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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28화 (228/407)

〈 228화 〉 #96 격돌 (2)

아무도 볼 수 없는 멈춘 세계에서 두 초월자가 격돌하기 시작한다.

손짓 한 번에 세계가 출렁이고 무너지고 재구성한다. 인지 바깥의 싸움은 여태 없었을 정도로 격렬하고 차원이 다르다.

무한에 가까운 검은 마력이 산보다도 거대한 말뚝 수십 개를 구현한다. 인지하기에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날아가다가 여왕의 지척에 멈춰 힘없이 떨어졌다.

여왕이 구현한 실존하지 않는 용의 형상이 정수를 얻어 형상을 갖고 만상의 주인을 당장에라도 먹어 치울 것처럼 입을 벌렸다. 하지만 지척까지 닿았을 때, 그것은 녹슬고 썩어 문드러져 소멸했다.

여왕의 모습이 순간 사라지는가 싶더니 만상의 주인의 후방에 빛무리가 모여들었다. 돌아본 소녀의 삼라만상을 꿰뚫는 아득한 격을 지닌 눈이 그 빛무리가 거짓임을 통찰해냈다. 사방팔방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작거나 커다란 가지각색의 손의 무리가 자신을 뒤덮으려 한다.

그걸 보고 소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한 번, 아까 용의 형상이 그랬듯 손의 무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진다.

―――싸움은 호각. 서로의 권능은 대등하다.

하지만 불리한 건 자신이다. 권능의 대가. 소녀, 만상의 주인은 어그러져 가는 퍼즐을 맞춰 망가진 의식과 정신을 재구성했다.

소모전으로 가면 불리한 건 자신이다. 이미 한 차례 싸움으로써 이것저것 상당히 소모했으니까. 여왕은 모조 엘릭서로 회복한 데다가 본래의 격까지 되찾았으니 먼저 한계가 오는 건 자신이 되리라.

여왕의 손짓에 환계 전체에 널린 마력들이 한데 모여들었다. 세계 전체가 그녀의 영역이자 창조물. 마력이라고 예외가 되진 못한다.

"―――."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자 마력은 형태를 가지고 빛무리처럼 모여들기 시작하자 소녀는 긴 한숨을 뱉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완전히 당했다는 걸.

승산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의 그녀와 싸우는 건 불리하고 의미 없는 일이다. 어차피 모조 엘릭서로 일시적으로 되찾은 격일 뿐이니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질 테니까.

아, 그래. 이번엔 실패. 후일을 도모하는 게 낫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그럴 수 있었더라면. 만상의 주인이 만들어낸 통로는 순식간에 닫혀 사라지고 만다. 몇 번이고 시도해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즉, 탈출할 수 없다.

여왕이 더 강해서가 아니라 이곳이 그녀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 환계라는 세계 자체가 주인인 여왕을 돕고 있다.

이윽고 모여든 빛무리가 형태를 이뤘다. 마치 조그마한 태양을 보는 듯하다. 다만, 붉게 타오르는 대신 은은한 푸른빛으로 빛날 뿐. 달과 태양을 반씩 섞어놓은 것 같다. 처음엔 마력이라 생각했던 그것의 정체를 깨닫고 만상의 주인은 한숨 쉬었다.

"……제정신인가요?"

여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눈동자가 진심임을 알려준다. 환계를 유지해야 했기에 여왕은 영락하고 말았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러지 않았다면 격이 떨어질 리는 없었다는 뜻.

즉, 환계라는 건 그녀의 일부가 녹아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저 빛나는 구체는 마력이 아닌 환계 그 자체. 이른바 환계의 정수라 할 수 있으리라.

더 쉽게 풀어 말하자면 그 구체는 그녀 자신의 격. 자신의 일부를 떼어버린 거나 다름없다. 미친 짓이고 정신 나간 행위다.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이었다.

"그러다간 영락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텐데요?"

알고는 있냐는 말에 여왕은 대답 대신 구체를 손 위에 올려놓았고 만상의 주인은 이를 악물었다.

희망이고 잃어버린 신이고 간에 전부 다 고집불통. 도무지 말을 들으려고 하질 않는다. 이를 갈던 소녀는 자신이 외통수에 걸렸음을 깨달았다.

――그래. 외통수.

적어도 이 세계에서만큼은 여왕과 싸워봤자 승산이 적다. 설령 이겼다 한들 그 과정에서 여왕의 격이 낮아진다면 이 싸움 자체에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늑대가, 희망이 전부 망쳐버렸다.

