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화 〉 #96 격돌
그것을 삼킨 순간, 늑대는 전신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작은 태양을 삼킨 듯하던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친다.
이게 어떤 물건인지는 알고 있다. 흑호와는 달리 단순히 압도적인 정보량으로 늑대의 머리로는 혜견으로조차 온전히 엿보지 못한 연금과 마도의 극의이자 부수적인 성과.
―――모조 엘릭서. 신의 피를 모방한 인류의 기적.
한낱 리치로 영락했던 침묵하는 입이 생전의 힘을 되찾고 그 너머로 이끌었던 물건? 아니, 이건 고작 그런 게 아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몸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재생했다. 아까 다진 고기가 됐던 육신에 시간을 덧씌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체가 된 격에 녹아든 모조 엘릭서는 늑대의 전신에 흐르는 피를 단숨에 물들였다.
생물종 정점에 위치하는 용혈을, 생물 바깥의 영역으로 도약시켰다.
정신체의 격에 어울리지 않던 늑대의 신체 능력을 격에 맞게끔 끌어올린다. 그건 지금의 늑대가 닿지 못한 아득한 영역. 어긋났던 균형이 맞물린 순간, 늑대는 일시적으로나마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했다.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한 물건을 '고작' 스퀘어 마스터를 회복시키는 데 사용했었다는 것을.
두 번 다시 만들어내지 못했던 기적이 스며들자 늑대의 눈이 붉게 빛났다.
[만복(C) Lv.10이 최대 레벨…]
[공허(A) ― 격의 상승 2/3]
그건 정말 기적이라 불릴만한 일. 스며든 기적은 그러고도 남아 아직 닿지 못한 영역까지 공허를 끌어올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공허란 먹어치우는 힘. 양질의 먹이를 먹었다면 성장하는 게 당연하다.
타오르는 몸을 주체하지 못한 늑대는 곧장 도약했고, 짓눌러졌다. 다진 고기로 변해 지면에 들러붙어 꿈틀거렸다.
어느새 소녀는 다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염원을 눈앞에 둔 순간이라고 하나 방심할 리 없다. 늑대의 기척을 느끼지 못할 리 없다. 그렇게 어설프지 않다.
"……."
늑대를 쓰러뜨리는 건 쉽다. 하지만 문제인 건 그 짧은 순간에 4번 죽였는데 죽지 않았다는 점. 저 멀리 떨어진 마개 없는 플라스크를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래. 가지고 있었지. 정말 고집불통이네.
죽지 않게끔 알면서도 내버려 두고 있었는데 그걸 자신에게 쓴다는 게 묘하게 기분이 이상했다. 다소 생소한 감정에 고개를 갸웃거렸을 만큼.
"그런다고 될 것 같아?"
그래도 딱 거기까지. 많이 강해졌다지만, 아직 멀었다. 현격한 차이가 있는 이상 싸움은 성립하지 않는다.
달려드는 붉은 눈의 괴물을 무한에 가까운 마력이 몇 번이나 짓눌렀다. 다진 고기로 만들다 못해 액체에 가깝게 만들고 그걸 넘어 뇌까지 짓뭉개버렸는데도.
―――죽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늑대는 반쯤 불사의 영역에 있었다. 발이 없으면 기어서라도 그러지 못하면 이빨을 바닥에 박아서라도.
그 집념은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듯 꺾이지 않는다.
"……."
정말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 설령 불사라 한들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재생할 만한 조각도 남기지 않으면 얼마든지. 하지만… 늑대가 가진 가능성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염원하던 순간을 앞에 두고도 저 찬란하게 타오르는 희망이 아깝다고 느껴질 만큼. 늑대가 고집부리고 오기 부릴수록 더더욱.
필사적으로, 죽음을 불사하고 다가오는 그 처참한 모습이 더 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건 오래전에 자신이 잃어버린 감정이었으니까.
아주 잠깐, 넋을 잃어버린 사이에 늑대는 한계치까지 바람을 일으켰다. 모조 엘릭서의 신혈이 억지로 늑대의 가능성을 열어젖히고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낸다. 육신에 제한받지 않는 격. 정신체인 늑대이기에 그 힘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폭풍 따위가 아니라 더 고차원에 있는 바람이 늑대를 밀어냈다. 상식을 벗어난 아득한 속도로 소녀의 주변을 둥글게 달렸다.
