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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05화 (205/407)

〈 205화 〉 #84 나아가는 길

한없이 부푼 공허가 사라졌을 때, 늑대는 마침내 자신을 괴롭히던 허기가 해소됐음을 느꼈다.

더 이상, 짐승은 어디에도 없다.

사라진 건 아니다. 결여 또한 언제든지 불러올 수 있을 터.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미 극복했으니까. 이제 결여와 본능은 더 이상 자신에게 어떤 장해도 되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홀로 남은 늑대는 애타는 목소리를 따라 심연 속을 하염없이 걸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지만 늑대에게 망설임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을 부르고 있었으니까.

쉬어버린 목소리. 오히려 그렇기에 간절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 가야만 한다.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서 계속 걸어 조금씩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 한 걸음. 그 길의 끝에서 늑대는 잠깐 뒤돌아보았다.

이제는 사라진 본능… 아니, 그렇지 않다. 이제 본능이라고 불릴만한 건 온전히 늑대에게 스며들었으니까. 그 전부를 갈무리해냈으니까.

[공허―격의 상승 1/3]

그에 따라 굶주림을 알게 된 것을 넘어 아예 극복해버린 공허의 격은 짐승의 것을 넘어서 있었다. 비록 2/3에는 닿지 않았지만 그게 그리 멀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잠깐 보고 있던 늑대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심연 바깥으로 향하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뎠다. 가라앉았던 의식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

늑대의 의식이 부상함에 따라 끊어졌던 연결이 다시 이어졌다. 스킬과 연결된 순간, 늑대의 몸이 빠르게 재생하기 시작했다. 넝마였던 몸이 돌아와 다리가 자라남에 따라 체고가 높아져 간다. 붉은 몸이 다시 검게 물들어갔다.

홍유리는 넋 나간 채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 차렸다. 회복하고는 있지만 그게 알파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만약 알파가 아닌 짐승이라면 또 하나의 재앙이 탄생할 뿐이니까.

화색 하는 이은하를 말리며 수인을 맺는 한편, 언제든 현계로 돌아갈 수 있게 준비했다. 하지만 그 순간,

"뀨웃!"

"……!"

돌발행동과 같은 날갯짓. 날아가려던 페리를 저지하려 했지만, 기어코 점멸로 벗어나고야 말았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혹여 페리가 갈가리 찢겨 흩뿌려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지척까지 닿은 페리가 늑대의 뺨에 머리를 비비고 있었으니까. 그에 이은하와 홍유리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뀨웅! 뀨우우! 뀨우웅!"

연신 반갑다는 듯 꼬리를 흔들면서 머리를 비비고 핥고. 할 수 있는 애정표현이란 표현은 죄다 해버리는 모습에 늑대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났길래 이리 불안해하고 있었을까. 유난히 수척해 보여 안쓰러웠다. 그냥 부정이나 먹으며 천천히 기다릴 것이지…… 아니, 차라리 처음부터 데려오지 말 걸 그랬나.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이렇게까지 반겨주니 따스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깊은 바닷속에서 차갑게 식었던 가슴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녀석의 검게 변한 눈 밑을 쓸어주었다.

깊은 자의식의 바다에서 들었던 울음 소리는 페리의 것이다. 그것만큼은 착각하지 않는다. 이성 잃고 본성만이 남았던 자신. 하지만 어떻게 변하든 녀석만큼은 계속 옆에 있어주었던 것이리라. 슬퍼하면서도 떠나지 못했던 것이리라.

……새삼스레 페리가 없는 삶은 이제 떠올릴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런 감정을 담아 가만히 만족할 때까지 쓰다듬어주니 금세 울다 지쳤는지 자신에게 기대어 잠들어버렸다. 늑대는 그 무게를 느끼며 다시 숨을 뱉었다.

그래. 울음소리가 페리였다면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는 분명……

늑대는 기척이 느껴지는 조금 먼 곳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면면들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린 지 모르겠지만 짧지는 않았으리라. 그동안 계속 자신을 부르고 있었던 거다.

