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 #80 하얀 거짓말
약간의 소란과 함께 입국 심사에서 다소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마법사들의 보증에 힘입어 무사히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은 했지만, 우여곡절이 없었던 건 아니다. 마법사들의 중앙을 걸으며 홍유리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짜증 나게."
출국 심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만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자국에서 이런다는 건 또 다른 느낌이리라.
"괜찮으세요?"
백소율의 물음에 홍유리는 고개를 주억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 지랄 할까 봐 미리 마중 나와 있으라고 했더니…"
공항 밖. 주변 시선이 집중되는 것에 한숨을 푹 쉬는 그녀. 그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날개가 달리고 꼬리에 뿔까지 있으니, 설령 분장 같은 거라 생각하더라도 눈길을 끄는 게 당연할 테니까.
…아니 분장이라 생각해도 짜증 나지만.
백소율이 홍유리를 달래는 와중에 늑대는 아넬라에게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어디로 가지?"
"글쎄요…"
아넬라에게 배우고 있는 만큼 결국 백소율은 그녀를 따라가게 될 테니까. 그에 물었더니 아넬라는 누군가를 보며 말했다.
"…아마 대전일 것 같네요."
대전의 밤. 아가일이 죽은 곳. 은자림이 있는 은자의 숲이 대표 클랜으로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어차피 한국에 머무는 동안 한 번쯤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그동안 잘 부탁한다."
"걱정마세요. 다음 대 스퀘어 마스터가 되시겠다는데~ 어련히 알아서 잘 모셔야죠."
늑대가 말 없이 끄덕이는 것에 아넬라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분명 그러리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다는 뜻이니까.
다른 이도 아닌 역병과 질병이라는 재앙의 짐승을 쓰러뜨린 마랑의 반응을 허투로 받아들일 순 없다. 정말 그러한 재능이 있다는 뜻이리라.
"놀랍네요…"
물론 늑대는 거기에 나름대로 확신을 품고 있었다.
고원과 여명이 버젓이 자리한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던 마녀. 역병과 질병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재앙이라 칭할만했던 모습을 떠올리자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테니까.
"잘못 가르쳤다간 제 탓이 되겠는데요?"
부담스럽다는 말과는 달리 백소율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애초에 본인 입으로 말했듯 그녀가 하는 일은 기초를 가르치는 것. 백소율의 진짜 스승이 누가 될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다. …빚을 지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여겨진 모양. 이전처럼 마냥 놓아버린 눈빛은 아니다. 그랬다면 아넬라와 함께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으리라. 지금의 그녀라면 믿어도 될 터.
"잘 부탁한다."
"맡겨두세요."
그렇게 백소율과 아넬라를 비롯한 퍼플 스퀘어의 몇몇이 떠나갔다. 새삼스레 백소율과 작별 인사를 나눌 필요는 없으리라. 퍼플 스퀘어로 입문하던 날 아침. 이미 하고 싶은 말은 해 뒀으니까.
그래서, 조금 안심이었다.
만상의 주인이 있는 스퀘어가 아니라 언제라도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있는 한국에 있는 이상에야. 결국 그녀가 마음먹는다면 그런 것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늑대와 백소율은 잠깐 말없이 눈을 마주쳤다. 조만간 그녀에게 주었던 요정용의 알 또한 우화해 깨어나리라. 다음번에 언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기다리겠다고 말해준 이상 적어도 그때까지는 마음을 정해야 하리라.
언제까지나 그녀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을 테니까…….
***
불렀던 여명의 클랜원은 10분이 더 지나서야 도착했다. 차라리 환계로 걸어가자고 말했지만 홍유리는 아득바득 이를 갈며 대체 누가 이렇게 배짱이 좋은지 꼭 봐야겠다며 거절하는 것에 늑대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도착한 차량 하나. 그걸 보았을 때, 홍유리의 눈가가 경련했다.
"XT16……?"
어디서 많이 본 차였지만 금세 눈살을 찌푸렸다. 정작 그 차주는 지금 운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닐 텐데 하고서. 그런 홍유리의 생각과는 달리 투시로 선팅 된 창문 너머를 꿰뚫어 본 늑대는 실소하고 말았다.
