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 #89 기싸움 (2)
백소율이 여명에 온 것과는 별개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종종 기 싸움을 벌이기는 했지만,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득바득 이를 갈기는 해도 홍유리는 손을 쓰지 않았고, 백소율 또한 도발하던 태도가 마치 선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는 듯 선을 넘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 선이 상당히 빠듯하다는 점. 그리고 홍유리가 보는 앞에서만 지킨다는 점이다. 종종 끌어안거나 무릎 위에 앉히려 하는 스킨십은 예전부터 해왔었지만… 홍유리가 업무로 자리를 비울 때면 요즘 따라 손이 자꾸 내려가려 한다.
"아 죄송해요. 미끄러져서."
촉수로 쳐내자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곳을 쓰다듬지만, 도무지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내 몸에 참기름이라도 발라진 게 아니고서야 그렇게 미끄러질 리가 있나.
빤히 바라보자 그것도 좋다는 것처럼 웃어 보인다.
차라리 한 번 더 선을 그을까 싶었지만…… 괜히 더 엇나갈 것만 같아 조심스러워 일단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마법에 진전은 있나?"
묻는 말에 옅은 미소로 어떨 것 같냐고 되물어왔다.
……마력은 많이 늘어나지 않았다. 물론 그마저도 그녀의 기준에서였지 다른 이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였다.
스테이터스로 확인할 수 없는 마법이라면 문외한인 자신이 평가할 영역이 아니다. 그래도 고작 그사이에 늘어봤자 얼마나 크게 늘었겠느냐 하는 생각은 들었다.
백소율의 재능은 마법 그 자체가 아니라 마력에 대한 것이었으니.
"슬슬 오실 것 같네요."
홍유리의 기척을 감지한 모양. 말은 그렇게 해도 떨어질 기미가 없어 한숨 쉰 늑대는 그림자로 자신을 덮었고 백소율이 은근슬쩍 둘러놓은 마법을 먹어 치웠다.
"이러면 서로 불편해져."
"……죄송해요."
벌써 6번째. 고작 추적 마법에 불과하지만, 만약 홍유리가 알게 되면 길길이 날뛰게 될 테니까. 어차피 혜견과 극기를 지니고 있는 이상, 백소율이 아니라 환영의 나비가 했다 한들 몰라볼 리 없다.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한데…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혹시… 화나셨어요?"
조심스레 묻는 말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손을 꼼지락거리고 눈썹을 내리까는 모습에 잠깐 생각하던 늑대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백소율의 무릎에서 내려왔을 때, 마침 홍유리가 옥상으로 올라왔고 게슴츠레 뜬 눈으로 백소율을 흘겼다.
"너 또 이상한 개짓거리 한 거 아니지?"
"……선생님?"
자신을 못 믿느냐는 억울함 섞인 눈빛에 홍유리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다 믿어도 너는 못 믿거든?"
"그래요? 전 선생님 믿는데."
"……."
거기에 말문이 막힌 걸까. 어버버 거리던 홍유리를 보고 백소율이 장난이라고 웃었다. 그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년, 아넬라랑 지내더니 그 의뭉스러운 성격이 옮은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하여간 자색 년들은 정상이 없다니까. …너 이런다고 될 것 같아?"
같잖다는 듯한 코웃음과 함께 묻는 말에 백소율은 담담하게 끄덕였다.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요. 그러니까…"
백소율의 시선이 잠깐 자신에게 향하더니, 다시 홍유리를 보았다. 이내 소리 없이 입 모양만으로 어떤 단어를 말하자 질색한 홍유리가 중지를 들어 올렸다.
"좆까지 마! 존나 싫거든? 내가 왜?!"
"그러다 후회하셔도 몰라요."
"미친년."
또 말다툼을 시작하는 둘을 보며 늑대는 가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 어디서부터 꼬여버렸나 싶어서.
더 확실히 쳐내는 게 맞았을까. 아니면 그때 홍유리가 베란다로 가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나. 꼬이고 꼬여서 두 사람은 앙숙 관계가 돼버린 둘. 예전의 모습을 알고 있는 늑대로서는 그 모습이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말싸움이 거세지자 그사이에 끼어들어 둘을 떼어놓았다. 씩씩거리던 홍유리는 자꾸 울리는 전화를 짜증스레 받았다.