그 움직임에 또 다른 거센 바람이 몰아친다. 눈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칠흑의 장막 속을 달린 늑대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아니, 그건 정말 착각일까. 끔찍한 중압감이 늑대를 짓누르기 시작한다. 공허를 일으켜 맞서도 검은 마력은 공허마저 우습다는 듯 짓눌렀다.
힘의 수준이, 차원이 몇 단계는 떨어져 있다… 격의 상승이 아니었더라면 잠깐도 견디지 못했으리라. 공허와 겁화를 모두 일으키고 나서야 무한에 가까운 무진장한 마력의 중압으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늑대가 두른 바람이 폭발해 그 자신을 밀어낸다. 보다 더 아득한 속도로 의미 없을 만큼 짧은 시간 만에 만상의 주인에게 도달했다.
한계까지 벌어진 턱이 소녀의 머리통을 씹어 부수기 직전, 늑대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
……분명 쓰러뜨릴 수 있었다. 가능성은 열려있었다. 초감각과 육감이 가능하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끝났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지면에 처박혀 있는가.
몸이 무겁다. 중력이 수만 겹이 돼 짓누르는 것 같다. 온몸이 말을 듣질 않는다.
심지어 모조 엘릭서의 효과가 사라져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늑대는 아득해지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혹여 여태까지 본 게 환상이었나? 아니면 기억이라도 지워진 건가? 그녀의 또 다른 수식어인 불가해라는 단어를 떠올린 늑대는 실소하고 말았다.
이쯤 되니 오히려 여왕에게 경외심이 들었다.
영락한 상태로 이런 불합리한 존재와 싸웠던 건가 하고서.
――무수한 가시와 말뚝에 꿰뚫려 장식됐다. 그마저도 재생하곤 있지만, 마력에 짓눌려 재생하는 속도보다 파괴되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러게 말을 들었어야지."
뚜벅뚜벅 걸어온 소녀가 늑대의 앞에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너랑 싸울 생각은 없었는데… 늘 날 곤란하게 만들어."
어쩌면 좋을지 고민하며 소녀는 늑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아주 작게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리자 소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미친 걸까? 그럴 리 없다. 희망이 얼마나 끈질긴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여기까지 와서도 순순히 포기할 리 없는데.
그럼 왜 웃고 있을까. 번뜩 떠오르는 생각에 몸을 돌린 소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당황으로 물든 두 눈에 비친 건 분명 쓰러뜨렸던 여왕이 오롯이 서 있는 모습이었다.
"설마…"
아직 닫히지 않은 아공간이 추측을 확신으로 만든다.
희미해져 가던 존재가 본래의 영육을 찾아가고 있었다.
늑대는 알고 있었다.
설령 모조 엘릭서를 마시더라도 만상의 주인을 이길 리 없다는 것을.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편린이나마 알고 있었기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시선을 끌고 시간을 벌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그래서, 늑대가 들이켠 모조 엘릭서는 절반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 공허의 격을 끌어올리고 잠시나마 가능성을 열어젖힐 수 있었다. 일시적으로나마 불사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정신체인 늑대조차 실은 그 가능성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셀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세계를 넘나들며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만상의 주인이 만들고 이뤄낸 기적의 시약, 연금의 극의는 고작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모방한 신의 피를 신에 가장 가까운 이가 들이켰다.
적법한 격을 지닌 이가 들이켜 영락하기 전의 격을 되찾았고.
―――검은 장막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환계의 붕괴는 멎어 균열은 사라져간다.
소녀의 뒤에서 늑대는 웃었다.
늑대의 앞에서 소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상황은 반전하기 시작했다.
***
거대한 주먹이 빗나가 지면을 내리찍자 추살대의 진형이 흔들렸다. 거센 돌풍이 세차게 지나가자 이은하는 눈 앞을 가렸다.
막을 수 없는 힘, 저거노트. 그 이름 그대로 힘의 상징과도 같은 괴물. 분명 네버랜드에 고립돼있다고 들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깊게 박힌 주먹을 뽑아내자 수도관이 터졌는지 물이 분수처럼 치솟아 오른다.
누군가의 호령에 궁수들은 마력이 담긴 화살을 쏘아냈지만, 조금 깊게 박혔을 뿐 저거노트에게 있어선 이쑤시개나 다름없다. 살덩이가 꾸물거리며 화살이 모두 튕겨져 나왔다.
"무식한……!"