"야 미안하다. 차가 좀 막혀서."
태연하게 창문을 내리고 멋쩍다는 듯 뒷머리를 긁는 거한이 운전석이 비좁다는 듯 타고 있었으니까. 혀를 찬 홍유리가 택시를 잡으려 하자 강태호는 깜짝 놀라 그녀를 만류했다.
"에이. 타고 가. 타고 가. 미안하다니까? 엉?"
그 말에 홍유리는 푹 한숨을 쉬었고 늑대는 왜 하필이면 이 양반이 온 건가 하는 작은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차에 탔을 때, 백미러를 슬쩍 돌아본 강태호는 엑셀을 밟았다.
"차는 어떻게 된 건데요?"
"진하가 못 쓰니까 빌렸지."
그 짠돌이가 자기 애마, 똥카를 빌려줄 리가 없다. 안 봐도 비디오. 어쩐지 상상되는 모습에 무어라 말하려던 홍유리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일은 다 끝냈냐?"
"……그래."
적어도 환영의 나비가 배신할 일은 없으리라. 만상의 주인을 비롯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요소들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강태호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뭐. 그런 것 같더라. 아차, 근데 인마 너 용 됐다며. 그것 좀 내려보지?"
"존나 싫거든요?"
"궁금한데……"
격한 반응에 강태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지금 홍유리는 공항에서 산 사이즈가 맞지 않는 롱 코트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괴이한 몰골. 아마 페리와 늑대가 없었다면 알아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리라.
"뀨."
홍유리가 용종이 된 이후, 동질감이라도 느끼는 건지 유독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으니까.
"아 좀."
"뀨~ 뀨~!"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페리가 칭얼거리는 게 마냥 싫은 눈치는 아니다. 그 모습을 보며 강태호는 휘파람을 불었다.
"이제 좀 벗어도 되지 않냐? 클랜 안에서도 그러고 있으려고?"
"아 싫다고."
"아 거 쪼잔하게."
그렇게 다시 찾은 여명. 클랜을 눈앞에 두고 홍유리는 혀를 찼다. 막상 돌아오기는 했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이리라. 스퀘어에서 너무 많은 일이 있기도 했고.
"이미 다 모여 있기는 한데… 잠깐 방에 갔다 와라. 그것도 이젠 좀 벗어놓고."
그 말에 홍유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디로 모일지는 자명하다. 회의실. 일의 경과를 보고받기 위함이리라. 스퀘어에서 있었던 일을 들어 알고는 있을 테니. 사안이 사안인 만큼 급하다는 뜻일 테니까.
홍유리가 방으로 가자 회의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연의 안내에 따라 강태호와 함께 회의실에 들어온 늑대가 태연히 촉수를 흔드는 것에 헛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짜였군요."
한쪽 팔이 없는 남자의 말에 회의실의 상석에 앉은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랜만이군. 일도 잘 끝난 모양이고."
마주 끄덕인 늑대는 회의실 내부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잠깐 방으로 돌아간 홍유리와 바깥에서 대기하는 하연을 제외하면 여명의 팀장 부팀장이 모두 모인 자리. 그들이 서로 다른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며칠 만에 돌아온 방… 백소율과 함께 있었던 게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
한참 멍하니 있던 홍유리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빨리 가는 게 맞을 테니까.
그러나 뒤집어쓴 코트 끝자락을 쉽사리 놓진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상관없다. 상관없는데… 아는 사람들. 그러니까, 혹시라도 클랜원들이 기겁하는 게 아닐까 싶어 그 불안감에 잘근잘근 입술을 씹어야만 했다.
아니, 그럴 리 없을 거란 건 잘 알고 있다. 알고는 있는데…… 그게 생각처럼 마냥 쉽지가 않았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자신을 달래듯 심호흡한 홍유리는 곧 코트를 벗어던지고 회의실로 향했다.
***
대강의 경과를 보고했다.
미주알고주알 솔직하게 전부 털어놓을 순 없었지만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는 최대한. 환영의 나비는 배신하지 않았고 탕아의 주인 되는 만상의 주인에게 겁박당하고 있었다는 것까지.
"……설마 그분이?"