"아 뭐!"
[……]
"아 씨발 그럼 가든가!"
[……]
"뭐? 전우택은?"
[……]
핸드폰 너머 상대와 한참을 실랑이하던 홍유리는 짜증스레 통화를 끊고 집어넣었다. 꼬리가 몇 번이나 바닥을 내리치는 게 어지간히 짜증 났다는 뜻이다. 그에 놀란 페리가 등 뒤로 숨어 빼꼼 고개만 내밀었고, 눈을 부라린 홍유리는 백소율에게 씹어뱉듯 경고했다.
"너 적당히 해. 알아들어?"
대답 대신 가지 않으셔도 되냐고 웃으며 묻는 말에 홍유리는 박박 이를 갈았다.
"……금방 올 거야. 금방 온댔어!"
허튼짓하지 말라며 경고하는 것에 백소율은 끄덕였고, 늑대는 홍유리의 불안해하는 눈을 잠깐 보고 있었다.
"…가셨네요. 계속할까요?"
"아직 안 갔거든? 너 진짜…!"
"장난이에요."
살포시 웃으며 입을 가리는 백소율을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늑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불안하면 함께 가자고 하면 될 텐데 차마 그러질 못하는 건 자존심 때문이리라. 괜히 못 믿는 것 같다던가, 지는 것 같다고 느껴져서.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며 늑대는 잠깐 생각했다.
기회를 주겠다고 한 건 다름 아닌 홍유리였지만,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참지 못할 것 같다. 누군가 그녀를 쓰다듬거나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아니, 자신이라면 애초에 그런 말 자체를 하지 않았으리라.
기회를 주겠다고 말한 게 그녀의 뜻이었다면 그걸 거부하는 건 자신의 뜻이리라.
……역시 엇나가더라도 선을 그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리 분별을 못할 사람은 아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그나마 자신에게만이라면 괜찮다. 하지만 만약 남에게 마법을 걸게 된다면… 늑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백소율."
"네."
조금 늦은 대답이 돌아오자 할 말을 고르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정했다.
"너한테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미안하게요?"
"그래."
스퀘어에 가기 전부터. 그녀가 고백해온 그 날부터. 모를 리 없다. 애써 모른 채 얼버무렸을 뿐이다. 그 때는 망설이고 있었으니까. 백소율에게 넋을 잃었던 것도, 그녀에게 끌렸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한심하게도 그 감정을 지금까지도 전부 잘라내지 못했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테지만, 그 전에 끊어내는 게 도리이리라.
"……홍유리가 너한테 기회를 줬어도 난 그러지 못해."
"……."
"홍유리를 배신할 순 없으니까."
또한, 그러고 싶지도 않다. 졸업식 날에 이은 두 번째 가위질에 그녀는 무엇을 느꼈을까. 백소율은 천천히 나를 들어 올렸다.
"……그래서 미안하신 건가요?"
읽을 수 없을 만큼 깊은 눈동자가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끔 마주해온다. 그 말은 본질을 꿰고 있었다. 답을 주진 않았다고는 해도, 말로 꺼내지 않았어도 서로가 알고 있었으니까.
홍유리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먼저 그녀에게 등 돌리고 밀어낸 셈이다. 이제 와 너를 받아줄 순 없다고 멋대로 끊어낸 거였다.
그런 주제에 잘라내려는 건 얼마나 제멋대로인가. 그래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래."
늑대는 한숨처럼 눈을 감았다. 또 상처 입히고 말았다고 그리 생각했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백소율은 웃고 있었다.
"괜찮아요."
하얗게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왜냐면 이라고 백소율은 말을 이었다.
"그래도 계속 사랑할 테니까."
***
늑대와 페리를 발견한 이은하는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커피를 들이켜고 있는 건 평소와 같은데 어쩐지 깊은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상담… 그런 걸 해줄 수 있는 주제가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이은하는 머리를 흔들었다.
"뀨?"
그래서 그냥 지나치려다 페리에게 발견돼 멋쩍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냥 지나칠 수는 없겠다고 생각해 어색하게나마 옆자리에 앉았다.