그 말보다 저거노트를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없으리라. 저거노트의 발이 바닥을 찍으려 하자 이은하는 황급히 그 아래 있는 헌터를 끌어당겼다.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깨진 아스팔트 조각이 얼굴에 박혔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넋 나간 감사의 인사를 받은 이은하는 작게 끄덕이며 상황에 집중했다. 저거노트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지만, 전처럼 암담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당시엔 거암의 로드님도 환영의 나비님도 없었으니까……!
"갑옷부터 없애요!"
은자림이 소리치며 달렸다. 공동 전선을 짜며 알파와 함께 놈을 와해했던 방법을 기억하고 있다. 한 번에 죽이지 못할 거라면 거인의 형상부터 무너뜨려야 한단 걸 잘 알고 있다.
"Cădea într-o fantezie."
춤추는 자색 나비에 홀린 저거노트의 눈동자가 멍해진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타고 오른 은자림의 창이 저거노트의 형태를 유지하는 판금과 사슬, 대못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두꺼운 통짜 강철조차 각룡의 뿔을 제련한 창에는 우습게 잘려 나간다. 어깨 갑옷이 부서지고 살점이 흘러내린다.
백군태의 도끼가 휘둘러지자 저거노트의 손목이 끊어질 듯 너덜너덜해진다. 힘이 실리지 않은 주먹이 바닥에 떨어지고,
"사격!"
호령하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궁수들의 불화살이 끊어진 손목 사이를 불태웠다. 꾸멀꾸멀 재생돼가던 살점이 불에 검게 그을렸다.
"Explosion!"
그 영창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진 손목을 완전히 끊어놓았다.
당황하는 저거노트가 뒤늦게 환상에서 깨어났지만,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수없이 많은 자색 나비가 나풀나풀 바람을 타고 춤추고 있었으니까. 무수한 무기가 천장에서부터 떨어진다. 환상에 불과한 가짜―― 적어도 그녀의 환영만은 그렇지 않다.
구현화의 힘을 빌어 현실에 드러난 무수한 날붙이가 떨어져 저거노트를 자르고 갈랐다. 검, 창, 도끼, 곤봉에서 메이스에 이르기까지 온갖 무기가 폭포처럼 떨어진다.
그 세례를 받으며 엉망이 된 저거노트는 순식간에 산더미처럼 쌓인 날붙이에 고슴도치 같은 신세로 전락했다. 꿈틀거리는 것보다 빠르게 날붙이가 살점과 바닥을 뚫어 붙잡아놓는다.
환영의 나비. 그녀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자색 나비는 빛나는 불꽃으로 화해 저거노트를 불태웠고, 좌중은 아연하게 환영의 나비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차원이 다른 힘. 바로 이게 스퀘어 마스터라고 실감할 수밖에 없다…….
"……추격 재개합니다."
완전히 불살라진 저거노트를 뒤로 하고 추격을 이어나간다. 어느샌가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던 몬스터의 숫자도 늘어나지 않고 있었다.
***
"너, 잘도…!"
아랫입술을 깨문 만상의 주인에게 평소의 여유는 남아있지 않다. 늑대는 코웃음 치며 앞이나 보라고 충고했다. 이가 갈렸지만 맞는 말이다. 지금 늑대에게 신경 쓸 겨를은 없으니까.
여왕의 모습이, 실루엣이 벗겨져 간다. 영락한 이후 아주 오랜만에 되찾은 격을 느끼듯 여왕은 가슴에 손을 올렸다.
"……."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다. 이 시간은 절대 오래가지 않으리란 것을. 모조 엘릭서를 들이킴으로써 일시적으로 격을 되찾았을 뿐이라는 걸.
늑대의 기지가 만들어 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 따라서, 빠르게 끝내야만 한다.
여왕이 손을 들어 올리자 붕괴를 멈춘 환계가 주인의 손길에 따라 움직였다.
이 세계 자체가 그녀의 영역. 즉, 격을 되찾은 그녀의 손짓은……
―――늑대가 인식할 수 있던 건 거기까지였다.
…….
언젠가 여왕은 말했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건 신이 아닌 이상에야 할 수 없다고. 그건 당연 여왕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지만, 그에 준하는 일은 할 수 있었다.
세계의 정지. 멈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건 만상의 주인과 여왕만이 유일하다. 그게 가능했던 건 서로의 능력이 비슷하면서도 대척점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두 초월자가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