페리만이 아니다. 홍유리가 있었다. 오래된 용이 있었다. 이은하도 있었다. 찾아오지 못하게끔 일부러 행선지도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

늑대는 가만히 곱씹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왜 왔느냐고 다그쳐야 하나 아니면 일단 와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 말 없이 보고 있는 그들에게 일단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음을 깨달았다.

"……오래 걸려서 미안하다. 돌아왔다."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이은하와 홍유리가 달려들었다.

***

어느새 밤이 되었다.

불씨 없이 타오르는 검은 불꽃에 둘러앉아 밤을 보내고 있었다. 울다 지친 페리는 새근새근 잠들었고 자신이었던 것들은 전부 소각했다.

겁화가 타오르며, 환계 일부를 엉망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거울에 비친 세계인만큼 머잖아 돌아오게 되리라.

"개새끼……"

콩콩, 치는 소리. 홍유리가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주먹을 때리고 있었다.

얼마나 소리쳤는지 목소리가 완전히 쉬어버렸다. 그렇게 투덜거리는 그녀의 머리 위를 툭툭 건드리며 쓰다듬어주자 마찬가지로 피로했는지 졸린 눈을 애써 참으려 한다. 표정에 보인 일말의 불안은 안심하라는 듯 쓸어주자 금세 사라졌다. 자신의 손길을 음미하며 홍유리 또한 페리처럼 조용히 잠들었다.

"놀랐어…"

휘둥그레 뜬 눈으로 마찬가지로 쉰 목소리가 그리 말하자 늑대는 고개를 돌렸다.

"설마 부팀장님이……"

믿기 어렵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 하기야 그렇게 달려들어 껴안고 있었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리라. 지금도 이렇게 품속에 잠들어있으니.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보자면 더더욱.

늑대는 말없이 끄덕였다. 이제 와 부정한다는 것도 웃긴 일이었으니까. 또한,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

오가는 말 없이 묘한 정적과 함께 검은 불꽃만 타들어 갔다. 이은하는 그렇게 멍하니 불꽃을 보고 있었다. 저번에 공허를 보고 따라 하려던 것처럼 겁화도 흉내 내려는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때때로 한숨 쉬며 끙끙거리거나, 이마를 찌푸리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도 하면서.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늑대가 그녀에게 말했다.

"피곤할 텐데."

이은하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해왔다.

"자둬라.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응."

"와줘서 고맙다."

이은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뉘었다. 뒤척이던 그녀는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잠에 들었다. 그렇게 새벽이 타들어 가고 아침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눈을 뜬 건 선홍색 눈동자였다.

"일어났나?"

"어."

짧은 단답이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진 것과는 달리 한참이나 눈을 마주해왔다. 그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던 홍유리는 별안간 자사의 털 사이에 손을 넣었다.

털의 감촉을 느끼는 홍유리와 마찬가지로 늑대 또한 자신에게 닿은 그녀의 자그마한 손길을 느꼈다. 말없이 점차 흐른 시간 속에서 불안한 듯 물어온다.

"와서 싫어?"

늑대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홍유리의 눈동자가 떨렸다.

"위험했으니까."

축 늘어진 꼬리와 내리 깐 눈썹이 실망을 드러낸다. 그에 늑대는 촉수를 뻗어 아까 그녀가 그랬듯 붉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싫었다."

"……."

"다음번엔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응."

"그래도 네 목소리는 잘 들리더군."

"……."

"고맙다."

어느새 쓰다듬고 있는 손길. 아까까지 시무룩 해있던 눈이 잠깐 멍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입꼬리가 씰룩인다. 언제 그랬냐는 듯 살랑이고 있는 꼬리. 조그마한 날개가 파닥거리자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어쩐지 페리와 닮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

조금 더 시간이 흘러 모두 깨어났을 때, 늑대는 그들에게 아직 남은 일이 있음을 알렸다. 본능에 관한 건 해결했고 공허는 온전히 수습했어도 아직 진화하진 않았으니까. 남겨둔 질병의 사체를 먹을 때가 온 것이다.

"……그러니까, 진화할 거라고?"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좌중에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해보면 페리와 백록을 제외하면 누군가에게 진화하는 순간 자체를 보여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

진화할 거라는 말에 그네들이 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늑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지?"