구진하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세간에는 그 존재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마법의 시조. 여명의 팀장쯤 되고서야 가까스로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었을까. 천외천이라해도 과언이 아닌 인류의 정점이었으니까. 물론 그 실체는 고작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고.
"그럼 대체 왜 법계사에… 아니, 탕아를 설립했다니…"
혼란이 커 보인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오히려 몇몇은 늑대 자신의 말에 의구심을 품을 정도로. 그에 늑대는 쓰게 웃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으니까. 마법이 없었다면, 스퀘어가 없었다면 인류는 진작에 멸망했을 터. 그런데 마법의 시조인 그녀가 변절자들을 설립한 장본인이라는 건 너무 모순적인 이야기였으니까.
거기에 대한 답은 늑대 자신 또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시스템이라면 분명 알고 있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만상의 주인이 시스템에게 경고했을 리 없으니까.
―양보하는 건 여기까지라고.
어째서 자신에게 모든 답을 알려주지 않은 걸까. 어디까지 알고 있고 무얼 숨기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은 있지만 조만간 찾아가게 되면 모든 답을 알게 되리라. 늑대는 그것보다도 당장 해야 할 말부터 하기로 했다.
"그 문제를 차치하고 먼저 해 두고 싶은 말이 있다."
늑대의 낮은 목소리에 각자의 상념이 깨지고, 좌중의 시선이 다시 한번 집중되었다.
"역병과 질병. 두 재앙을 쓰러뜨린 것과 그러기 위해서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했던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다."
***
회의실 앞. 가능한 한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도착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하연까지 보지 않을 순 없다.
자신을 보는 순간, 그 차갑던 눈에 감정이 흐른다. 일순간이나마 이채를 띤 그 눈빛을 읽지 못할 리 없다.
"……오셨, 네요."
홍유리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지만 어쩐지 석연치 않은 분위기였다.
지성은 물론 그대로라지만… 이제는 인간이 아니게 됐으니까. 다소 꺼림칙한 시선을 받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각오한 일이라며 홍유리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이윽고 열린 문. 그 안에서 몇 쌍의 눈동자가 자신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짧은 일순간이나마 홍유리는 그때, 순순히 알파의 권유대로 모조 엘릭서를 들이키는 게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금세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냈다.
"3팀 부팀장 홍유리. 복귀했습니다."
"……그래. 어서 와라."
그런 말과는 달리 좌중의 눈빛은 심상치 않다.
대체 왜? 나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고작해야 뿔 좀 나고 날개 좀 생기고 꼬리가 돋아난 것뿐인데…
그 숙연하게 긴장된 장내의 분위기가 너무나 싫게 느껴졌다.
그래서, 자신을 살피는 그 시선들을 피해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데구르르 눈동자를 굴리다 알파와 시선이 맞은 홍유리는 그제야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 아무리 잘못되더라도 알파가 도와줄 테니까 괜찮다. 괜찮을 거야…….
불안한 마음을 털어버리며 홍유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만 그 모습이 마치 체념한 사람처럼 보인다는 걸 그녀 본인은 모르고 있으리라.
"하……"
누군가의 회한 같은 한숨 소리가 들렸을 때, 홍유리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그럴 리 없지만 혹시 클랜에서 추방되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망상을 해버리고 만다.
"……정말 수고했다."
그래서 들려온 말에 홍유리는 눈을 끔뻑이고 말았다.
수고했다고? ……뭐를?
"이야기는 전부 들었다. 역병을 쓰러뜨리기 위해 용혈을 들이켜야 했다고. ……정말 고생했다."
클랜장인 강태준이 진지한 눈빛으로 끄덕였고 구진하는 입술을 씹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 강태호마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침음하는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홍유리는 조심스레 생각했다.
이게…… 대체 뭔 개소리지?
그 모습을 보며 늑대는 속으로 웃었고 강태준은 아직 끝나지 않은 말을 이었다.
"네 희생을 폄하할 이는 아무도 없다.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면 내게 알려라.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니."
아무리 그래도 도로시를 이겨먹겠다고 마신 거라고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으니까. 때때로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늑대는 그리 생각했다.
……그래. 모두를 위해서.
좌중의 숙연한 분위기 속,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홍유리만이 연신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