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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273화 (273/407)

〈 273화 〉 #120 흑린의 성 (2)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만상의 주인. 늑대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언제든 그녀가 본색을 드러내면 상황은 반전하리라.

――따라서, 먼저 움직이는 건 자신이어야만 한다.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해 달려든 늑대는 단숨에 그녀를 덮쳤다. 심안이 뜨이며 그녀를 관조한 순간.

[-은-(―)]

[신장 1―.4cm] [체중 ―.2kg]

[힘 ―9] [민첩 -6-] [체력 8―] [마력 13―]

저번과는 달리 아주 일부나마 그녀를 엿볼 수 있었다. 노이즈가 낀 것처럼 어지럽고 스킬란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읽을 수 없었지만 대략적인 유추는 할 수 있었다.

"……."

도대체 얼마나 괴물이라는 건가. 스킬은커녕 스테이터스의 일부만 엿보아도 승산이 없다. 무엇보다 압권인 건 끝을 모르는 그녀의 마력. 그럴 거라 예상했지만, 처음으로 확인한 네 자릿수의 스테이터스가 눈을 어지럽혔다.

성공할 리 없다. 기습은 분명 실패한다. 자연스레 이어질 다음 수로써 일흔 가지 정도를 떠올렸지만, 늑대의 예상은 처참히 빗나갔다. 자신의 앞발이 그녀의 양어깨를 누르고 등을 바닥에 붙이게끔 만들었으니까. 뜻밖의 성공이었으나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것만큼은 안 된다는 듯, 마력이 자신을 가로막았다. 통나무처럼 두꺼운 벽이 벌린 턱 사이에 끼워진 순간, 늑대는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물어뜯었다.

당장에라도 부서뜨릴 수 있을 것 같지만 터무니없다. 공허를 일으키고 나서야 가까스로 이빨이 박힌 정도였다. 알갱이와 잔재가 천천히 흘러내리며 부서져 가기 시작한다.

"――죽이려고?"

으르렁거리는 와중에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렇게 물어온다. 늑대는 답하지 않았으나 그걸로 알았다는 듯 답답한 한숨을 내쉰다.

"기껏 선물도 준비했는데… 마음에 안 들었어?"

어깨를 짓누른 발에 힘을 주었다. 심안으로 엿본 그녀의 체력은 800 남짓으로 서리 대군주와 비슷한 정도였다. 마력까지 담아 분명 어깨가 빠지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그 표정에는 실낱같은 변화도 없다.

통각무효 같은 스킬이 아니라 고통에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거다. 고작 그런 것에 일희일비할 수준은 한참이나 지났다는 뜻.

그래서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눈앞의 만상의 주인과 자신이 아는 이은하가 동일 인물이란 사실을. 비록 평행 세계라는 차이점과 억겁의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나 바뀔 수 있는 걸까.

"응. 하려면 지금이 기회야."

의미심장한 웃음. 그제야 늑대는 그녀의 전신이 만신창이라는 걸 눈치챘다. 옷이 더럽혀져 있고 상처가 가득하다. 하물며 느껴지는 마력 또한 이전에 비하자면 보잘것없다.

……초월의 영역에 다다른 이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존재는 달리 없다. 어쩌면 이마저도 기만일지도 모르나 정황상 흑린과 충돌했다는 건 확실한 모양. 마력의 기둥을 깨부수고 이빨을 목덜미에 가져다 댄 채로 물었다.

"싸웠나?"

"어떨 것 같아?"

움직이지 않고서 여전히 의미를 읽을 수 없는 눈빛을 보내온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시험하기라도 하는 듯한 말. 이대로 물어뜯겠다는 의지를 여실히 드러내자 힘 빠진 웃음을 짓는다. 장난처럼 두 손을 들어올리고는,

"……졌어."

그렇게 시인했다. 뜻밖의 말에 그녀를 바라봤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목에 이빨이 닿아있건 말건 지쳤다는 듯 대자로 뻗어서 천장을 올려다본다. 그게 거짓처럼 보이진 않았기에 늑대는 속으로 주판을 튕겼다.

――만상의 주인이 패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인가. 이대로 물어뜯어 먹어치우는 것? 아니면 흑린을 피해 도망치는 것? 늑대는 실소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 처음부터 먹어치우러 온 거다. 후자를 고려할 가치는 없다. 곧 늑대의 턱이 그 가녀린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

"……그래. 그렇겠지."