"……네가 진화한다니까 존나 말도 안 되는 것 같아서."

"……?"

"아 됐어. 지금 할 거야?"

늑대는 다시 끄덕였다. 망설일 이유는 없으니까. 질병의 사체를 먹어 치우면 아마 10레벨 도달 조건에 걸릴 거라 생각하지만 확실히 9레벨까지는 달성하고도 남으리라.

생각을 정리하고,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 ――― ] - 진화 가능

이전과는 달리 루트, 제시된 길이 아니다.

시스템은 말했었다. 앞으로의 길은 오로지 자신이 개척해 나가게 될 것이며 누구도 개입할 수 없을 거라고.

어디에 다다르게 될지는 모른다. 거기에 일말의 불안은 있지만 망설이진 않았다. 나아가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해야 할 일은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있다.

그러자, 의식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가라앉았던 때와는 달리 더 높은 곳으로 떠오른다.

어느새 늑대는 어둠 속에 쌓여있었다.

아니, 그건 어둠이 아니다. 형언할 수 없는 것. 잃어버린 자들이라 불리는 그들이 하나둘 눈 뜨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서 늑대는 자신에게서 무언가가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 가지고 있던 것이 풀어져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색으로 빛나는 선이 자신으로부터 새어 나왔다.

"……."

말도 안 되지만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 선이 나풀거리며, 어두운 공간을 조금씩 밝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선들의 정체는 곧 알 수 있었다. 스스로 극복했다는 증거. 오롯한 자신의 의지― 극기.

여태 쌓아온 극기가 흘러나와 업의 공간에 휘날리며 그것들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검은 공간. 형언할 수 없는 그것들이 스며들어왔다.

그들 하나하나가 보이지 않는 손짓을 거듭했다. 손짓에 손짓이 이어진 순간, 늑대는 여태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길게 이어진, 끊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길이었다. 자신에게 스며들어온 잃어버린 자들이 서로 다른 형상으로 그 길 위에 서 있었다.

그들이 한목소리로 물어왔다.

어떤 길을 걸을 것이냐고. 어디로 나아갈 것이냐고.

―――가야 할 길은 명백하다.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사선을 넘어서라도 재앙과 멸망을, 그리고 종말을 막는다. 결코 흐려지지 않을 타오르는 희망을 확인하고 그 의지에 순응하듯 잃어버린 자들은 업으로써 늑대에게 귀속되었다.

스며들어온 그들의 감정이, 기억이 다소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늑대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었으니까.

그렇게, 공간은 사라져간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무의 공간에 늑대는 홀로 서 있었다.

홀로 남은 늑대는 어느샌가 자신이 변했음을 알게 됐다.

***

"……."

돌아온 순간, 시야가 변해있었다. 여태까지보다 훨씬 높은 곳을 보고 있었다. 수십 킬로미터 바깥이 훤히 보인다. 단순히 시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만큼 거대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무려 십수 미터에 달하는 체고. 멍하니 올려다보는 시선들을 느꼈을 때, 늑대는 자신이 불타고 있음을 알게 됐다. 내면이, 내부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당한 걸까? 아니, 아니다. 그저 자신의 심장이 뛸 때마다 용암과 같은 진득한 피가 이글거리고 있을 뿐이다.

길게 늘어진 털. 목 주변에 자라난 검은 갈기. 거대해진 육신과 이글거리는 심장.

육신――― 그 말에는 어폐가 있다.

늑대는 이것이 육체가 아님을 깨달았다. 한 발 내디딘 순간, 땅이 울리는 일은 없었다. 화산지대를 깨부수며 달렸던 괴물과는 달리 자신에게 질량은 없다.

"……."

그 순간, 늑대의 몸이 줄어들었다. 스킬을 사용해 줄인 것이 아니다. 그저 생각하고 의지를 가진 것만으로 그리 되었을 뿐.

늑대는 자신의 몸이 육체가 아니라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생물의 영역을 벗어나 정신체로써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아득한 차원과 격을 넘어 새로운 걸음을 내디뎠다는 것을.

[불길한 마랑(재를 거두는 자) Lv.1]

재앙을 막는 불길한 마랑, 재를 거두는 자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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