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 #79 깨지지 않은 약속 (2)
셈난 시의 주민들은 대부분 살아남았고 스퀘어가 추락했다지만 역병과 질병은 쓰러뜨렸다. 몬스터와 던전이 출현한 이후 가장 고무적인 성과가 아닐 수 없으리라.
역병과 질병. 유럽을 멸망시키고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가던 가장 큰 원인인 두 재앙이 쓰러졌다는 믿기 힘든 소식은 인류를 뜨겁게 달구는 화제가 됐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던 이들도 주둔하던, 징집되던 군인들과 헌터가 하나둘 돌아와 증언하니 믿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그 이면에 어떤 늑대의, 마랑의 소문 또한 퍼졌으나 금세 헛소문으로 치부됐다. 몬스터가 인간을 도울 리 없다는 편견과 설령 있다고 해도 역병과 질병에 대적할 괴물이 또 있을 리 없다는 상식으로 인해서.
다만, 마랑의 존재를 미리부터 알고 있던 몇몇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놀람을 안겨다 주기도 했다.
그리하여, 당장 조여드는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난 인류는 몇 십 년 만의 기쁨을 누리며 온갖 축제가 벌어지는 등 더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부외자의 입장에서.
"씨발……"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이마를 짚는 홍유리. 부유섬이 무너지면서 인류는 기쁨을 누리고 있을지라도 스퀘어는 더 없는 혼란을 맞았으니까. 재건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었고 스퀘어 자체가 필요 없다는 말까지 통일되지 않은 의견들이 마구 쏟아져나오고 있다. 작게 보면 마법사들의 거주지가 사라진 것이고 크게 보면 인류 최후의 보루가 무너진 것이었으니. 여파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다.
거주지― 물론 거기엔 홍유리의 저택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괜찮나?"
늑대의 등 위에서 홍유리는 푹 한숨을 쉬었다.
"……짜증 나긴 하는데 어쩔 수 없잖아."
설마하니 스퀘어의 추락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부유섬이 완전히 무너졌으니 레드 스퀘어에 있던 그녀의 저택 또한 무너진 셈이다. 물론 돈 따위야 평생 쓰더라도 썩어 넘칠 만큼 있지만, 문제는 저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있던 귀중품이나 연구 자료 같은 것들.
"네 피도 잃어버렸고……"
시무룩해 하는 모습에 늑대는 작게 실소했다.
다른 마법사들과는 달리 자기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조차 없었던 홍유리는 기껏 모아놨던 용혈을 몽땅 잃어버린 게 사무친듯 했다.
"그게 고민이었나?"
"……."
"용혈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 그리고…"
늑대는 무어라 말하려던 말을 삼켰다. 용혈이 스킬로 발현한 건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 이제 그녀 본인의 피 또한 용혈이었으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뭐? 뭔데?"
차마 그 말만큼은 하지 못했다. 종족이 갑자기 변한 탓인지 아직 깨닫지 못한 모양. 어차피 조만간 눈치챌 테지만, 괜히 알려줬다가 자기 팔을 긋고 있는 모습은 보기 싫었으니까.
말하라고 하는 홍유리를 계속 무시하며 걷다가 별안간 들려온 분개하는 듯한 목소리에 홍유리는 올라탄 채 그대로 고개만 돌렸다.
"홍유리! 너 이 사기꾼!"
"뭐 등신아."
"네가 웬일로 순순히 주나 했더니! 더 줘! 더 달라고!"
사기당했다며 도로시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홍유리는 코웃음 치며 그녀를 격침했다.
"까고 있네. 속은 게 등신이지."
도로시는 눈을 크게 떴다가 온갖 육두문자를 뱉기 시작했다. 육두문자라고 해봐야 바보 말미잘 해삼 멍게같은 초등학생 미만의 욕설… 재잘거리는 도로시를 무시하며 홍유리는 귀를 파는 시늉을 하다 손가락을 후 불었다.
물론 도로시의 심정도 마냥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협력해주는 대가로 받았던 용혈이 고작 30mL. 대마력을 가진 최상급 용혈임을 생각하면 그 가치에 빛이 바래는 건 아니다.
고작 말 좀 건넨 정도로 그만한 용혈을 받은 거라면 그냥 횡재했다고 할 정도가 아니니까. 애초에 그런 희소성 또한 용혈의 가치 중 하나. 하지만 그게 사실 무한 리필되는 거였다고 하면 조금 억울할 수는 있으리라.
