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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29화 (229/407)

〈 229화 〉 #97 탈출, 몰락

수많은 손에 붙들린 만상의 주인과 좁아져 가는 세계. 환계가 다시 흔들리고 무너지는 와중에 늑대는 여왕을 끌어당겼다. 가속해가는 붕괴. 현계로 돌아가야 한다 생각했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다.

이미 환계는 여왕의 지배를 벗어나 있으니까. 이젠 누구도 붕괴를 막을 순 없으리라.

끌어당겨 등에 태운 순간, 여왕은 힘겹게 말했다.

"탈출…"

그래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여왕은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고 늑대의 눈에 보인 건 바다가 사라져 비어있는 천장이었다.

――달리고 달린다. 발판을 만들고 뛰어올라 창공을 향해 달렸다. 그걸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하늘이 무너질 듯한 압박이 거세진다.

이를 악문 늑대는 흑무와 공허를 두르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빈 천장을 향해 달렸다.

내리누르는 마력을 밀어낼 수 있었던 건 만상의 주인이 지치고 힘겨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이겼다지만, 여왕과의 싸움은 만상의 주인에게 있어서도 쉽지 않았다.

싸울 필요는 없다. 그냥 여기서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그 생각이 무색하게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다름 아닌 여왕이 만든 속박. 무수한 손이 가차 없이 부서져 산산이 조각난다. 힘겹게 주저앉자 그 아래로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생겨나더니 소녀를 지탱한다. 저렇게 기진맥진한 상태라고 해도 붙잡히면 끝이라는 걸 늑대는 잘 알고 있었다.

천장에 가까워질수록 짓누르는 힘이 강해진다. 바람까지 두른 다음에야 등반할 수 있었을 만큼. 이제 남은 거리는 정말 조금. 방해만 없다면 10초도 걸리지 않고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곳저곳에 드러나는 균열이 점점 커져간다. 어느새 등 뒤까지 바짝 따라온 만상의 주인. 흑운의 속도는 늑대가 창공을 달리는 것보다도 아득히 빠르다.

벗어나기 위해 늑대는 입을 열었다. 벌린 목구멍 안이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아니, 새까맣게 타오르고 있다.

날숨과 함께 타오르는 겁화를 토해내자 검은 마력이 불타 사라진다. 뚫린 길을 따라 창공을 오른 늑대는,

"……!"

그러기 전에 붙잡혔다. 그 끈질긴 집착에 탈출구를 눈앞에 두고 꼬리를 붙잡히고 말았다. 황급히 그림자로 꼬리를 잘라냈지만, 이미 여왕의 발목이 잡힌 뒤였다.

마치 개미 떼처럼 스멀스멀 올라오는 마력이 여왕의 발치에서부터 그녀를 서서히 뒤덮어간다.

일그러진 미소로 입꼬리를 비튼 만상의 주인이 눈짓으로 묻고 있었다.

어떻게 하겠느냐고.

―――혼자라면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만상의 주인은 늑대가 그러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고집불통인 희망이 포기할 리 없다고.

그건 사실이었다.

늑대로부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자 만상의 주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됐다고, 성공했다고 믿었다. 설령 기진맥진한 상태더라도 질 리가 없으니까.

늑대를 쓰러뜨리고 여왕을 데리고 나가기만 하면……!

"……!'

안타깝게도, 그 생각은 이뤄지지 않았다.

"――――――!"

커다란 균열을 찢어발기고 나타난 검은 호랑이가 그녀를 덮쳤으니까.

***

떨어진다.

어찌할 도리 없이 추락하고 만다.

천장 너머로 사라져가는 늑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끝내 뒤돌아보지 않고 사라지자 소녀는 실소했다.

놓지 않겠다는 듯 붙잡고 늘어지는 검은 호랑이. 평소 같았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지금 자신에게 흑호를 떨쳐낼 만한 힘은 남아있지 않다.

물고 쥐어뜯으며 어떻게든 붙잡으려 하는 것에 뻗었던 손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졌다. 완전히 당했다. 이건 돌이킬 수 없다. 한 방 먹었다. ―――덕분에 염원은 이룰 수 없게 됐을지도 모른다.

종말을 '죽여야' 하는데… 이젠 가능성마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어쩐지 후련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진작에 포기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

낮은 울음소리에 만상의 주인은 다시 웃어버렸다.

검은 구름은 자운에 삼켜져 사라졌다. 자색으로 빛나는 눈동자에는 자신을 향한 살의와 원망이 담겨 있다. 거기에 소녀는,

"왜? 네가 원했던 거잖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알고 있다.

그야 그렇겠지. 흑호가 원했던 건 여왕을 영락시키는 모형 정원을 부수게 해 달라는 거였지 그녀를 몰락시키는 게 아니었으니까.

일그러진 형태로 완성된 소원이 검은 호랑이를 격노케 했다. 이제 지면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산을 들어 올리는 힘이 자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다.