평소에는 그렇게 시간이 잘 가더니… 오늘따라 옆자리가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분명 알파가 고민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팀장님이랑 소율이가 기싸움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물론 다른 사람들은 차마 그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은하는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진심이라는 걸.
물론 어느 쪽이냐고 하면 자신도 꽤 진심으로 알파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싸워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어차피 알파는 사람도 아니지 않나? 그럼 법도 상관없잖아. …있어도 제재할 수가 있나? 근데 굳이 싸우면서까지 그래야 할까?
그러니까, 그냥 다 같이 가지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럼 다 좋을 텐데. 어차피 전부 행복하면 된 거 아니야?
이은하는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
"뭘 그리 생각해?"
"아무것도 아니다."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늑대는 새삼스러움을 느꼈다. 얼마나 됐다고 여길 집이라 인지하고 있는 자신에게.
그녀의 뒷머리를 눌러 끌어안았다. 붉은 머릿결이 닿는 감촉. 갑작스러운 행동에 잠깐 놀란 듯하던 홍유리는 이내 자신을 마주 안아주었다.
"왜?"
가벼이 묻는 말에 늑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을 음미하는 것처럼 그렇게 가만히 만끽했다.
조금, 술렁임이 가라앉았다.
두 번이나 잘라냈음에도 불구하고 백소율은 포기하기는커녕 계속 사랑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라고 상처받지 않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했다.
거부하는 자신조차 힘든데 거부당하는 그녀는 더하리라. 그게 정말 진심이라는 걸 알기에 정말 포기하지 않을 걸 알기에 다시 끊어낼 말을 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다가온다면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밀어낼 수 있을까. 얼마나 잘라내고 상처입혀야만 하는 걸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 온기를 느끼며 늑대는 가만히 생각했다.
중간에 들어온 페리와 홍유리가 모두 잠들고 나서도 생각을 이어나갔다.
***
그런 나날들은 좀 더 이어졌다. 3월이 머지않은데도 여전히 홍유리와 백소율은 서로 얼굴을 마주치기만 해도 다투고 있었고 이은하는 종종걸음으로 피하기 바빴다.
이른 아침부터 온 연락에 늑대는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여명으로 향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강태준이 앉아있었고, 그 옆에 드물게 강태호 또한 있었다. 심지어는 여명에 머물고 있다는 환영의 나비까지 자리해있다.
"왔나?"
말없이 끄덕이는 늑대에게 강태준은 서류철을 던졌다. 가볍게 받아 읽어내려간 늑대의 머릿속에서 곧 생각이 정리되었다.
"광휘가 실종됐다고?"
"그래. 마지막 행적은 항저우라더군."
"……."
문제는 그렇게 연락이 두절된 지 일주일이 되어간다는 것. 다른 이라면 모를까 광휘라는 믿음이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소모하게 만든 셈이다.
"그래서 바라는 건."
"광휘를 찾는 것. 가능하면 살아있는 채로. 분명 무슨 단서를 얻었으니 놈들이 움직였을 테고 실종된 거겠지."
실종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강태준은 말했다. 세계 최고의 궁사가 연락조차 하지 못할 상황에 놓였다는 뜻이니까. 제법 높은 확률로 죽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리라.
"그래서 네 동행을 부탁하고 싶다."
광휘를 죽였다면 그만한 세력, 탕아들과 연관되어 있을 확률은 상당히 높다. 설령 위험이 있더라도 알파가 있다면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고원에서는 우리와 별개로 움직이게 된다. 환영의 나비께도 동행을 부탁드렸으니……"
여명에서 차출되는 인원은 강태준 본인과 강태호 그리고 홍유리까지. 1, 2, 3팀의 팀장들 거기에 몇몇 클랜원들과 임의로 동행하는 환영의 나비라는 뜻. 늑대는 잠깐 환영의 나비를 물끄러미 보았다. …만상의 주인에게 원한이 있는 그녀가 그 요청에 응한 건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당장 내일 항저우로 출발하게 될 거다. 동행할 텐가?"
그 물음에 늑대는 잠깐 생각을 정리하곤 답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