환상처럼 사라진 부스러기. 결국에는 가짜였다는 거다. 아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담한 눈으로 쳐다보는 만상의 주인이 실소했다.

"그렇게 내가 미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물어뜯었다. 만약 저기 있던 게 진짜 자신이었다면 명을 달리했을 터. 뭐니 뭐니 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남아있는 모조 엘릭서는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결과가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못한 건 아니다. 자신은 살아남았고 흑린은 쫓아오지 못하게끔 만들어뒀으니까. 그 덕분에 이 성에서 유유자적 대화할 시간이 생겼다.

슬쩍 돌아본 소녀는 그 시간이 그리 오래가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도망치지 않으면 머잖아 쫓아올 탐욕스러운 검은 도깨비불에 집어 삼켜지고 말리라.

……이길 수 없었다.

영락한 여신과는 한참이나 달랐다. 지금 차원 너머로 도망치면 살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 의미가 있을까. 까마득히 먼 옛날, 자신이 지키고 싶어 했던 건 이 세계다. 평행 세계의 마지막인 이곳조차 종말을 맞이하게 되면 다음은 없다는 거다.

그래서 물러날 수 없다. 어떻게든 흑린의 신혈을 취해서 진리의 일부인 시스템을 깨워야만 하니까.

"……."

다행히 그럴 수단은 있다.

흑린이 쫓아오지 못하는 지금 늑대가 자신과 같은 영역에 들어선다면. 정신체의 격을 벗어던진다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그 이후의 일은 그다음에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말했잖아. 널 위한 만찬이라고."

흑린의 것과 흡사해 보이는 검은 불꽃을 두른 늑대가 자신의 주변을 배회하며 으르렁거리고 있다. 아까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이리라. 그토록 자신을 미워하고 또 증오하고 있다.

하기야, 그럴 만한 일들을 하기는 했었지. 그 성격에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리라. 사실 자신조차 이렇게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납득하게 될 거다. 아니, 그렇게 만들고 말리라.

만상의 주인은 다시금 늑대에게 권했다.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이 성에 쓰러진 정신체들을 집어삼키고 초월의 영역에 오르라고. 그리고 자신과 함께 흑린을 쓰러뜨리자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거절한다."

적의를 불태운다. 승산이 적다고 해도 여전히 타협을 모르는 괴물은 올곧게 앞만을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왜 무너지지도 않고 어디에도 기대지 않을 수 있는 걸까.

마치 찬란한 빛을 보는 것만 같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영원처럼 기나긴 세월을 겪은 게 자신이 아니라 그였더라면 종말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자신처럼 포기하지 않고 올곧은 채로 있을 수 있었을까.

그 붉은 눈에 들어찬 의지는 자신을 쓰러뜨리고 흑린까지도 먹어치우겠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다른 이가 그랬더라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아둔한 멍청이라 비웃었겠지만, 희망은 그 아둔함을 몇 번이나 실현시켰다.

그래서 비웃을 수 없었다.

――다만, 포기한 건 아니다. 납득하게 될 거다. 그렇게 만들겠다고 자신이 생각했으니까. 아무리 타협하지 않는 괴물이라도 타협할 수밖에 없도록 옭아매리라.

그것만이 자신의 소망을 실현시킬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래? 그럼 이건 어때?"

허공을 휘젓는 손을 뒤따라 몇 개인가 풍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허상이 아니라 먼 곳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그건 어떠한 산이고 발전소이고 혹은 인류가 발 디딘 적 없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의 공통점은 던전으로 변한 장소라는 것. 거울을 비춘 소녀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매만졌고 비춰진 풍경이 미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

늑대는 그 순간 무언가를 직감했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바로 알아차렸다.

예상이 틀리기를 바랐건만, 하나둘 던전이 열리고 몬스터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억지로 틈새를 벌려 던전을 개방하고 있었다. 차원의 길마저 열어젖히는 그녀에게 던전을 여는 정도야 어렵지도 않은 일일 터. 심지어 대도시 근처의 던전을 비춰보이자 늑대는 더 망설이지 않았다.

멈추기 위해 달려들려 했지만, 어느새 사슬과 말뚝이 자신을 속박하고 있었다. 동일한 방법을 구사하는 이은하를 알고 있지만 역시 한참이나 다르다.