얼마나,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인데……!

이럴 거면 차라리 보험 따위는 없는 게 나았다. 기어올랐을 때 죽였어야 했다. 그럴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 성화와도 같은 타오르는 불꽃에 넋을 잃고 말았다.

설령 미약한 가능성이라도 자신이 실패한 다음의 보험이 되길 바랐다…… 멍청했다. 희망은 길들여지지 않는단 걸 알면서도 욕심냈다. 그래서 전부 망쳐버렸다. 처음부터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시스템―― 그게 시작이었다. 정말 웃기지도 않은 짓거리를 해줬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급하게 일을 도모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희망에게 질병을 죽일 수밖에 없도록 성장에 제약을 걸지만 않았더라도!

이번이 마지막. 다음은 없다. 이 세계가 평행 세계의 끝이라는 걸 만상의 주인은 잘 알고 있었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마저 써버렸다간 다음이 없을지도 모른다. 혹시 모르니 여분은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이제 자신에게도 딱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저울을 달아봐도 암담할 뿐이다.

과연, 외통수라는 말이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운이 나빴다…… 만상의 주인은 실소했다.

그게 아니라 늑대가 전부 넘어서고 말았던 거다.

흑호를 쓰러뜨리고, 여기까지 와 자신을 속이고 여왕에게 모조 엘릭서를 마시게 했다. 암담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음 수를 생각해 넘어선 거다.

그 의지에, 기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 정말이지 질려버릴 것 같다고.

만회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에도 늑대가 그 전부를 극복하고 여기까지 몰아붙였을 뿐.

푸르게 빛나는 구체를 움켜쥔 여왕이 절대 타협하지 않으리란 걸 깨닫고 만상의 주인은 새하얗게 웃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서.

왜냐하면, 나는 '이단의 탕아'여야만 하니까.

***

다음 순간, 늑대는 눈앞의 광경이 변했음을 깨달았다.

―――방심했나?

스스로 질문한 것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다는 거였다.

방심 따윈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기회가 돌아온다면 만상의 주인을 물어뜯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을 뿐.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여왕이 무릎 꿇은 채 숨을 몰아쉬고 만상의 주인이 힘겹게 일어서 있다――― 적어도 멈춘 세계를 인지하지 못한 늑대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서로가 만신창이. 초월자라는 격에 어울리지 않게 엉망이 돼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서 있는 건 만상의 주인이라는 점이다.

즉, 여왕이 패했다. 상황을 이해하진 못해도 받아들인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공허를 일으켜 자신을 짓누른 사슬과 말뚝을 먹어 치웠다.

"……정말 미련하네요. 이길 수 있었을 텐데."

거친 숨을 뱉으며 만상의 주인이 조소하는 말에도 여왕은 답하지 않았다. 아니, 이미 그럴 기력이 남아있지 않다. 숨을 헐떡이며 창백해진 안색이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이다.

비틀거리며 만상의 주인이 다가온다. 자신을 속박하는 것들을 모두 먹어치운 늑대는 숨을 가다듬었다.

여왕이 왜 패했는지 짐작이 간다. 자신이 인지조차 하지 못할 세계에서 싸웠으리라. ――그래서였다. 이곳저곳에 널린 믿기 힘든 규모의 흔적을 되짚고 생각해봐도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가 갈렸다. 이렇게까지 해서 쓰러뜨리지 못했단 사실과 면목 없다는 듯 고개 숙인 여왕의 표정에 이가 갈렸다.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다.

내가 약해서, 알 수조차 없는 사이에 발목을 잡고 말았던 거다. 그 무력감이 사무치게 느껴졌다. 이젠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끝도 없이 그 위가 나타난다.

지면에 발톱을 박아넣듯, 늑대는 기어이 그 앞에 섰다. 고작 비틀거리고 있을 뿐인 소녀의 모습이 일그러진 인지 바깥의 괴물처럼 보인다.

"가."

가라고 그럼 살려주겠다고. 무표정하게 자비를 베푸는 그 모습에 늑대는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모조 엘릭서의 효과는 사라져 강제로 끌어올린 격마저 되돌아와 있다.

승산은 없다. 싸움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걸 잘 알면서도 늑대는 여왕의 앞에 섰다. 힘겹게 뻗어온 손을 뒤로 하고서.

늑대가 물러서지 않자 만상의 주인은 다시 차갑게 뇌까렸다.