잠깐 이대로 전부 포기하고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지쳐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시간으로 따지면 얼마였을까? 만 년을 넘긴 뒤부터는 세지 않았다. 지치는 게 당연한 거겠지. 가만히 받아들이면 분명, 이젠 편해지리라.

"……."

하지만 역시 보고 싶은 것들이 남아있다. 여기서 죽는 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는 아공간을 열었다. 아껴둘 생각인 하나 남은 여분이었지만, 아주 조금만.

곧 추락해 흙먼지가 피어오르기 직전, 소녀는 홀로 키득거렸다.

몰락한 신님은 과연 어떻게 되실까 하고서.

***

현계로 돌아온 늑대는 높은 천장에서 고도를 낮췄다. 흑호와 싸웠던 백두산 등지. 서울까지는 제법 먼 거리였지만, 얼마든지 주파할 수 있는 거리다.

늑대는 등에 업힌 여왕을 돌아보았다.

창백해진 안색.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 불규칙한 호흡과 떨리는 몸. 그것만 봐도 상태는 좋지 않아 보인다.

그 걱정을 읽었을까. 당장에라도 사라질 것처럼 흐린 미소로 여왕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별거 아니라고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일단 이 자리부터 벗어나야 한다. 만상의 주인이 붕괴한 환계 속에 갇혀 순순히 죽었다면 좋겠지만, 어쩐지 그 괴물이 죽는 모습은 잘 상상되지 않는다.

다시 쫓아온다면 그때는 정말 끝일 테니까.

다시 달리기 시작한 늑대는 곳곳에 몬스터가 널려있단 걸 알 수 있었다.

환계가 붕괴함에 따라 환계의 던전이 현계로 침식하고 만 것이리라. ……예상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인류의 피해는 적지 않으리라.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그림자가 집어삼킨다. 충실한 사냥개처럼 근방 수백 미터의 모든 몬스터를 전부 게걸스럽게.

그렇게 달리던 늑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탕아의 잔당들을 발견했다. 그들을 쫓는 헌터들과 교전하고 있는 게 보였지만, 늑대는 신경 쓰지 않고 달렸다.

모든 일을 혼자 할 순 없다. 저건 어디까지나 그들에게 맡길 일이다. 그리고 잔당을 처리하는 것보다 여왕을 쉬게 하는 게 더 급하니까.

"……."

머잖아 도착한 서울은 폐허로 변해 있었다. 불타오른 도시를 보고 말문이 막혔다. 어두운 밤인데도 사이렌과 차량의 불빛으로 가득하다. 곳곳에 널린 사망자들의 수습조차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좁은 땅에 인구밀도가 높았던 만큼 마땅히 피하기도 어려웠으리라. 대체 얼마나 죽었을지. 도시가 복구되기는 하는 건지 생각하다가 문득, 다른 데 생각이 미쳤다.

페리와 홍유리는 무사할까. 그리고 백소율은 살아있을까. 그리고 다른 이들은…

늑대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그런 것보다 여왕을 어떻게든 하는 게 더 급하니까. 병원에 데리고 간다고 그녀의 상태가 호전될 리는 없으리라.

……어떻게든 해야 한다. 마력을 주거나 스킬로 회복을 익히더라도 어떻게든.

그 생각이 좀 더 빨랐어야 했다.

뺨에 닿은 손길에 늑대는 돌아봤고, 아연하게 여왕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호전돼 있어서. 식은땀도 불규칙한 호흡도 창백한 안색도 가라앉았다.

그래서, 늑대는 이를 악물었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손길과 함께 따스하게, 오히려 자신에게 물어왔다.

"……괜찮니?"

늑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지 바라보는 시선에 여왕은, 아니 여왕이었던 그녀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

별이 승천한다.

별빛의 기둥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광경에 피난민과 헌터의 구분 없이 모두 시선을 뺏기고 말았다.

그러던 와중, 귀를 쫑긋 세운 백록이 갑자기 돌아서자 홍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뭐 있어?"

거기에 대답도 하지 않고 홀린 듯 걷더니, 미친 듯 달리기 시작했다. 비록 늑대만큼은 아니라지만 흰 사슴의 질주에 뭇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풍경이 휙휙 바뀔 정도로 급히 달리자 홍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뭔데?

잠깐 고개 돌려보니 백소율도 고개를 젓는 게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어지간히 급해 보여 잠자코 있었더니 높은 산을 단번에 오르기 시작한다.

대체 이런 곳에 뭐가 있다고?

그러다 점점 느려졌다. 급히 왔던 주제에 망설이는 것처럼 터덜터덜, 천천히. 당장에라도 다리가 풀릴 것 같아 괜찮냐고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인다.

비틀거리며 산속을 헤집고 늑대의 모습이 보이자 홍유리와 백소율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색했다.

"알파!"

