몸부림치며 싸운 두 괴물에 의해 지하가 부숴지고 땅이 드러났다. 질병이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순간, 마법사들은 침음했으나 이미 그 숨이 끊어졌음을 알게 됐다.

―――재앙은 쓰러졌다.

마침내,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가던 괴물의 숨이 끊어진 것이다. 믿기 힘든 현실에 마법사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질병이란 재앙의 이름은 그만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벅찬 가슴으로 오래된 용으로부터 뛰어내린 소녀는 누구보다 먼저 쓰러진 재앙을 향해 달렸다. 늑대는 분명 거기에 있을 테니까.

있다. 있어…! 저기 있어……!

홍유리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두 팔을 벌리며 늑대에게 달리려다, 그 발을 멈췄다. 숨이 끊어진 질병에게 늑대는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존재 따위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우드득. 우드드득― 고기 씹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알파?"

조심스레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알파의 움직임이 멎었다. 뒤늦게, 홍유리는 알파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단연 그 모습.

…정상이 아니다. 털과 가죽은 녹아내려 거의 보이지 않고 뼈에 붙어있는 살점과 근육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애초에 그 뼈조차 사라진 부분이 더 많았을 정도로.

질병의 살점은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넘어가지 못한 채 구멍 난 목덜미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붉은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용종이라던가 그런 게 아니라, 분명 늑대는 자신을 '먹이'로 보고 있었다. 이미 고깃덩이로 여기고 있었다.

목울대가 넘어가고 홍유리는 자신이 뒷걸음질 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끓는 듯한 낮은 울음이 들려왔을 때, 홍유리는 알 수 있었다.

알파에게 이성은, 지성은 남아있지 않다고. 다가가면 먹히고 말 거라고. 목울대가 넘어가 마른 침을 삼켰다. 싸늘하게 식은 땀. 뒷걸음질치던 홍유리는 짐승이 한 걸음 내딛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진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 그저 멍하니 올려다보는 것뿐이다.

……상처 입었을 알파를 위해 들고 온. 그가 마지막으로 떨어뜨린 플라스크, 모조 엘릭서를 손에 쥔 채로.

***

"그렇게 걱정인가요?"

꺼진 땅을 바라보면 그 심정을 이해 못 할 리는 없었지만, 계속 돌아보는 것에 굳이 물은 말이었다. 하지만 백소율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괜찮아요."

"그래요…?"

아넬라 또한 뒤를 돌아봤을 때, 나막 호로부터는 제법 멀어져 있었다. 대지가 부서지는 일은 더는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분명 싸움은 끝을 맞이한 것이리라.

연신 돌아보기는 하지만 백소율의 표정에 걱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 모를 믿음의 이유를 알 수 없어 아넬라가 물었을 때, 그녀는 옅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약속했으니까요."

반드시 선생님을 살리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돕겠다고. 그러기 전까지 그가 죽을 리 없으니까. 그가 약속을 깰 리 없으니까……

***

마랑의 턱이 벌어진 순간, 홍유리는 질끈 눈을 감았지만, 그 턱이 그녀를 씹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전에 온갖 마법이 가까스로 짐승을 밀어냈으니까.

"……!"

스퀘어 마스터들이 발한 마법이 짐승을 밀어냈다. 구사일생중에 홍유리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왜, 왜?"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성을 잃은 마랑은 사라진 성대로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달빛이 비치는 가운데, 소리 없이 우는 짐승을 본 모두가 몸을 떨었다.

새삼스레 눈앞에 있는 게 두 재앙을 걷어낸 마랑임을 깨닫고야 말았다. 빈사 상태에 이르러 지칠 대로 지쳐있었으나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죽여야만 한다.

재앙을 쓰러뜨리기 위해 보류해두었던 마법이 짐승에게 향해진 순간, 홍유리는 손을 그러쥐며 일어났다. 몸을 일으킨 홍유리는 두 팔을 뻗어 그 앞을 막아섰다.

―――이성 없는 짐승의 앞을.

마법사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도 불구하고 팔 벌린 채 막아선 그녀는 붉은 눈을 똑똑히 노려보았다.

두렵지 않을 리 없다. 알파를 적으로 두었던 이들이 어떤 기분을 느껴야 했는지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는 진작 풀려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비키진 않는다. 지척까지 다가온 짐승의 이빨. 턱이 닫혀 씹기만 해도 자신은 죽고 말리라. 진홍의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지만 물러나진 않았다.

서서히 벌어지는 턱에서 거친 숨이 흘러나와 그녀의 얼굴에 닿았을 때,

"――미안하다."

낮은 목소리와 함께 짐승은, 늑대는 그 앞에 쓰러졌다.

***

[……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Lv.49 → Lv.50]

늑대는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눈에 비친 것에서 시선을 돌리자 바닥에 눕혀진 자신을 둘러싼 스퀘어 마스터들이 오래된 용과 접촉한 채로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환계로 도망칠 수 있도록.