"너… 그런 주제에 선심 쓰는 척이나 하고!"
울먹이는 듯 자기 딴에 온갖 육두문자를 남발한 도로시가 칭얼거렸지만, 홍유리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이젠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털을 잡아당기는 손길. 애써 무시했지만 두 번 세 번 반복되니 결국 포기한 늑대는 고개를 돌렸다.
"……!"
아까까지의 기세는 어디 가고 딱딱히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된 도로시의 모습에 늑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괜히 애를 괴롭히는 듯한 죄책감이 들어서.
어버버 입을 뻐끔거리던 도로시가 하얗게 질려 뻣뻣이 굳어 달아나자 홍유리는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 꼴 좋네."
"……마법으로 눌러주는 게 아니었나?"
"뭐. 저년이랑 해서 내가 질까 봐?"
잠깐 돌아본 늑대는 어느새 스승에게 안겨 엉엉 울고 있는 도로시를 보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용혈에 대마력까지 얻은 이상 만약에라도 홍유리가 도로시에게 질 일은 없으리라. 지금의 그녀라면 도로시가 아니라 아가일을 상대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을 테니까.
아직 스퀘어 마스터의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지만,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만큼 도로시와 싸운다는 게 새삼 의미가 있진 않으리라.
"후계자 자리에는 관심 없나?"
"귀찮기만 한데… 왜? 했으면 좋겠어?"
그 말에 늑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선택이었지 자신이 왈가왈부할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뭐……"
뿔이 돋아난 이마를 쓸던 홍유리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조금은 줘도 될 것 같기도 하네."
그에 늑대는 소리 나지 않게 웃었다. 등 위에 올라탄 그녀의 꼬리가 움찔거리고 있었으니까. 그에 홍유리가 눈을 부라릴 때까지 늑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
환계를 걷다가 피곤하다는 듯, 자신의 등 위에서 눈을 감은 페리와 홍유리. 늑대는 잠깐 스테이터스를 열어 자신을 확인했다.
[불길한 마랑(먹어치우는 자) Lv.50]
[업 55.38%]
역병을 쓰러뜨리며 28.27%를 보유하고 있던 업이 질병을 쓰러뜨린 후 27.11% 증가해 55.38%로 변해 있었다.
[멸망 확률 60.63% → 33.52%]
멸망 확률 또한 내려가 33.52%. 이 시점에서 이미 멸망의 그림자는 상당히 거둬졌다고 할 수 있으리라. 가만 놔두더라도 인류는 높은 확률로 멸망을 피할 수 있을 터… 적어도 몇 년 후, 단세혁의 세계인 원작이 종말을 맞는 시점까지는 말이다.
물론 모든 위협 요소가 제거된 건 아니다. 멸망 확률 자체가 단세혁이 활약했던 만큼 그가 없는 세계에서 자신이 대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하지만 확실한 건 몇 년의 시간은 벌었으리라는 점. 그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환계를 걸으며 늑대는 가만히 생각했다.
질병의 사체는 환계에 옮겨 고스란히 남겨두었다. 경험치가 최대치에 도달한 이상 지금 먹는 건 비효율의 극치였으니까. 오염을 먹어 치우기 위해 온 오래된 용이 있으니 누군가 눈독 들이거나 뺏길 일도 없으리라.
…비효율. 그래. 비효율이었다.
진화하지 않는 이상, 포식하는 데 의미는 없다. 따라서 반드시 시스템을 만나야만 한다.
질병과 싸우기 전, 만상의 주인은 분명 시스템에게 경고했었다. 시스템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리란 것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내면에 집중한다면 어떻게든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었던 모양. 시스템은 묵묵부답이었다. 저번처럼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으리라.
여러 의문은 있지만 당장 성장할 길이 막혀버린 이상 진화는 꼭 필요한 요소. 오히려 지금까지 진화 루트가 공개되지 않았다는 데 늑대는 작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혹시 자신의 성장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닌가하고. 더 이상의 진화는 없는 게 아닌가하고.
스킬 레벨을 높이는 건 가능하겠지만 결국, 토대가 되는 스테이터스가 상승하지 않으면 한계는 찾아오리라. 이대로라면 만상의 주인은커녕…
'…….'
이제 그리 머지않은 길을 늑대는 하염없이 걸었다.