역시 살아있었다! 자색의 흑호랑 싸웠을 텐데 괜찮아 보인다. 쓰러뜨렸을까? 아니, 그런 것보다 무사한 게 안심이었다. 당장 내려서 달려가고 싶은데, 알파의 옆에 있는 누군가를 보고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몸이 저절로 굳었다. 귓가에 범접해선 안 된다고 자신의 안쪽에 있는 용의 피가 속삭이는 것만 같다. 홍유리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도대체 누구길래? 단언컨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저런 사람을 봤다면 잊어버릴 리 없으니까. 아니, 애초에 사람이 맞긴 해?

고즈넉한 달빛이 그녀를 비추자 찬란한 은을 부드러운 실로 뽑아낸 것 같은 머리칼이 빛을 반사해 반짝인다. 거룩함을 넘어 신성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에 일순 넋을 잃고 말았다.

"…무사했나."

안도하는 알파의 말에 넋 나간 채 끄덕인 홍유리는 어느새 정체 모를 여성의 앞에 꿇어앉아 있는 백록을 보곤 아연해 했다. 설마, 저 고고한 사슴이?

달빛이 비치는 곳, 은발의 여인과 그 앞에 앉은 흰 사슴.

그게 마치 신화에서나 볼 법한 한 장의 그림처럼 보였다.

"여왕이시여……"

비통한 듯 중얼거리는 백록의 목소리에 홍유리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왕? 옛날 영국에서나 있었던 거 아닌가?

여인의 모습은 여왕이라기보단 차라리 여신에 가까워 보인다. 알파와 함께 있었는데 질투는커녕 불경한 마음도 들지 않을 만큼이나.

"뀨, 뀨우우~!"

더 놀라운 건 페리조차 여인에게 가 있다는 것. 눈물 흘리며 울어 젖히는 와중, 현계 곳곳에 나타났던 수많은 환수가 모여들고 있었다. 달빛이 비치는 산중에 소용돌이치며 모여드는 영물, 환수, 요정의 무리. 눈치가 있다면 환계와 관련 있는 인물이란 걸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대체 누구이기에?

답을 구하는 시선에 어느새 다가온 알파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환계의 주인이다."

그리고는,

"한 때는 신이었던."

덧붙인 말에 홍유리와 백소율은 말을 잃었다.

***

며칠이 흐르고 세상엔 많은 변화가 생겼다.

환계가 붕괴함에 따라 환수들의 거주지가 사라지고 영물과 환수가 모두 현계로 오게 되어 소란이 일었다. 그것뿐이라면 다행이겠지만, 환계에 던전이 있었던 만큼 세계 각지에서 나타난 몬스터들의 존재가 골치 아팠다.

환수의 존재를 모르는 만큼 환수를 몬스터로 오인하는 사태도 많이 일어났다.

갑자기 섞여버린 존재들. 그에 인류가 혼동을 겪은 건 당연한 일이리라. 이전 같았으면 환수들도 환계로 도망쳤을 테지만, 이젠 그럴 수 없게 됐으니까.

죽어가는 영물과 환수들도 제법 있었다.

늑대의 요청으로 스퀘어와 전쟁의 신전, 각 클랜이 환수와 영물을 공격하지 말라고 알렸지만, 그게 그리 쉽게 될 리가 없다. 곳곳에 나타난 건 환수만이 아니라 몬스터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환수라 착각하고 공격을 멈췄다 죽는 이도 있었고, 몬스터라 오인해 환수나 영물을 죽이는 헌터도 많았다. 그 과정에서 환수가 헌터를 죽이는 경우도 있었고.

환계가 무너짐에 따라 현계는 진통을, 변혁을 겪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불협화음도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대부분의 환수는 여왕을 찾아 먼 길을 왔으니까.

그런 혼란 속에서 여명은.

"……그런 이유로 2팀장 강태호는 한동안 복귀할 수 없게 됐다. 2팀 팀장은 일시적으로 이기준이 맡고 부팀장은 공석으로 해두지."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전국에 헌터를 파견하며 몬스터가 나타난 사태를 수습해갔다.

강태준의 말에 클랜원들이 끄덕였다.

탕아의 간부와 싸운 강태호는 혼수상태에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강훈이라는 건 여전히 발표하지 못했다. 칠영웅의 배신이라는 더한 혼란을 안길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지 않아도 인류, 특히 한국의 분위기는 암담했다. 비록 많은 변절자를 쓸어버렸다지만, 수도 서울이 침공으로 통째로 무너지고 수백만에 달하는 사상자가 생겨났으니까. 국가의 존속을 걱정할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강태준은 굳은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래. 지금 흔들릴 수는 없다.

불은 꺼졌다지만, 서울의 복구는 앞으로 몇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임시로나마 텐트를 짓고 대피소를 만들었지만…… 여명의 거처는 수원의 건물로 옮긴 상태였고.

"공표할 준비는 됐나?"

"언제든 가능합니다."

강태준의 물음에 하연이 끄덕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은 이 암담한 상황의 분위기를 반전시킬 소식이 있다는 것. 백두산에 자리 잡았던 인류가 포기했던 재앙, 자색의 흑호가 이젠 없다는 믿기 어려운 진실을 공표할 준비가 끝났다는 것에 강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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