"이번엔 죽일 수도 있어."

살려두지 않겠다고. 알량한 자비에 기대지 말라고 마지막 경고를 던지는 것에 늑대는 몸을 낮춰 의지를 드러냈다.

만상의 주인은 고개를 꺾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뜻대로 안 되네.

늑대는 물러서지 않는다. 아지랑이와 검은 불꽃을 한계치까지 일으켰을 뿐.

희망이 얼마나 고집불통인지는 잘 알고 있다. 실소한 만상의 주인은 손을 들어 올렸다. 이젠 생소하게 느껴지는 어지러움이 찾아오자 한쪽 눈을 가렸다.

이렇게까지 몰아붙여 진 게 얼마 만이더라? 이젠 흐릿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시선을 따라 바닥에선 가시가, 천장에선 말뚝이 생겨난다. 거기에 담긴 마력은 여전히 아득할 정도라 늑대는 받아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전부 피해야 한다. 단 한 번이 치명상. 공허와 겁화로도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바람과 함께 달린 늑대를 아득한 크기의 말뚝이 짓누르려 한다. 그 첨단에 꿰뚫리기 직전, 늑대는 말뚝 위에 올라탔다.

지면에 깊숙이 박힌 말뚝은 늑대의 또 다른 길이 돼 주었다. 수없이 많은 가시와 말뚝을 밟고 피한다. 사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거침없이 달린다.

"……!"

거리가 좁혀지자, 만상의 주인의 눈이 빛났다.

그 신호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늑대는 바람을 터뜨리고 탄력을 발해 먼저 도약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중압감에 짓눌려, 빠르게 추락한 늑대의 송곳니는 마침내.

"……?!"

―――만상의 주인에게 닿았다.

늑대는 지나쳐 거리를 벌렸고 소녀는 멍하니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어깻죽지가 물어뜯겼다.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 멍하니 손을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늑대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대신, 망설임 없이 그녀의 살점을 씹어먹었다.

식인―――?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사람이란 생각도 들지 않았으니. 인간과는 동떨어진, 그녀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다른 종인 것처럼.

그리고 이미 그런 것 따위엔 흔들리지 않는다.

살점을 삼킨 순간, 늑대는 눈을 부릅떴다.

마치 강한 독을 삼킨 것 같다. 그녀의 피와 살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잠식으로 빼앗아온 검은 마력이 안에서 날뛰고 있다.

이건 통제할 수 없는 힘이다. 요동치는 검은 마력을 더 큰 마력으로 억누른 늑대는 시끄러운 시스템의 메시지와 함께 어떤 웃음소리를 들었다.

허리를 젖히고 깔깔 웃고 있다.

참을 수 없다는 듯 광소하는 소녀에게서 늑대는 어떤 광기를 느꼈다.

"응. 역시 넌 죽이면 안 될 것 같아."

웃느라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만상의 주인은 손짓했다. 번뇌를 떨친 것처럼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늑대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를 겪었다.

상황이 반전해있다. 이번에도 필름이 끊어진 것처럼 물어뜯은 상처가 나아있고 자신이 바닥에 쓰러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수십 수백의 가시와 말뚝과 사슬에 붙잡혀 있다.

……또. 또 이렇게 됐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처럼.

그때도 공허로 손을 먹어치웠지만,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재생해있었다.

불가해라는 이름답게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무슨 능력인지 가늠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에게 뒤가 없다는 점이다.

창백한 안색으로 피를 토하며 새하얗게 웃는 모습은 그야말로 광인.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만상의 주인이 일그러진 웃음을 띠었다.

―――늑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애초에 승산이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늑대가 포기했다고 생각한 만상의 주인은…… 걷지 못했다.

셀 수 없는 손에 붙잡혀 있었으니까.

숨을 가다듬은 여왕이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고 있다. 그 속박이 자신을 억누르고 있다.

"하, 이런다고……?"

될 것 같으냐, 그 말은 끊어졌다.

발밑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만상의 주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일그러졌다.

여왕이 일시적으로 격을 되찾음으로써 환계의 붕괴는 멈췄다. 하지만 지금, 다시 여왕은 영락했고.

――환계의 붕괴는 다시 시작된다.

아니, 여왕의 의지에 따라 붕괴는 가속해간다. 만상의 주인은 그 의도를 깨달았다.

이 세계와 함께 자신을 매몰시킬 생각이란 것을.

영락하는 걸 넘어 한낱 미물로 몰락하는 걸 각오하면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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