***
스퀘어가 무너짐에 따라 마법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아직 제 기능을 하고 있는 커맨 국제공항에 모여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굳이 탈 필요가 있나?"
비행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자신이 직접 달리는 게 더 빠르다. 그런 의미가 담긴 말에 홍유리는 고개만 까닥였다. 거기에 있는 건 백소율과 아넬라. 뒤늦게 두 사람을 본 늑대 또한 마찬가지로 끄덕였다. 대략 800km 떨어진 길이었지만, 여정 중에 흩어지는 이들 없이 무사히 도착한 모양. 백소율 또한 이쪽을 보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선생님!"
달려온 백소율이 껴안자 홍유리는 답답하다는 듯이 그녀의 팔을 건드렸다. 놓으라는 듯한 제스쳐에도 백소율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뿐 손을 풀진 않았다.
"…답답해."
"몸은 좀 괜찮으세요?"
"괜찮으니까, 좀 풀지?"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사제를 뒤로하고 늑대는 그 너머에서 걸어오며 얼싸안고 있는 두 사람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 아넬라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지?"
지금 백소율을 가르치고 있는 게 아넬라인만큼 백소율은 그녀를 따라가게 될 테니까. 그 물음에 아넬라는 눈 사이를 좁혔다.
"그 모습 참… 안 어울리게 귀엽네요."
변화로 몸집을 줄인 상태. 이러고 있는 건 어쩔 수 없다. 공항에 스퀘어 마스터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본신을 드러내기만 해도 소란이 벌어지리라.
"……일단, 한국으로 가 보려고 해요. 아가일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장소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말한 아넬라는 슬쩍 누군가를 곁눈질했다.
"마지막은 보지 못하셨다지만…… 아가일이 묻힌 곳은 거기니까요."
"……."
"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요~."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지만, 늑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 아무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자신만큼은 그녀를 위로할 자격이 없으니까.
"그래. 가는 동안은 같이 가겠군."
"그래요~. 소율 양은 참 좋겠네~"
다분히 놀리려는 말에도 백소율은 순순히 끄덕일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면 재미가 없는데?"
툴툴거리며 아넬라가 멀어지자 늑대는 백소율을 올려다보았다.
"별일 없었나?"
"네. 조금 피곤하기는 해도…"
"……약속.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
"야."
따가운 눈초리. 홍유리의 말에 늑대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깨지지는 않았다."
"……."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계속 도울 생각이니까."
그 말에 홍유리는 고개를 돌렸고, 백소율은 그런 홍유리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마에 돋아난 뿔. 날 수 없을 만큼 조그마한 날개. 길게 돋아난 꼬리… 용으로서의 특징은 분명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더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모습인 만큼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 시선을 주는 이들도 많았다.
"……선생님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변혁은 끝났다."
더 변할 일은 없다고 확정지어서 하는 말에 백소율은 다시 끄덕였다.
"죽을 일은 없고, 잘못될 일도 없다. 하지만…"
"고마워요."
뜬금없는 감사 인사에 늑대는 홀린 듯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무릎을 굽힌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이젠 익숙한 손놀림으로 자신을 들어 올려 끌어안았다.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요."
"……나는."
백소율의 손이 자신을 쓰다듬는 것에 늑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약속하겠다. 반드시 살리겠다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달밤, 자신이 맹세하듯 그녀에게 했던 약속.
……약속은 지켜졌던 거다. 비록 홍유리에게 말했던 것처럼 변혁을 막지는 못했지만, 달밤의 약속만큼은 지킬 수 있었던 거다.
말을 잃은 늑대는 백소율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그녀의 손길을 느끼다가 늑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고작 말뿐인데 마음이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결 편해진 늑대는 조용히 답했다.
"고맙다."
"고마워요."
서로에게 하는 같은 말. 거기에 코웃음 치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이고. 또 신파 찍고 지랄이네. 닥치고 탈 준비나 하지?"
눈꼴 시다는 듯 눈가를 경련하는 홍유리와 그녀의 어깨에서 그 말이 맞는다는 듯 끄덕이는 페리의 모습에 늑대는 실소했다.
두 용종의 팔짱 낀 모습이 참 비슷해 보인다 싶어서. 어찌 됐건 간에 이제는 다시 돌아갈 시간. 늑대는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조용히 올라탈 수 있었다.
"아 그거 나 맞다고!"
여권과 종족 자체가 달라진 홍유리 때문에 작은 소란이 있었던 걸 제외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