멍한 눈으로 시스템의 메시지를 읽은 늑대는 한숨 쉬었다. 50레벨 달성 조건이었던 질병을 쓰러뜨리라는 조건이 클리어되며 상처를 회복한 모양.

"……뀨우웃!"

꼬리로 자신을 토닥이는 페리. 왜 이제 일어나냐고 떼쓰는 듯한 모습에 지칠 때까지 쓰다듬으며 달래주었다. 그 모습에 안심한 듯 마법사들은 준비한 마법을 하나둘 거두기 시작했다.

다시 고개 돌린 늑대는 질병의 사체를 보았다. 이젠 움직이지 못하는 채 죽은 괴물이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다. 제법 뜯어 먹혀 형체를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등신 머저리…"

토닥이는 손길은 페리만이 아니었다. 선홍색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입으로는 온갖 욕설을 뱉어대지만 어울리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에 늑대는 힘 빠진 듯 웃었다.

"……울었나?"

"지랄하네."

신랄한 말에도 늑대는 다시 웃었다. 눈가에 찍힌 눈물 자국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미안하다."

어느새 밤이 다 흘렀는지 다시 해가 떠 있었다. 한나절이 흐른 건지 아니면 며칠이 지난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시간이 흘러 있었다.

"개새끼…"

그 말이 참 맞는다고 늑대는 그리 생각했다. 마법은 거두어졌지만, 자신을 속박하는 마법의 사슬은 여전하다. 확실히 이성을 되찾았단 걸 느꼈는지 다가온 스퀘어 마스터들이 수십 겹으로 단단히 둘러싼 사슬을 풀었다.

그제야 늑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애초에 그깟 사슬에 조여들 리 없었지만…

"미안하다."

고개 숙이는 모습에 홍유리는 와짝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짧은 단답에 늑대는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내가 널 죽일 뻔했으니까."

이성이 가라앉고 본능만이 남았다 해도 그런 게 변명이 될 수 있을 리 없다. 그때, 굶주림을 느꼈던 자신이 그녀를 죽이려 했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그래서, 죽였어?"

그게 뭐 어쨌냐는 듯한 되물음. 언뜻 아무렇지도 않은듯 해도 떨림은 숨길 수 없다. 그에 늑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죽이진 않았다. 그래서 다시 볼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 어떤 떠올리고 말았으니까.

반드시 살리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돕겠다고 한 달밤의 약속을.

그러나, 약속은 처참히 깨지고 말았다.

변혁한 그녀는 이제 되돌아오지 못한다. 인간이 아닌 용종으로서 살아가야 하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죽일 뻔했다.

그래. 약속은 깨진 것이다. 깨지고야 말았다. 누구도 아닌 자신에 의해……

"봐! 보라고!"

성난 듯한 목소리와 두 손이 자신의 머리를 붙잡았다. 까치발까지 들어 올려 간신히 닿은 손. 선홍색 눈동자가 자신을 부라리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날 죽였어?!"

노려보는 눈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쿵쿵 뛰는 심장과 닿은 손이 떨리는 것이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 두려울 텐데… 그런데도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 두려움을 꾹 눌러놓고 용기를 쥐어짜서.

"대답해…!"

씩씩거리며, 대답을 강요하는 목소리에 늑대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눈을 돌리고 싶었으나 그러질 못했다. 양옆으로 머리를 붙잡은 작은 손이 그걸 용납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을 만큼 미약한데도.

"그럼 봐! 보라고!"

이미 보고 있다. 그 눈동자도. 이마에 돋아난 뿔도. 등 뒤의 꼬리와 날개까지도 전부. 인간과 흡사하나 더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 모습을.

"……네가 말한 거잖아."

씩씩거리며 부라리는 눈이 흐려진다.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닦아낸 그녀는.

"도와준다며! 어떻게 변하든지 네가 도와준다며!"

……그건 누구도 아닌 자신이 했던 말. 하지만 그럴 자격이 있을까. 한순간만 의식을 되찾는 게 느렸더라면 그녀는 죽어 있었을 텐데. 두 번 다시 보지 못했을 텐데…….

"약속 지켜. 꼭 지키라고. 그러니까……!"

강요하는 목소리와 함께 참고 참았던 것이 흘러내린다. 홍유리는 이를 악물었지만 그런다고 넘친 게 흐르지 않을 리 없다. 다시 소매로 눈물을 닦을 땐 무언가가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알고 있는 감촉. 붉어진 코끝과 눈시울을 가리려 홍유리는 푹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계속 옆에 있으라고."

털을 강하게 쥔 손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떨려온다.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으나 그럼에도 사무치듯 크게 들려왔다.

……아직, 아직 약속은 깨지지 않았다. 그리고 유대는 끊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직은… 늑대는 참았던 숨을 뱉었다.

"……그래."

역병과 질병.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가는 최악의 두 짐승이 마침내 쓰러진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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