태양과 반딧불이. 정말 그런 정도의 차이가 있다. 지치고 다친 그녀가 한숨 쉬자 빠르게 몸이 완전해져 간다. 사슬을 공허로 먹어 치우고는 있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사슬들이 나타나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옭아맨다. 벗어날 수 없는 속박. 턱으로 물어뜯어도 쉽사리 끊어지지 않는 마력의 사슬은 마치 그물처럼 자신을 내리눌렀다.

풍경은 어느샌가 전부 사라지고 단 한 곳만을 비추고 있었다. 그건 늑대 자신 또한 잘 아는 곳이었고 인류와의 관계 개선의 전환점이 된 장소이기도 했다.

쓸쓸한 놀이동산. 더 이상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인 동시에 모두가 피하는 곳. 또한, 세계 최악의 던전이라 불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

그것만큼은, 안 된다. 네버랜드의 괴물들이 쏟아져나오면…

"넌 알고 있잖아? 네버랜드를 어떻게 공략했는지."

원작. 이전의 평행 세계를 알고 있다. 네버랜드의 괴물이 얼마나 끔찍하고 답도 없는지를. 1구획의 바포메트나 2구획의 스노웰은 아직 나은 정도다. 3구획 이후. 악귀ㆍ원령이 가득한 그곳이야말로 진짜 네버랜드의 시작이니까.

단세혁이 인류를 집결하고 그곳을 공략하기 위해 인류가 어떤 희생을 치러야만 했는지 늑대는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재앙보다 더 까다롭고, 심지어는 그에 준하는 괴물마저 도사리고 있다.

다만, 정말 문제인 건 그게 아니다. 네버랜드의 괴물들이 구획의 나눔 없이 일거에 쏟아져 나올 거라는 점. 정말 문제인 건 바로 그것이었다.

역병에 준하는 괴물과 난공불락의 던전의 몬스터가 단번에 쏟아지면 고원도 단세혁도 없는 지금 인류가 막아내기는 무리가 있다.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홍유리와 강태준을 비롯해 인류가 맞선다 하더라도. 그런 상황속에 다른 차원에 있는 자신으로써는 어쩔 도리도 없다.

그것은 완전한 외통수. 만상의 주인은 눈 사이를 좁히며 물어왔다.

"어떻게 할래?"

거부할 수 없는 제안. 타협을 모르는 그조차 납득할 수밖에 없도록 옭아매었다고, 이 거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렇게 확신했다.

―――그것이 속삭이기 전까지.

"재밌어 보이네?"

성안에 가득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럴 리 없으니까. 벌써 벗어날 수 있을 리 없다. 굴레 속에 확실하게 가둬두었는데……!

경악하는 소녀를 향해 그것은 웃었다.

"나도 끼워주지 그래?"

키득거리는 조소가 그 생각이 얼마나 무르고 어설펐는지 알려주는 것만 같다. 마력을 구현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다가온 검은 도깨비불이 자신의 뒤에서 팔을 잡고 있었다.

후. 가볍게 불어넣은 숨결이 풍경에 닿은 순간, 가득 일어난 아지랑이가 흑린을 몰아냈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웃고 있는 그것이 다시 키득거렸다.

"왜? 이렇게 하는 거 아니었어?"

***

세계 각지의 던전이 어떠한 전조도 없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네버랜드와 흡사한 유형의 던전도 있었고 인류가 발을 딛지 못한 미답지의 던전도 있었다.

많은 던전이 붕괴한 건 아니나, 붕괴한 던전의 수준은 하나같이 뛰어났고 그 어떤 것조차 아래로 깔아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환수와 함께 나타난 무수한 괴물들. 마랑의 도움을 받아 이제야 그 여파에서 벗어나고 있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던전의 붕괴가 일어났다.

허탈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재앙을 거두고, 나타난 몬스터들에게서도 살아남았는데 이건 가혹하지 않느냐며 신에게 부르짖는 이들마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걱정은 번지고 번져 뒤늦게 어떤 던전에 생각이 미치고야 말았다.

세계 최악의 던전 네버랜드.

제발 그곳만은 멀쩡하기를 바라는 그들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고 배신하듯 돌아온 답은 네버랜드마저 붕괴하고 있다는 암담한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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