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화 〉 #121 산양 vs 반룡
흔들리는 풍경처럼 늑대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별안간 나타난 그것. 만상의 주인이 그랬듯 흑린이 제멋대로 네버랜드를 열어젖힌 거였다.
"왜?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키득거리며 장난스레 묻는 그것은 심상에 떠오른 환영이 아니라 온전히 본신을 드러내고 있다. 더럽혀진 옷과 상처 입은 몸과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
마치 불꽃이 여인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듯 보인다. 겁화보다도 더욱 어두운 칠흑의 불꽃이 줄기에서 가지를 뻗듯 날개를 이룬 형상. 아니, 흑린이라는 최후의 불꽃이야말로 그녀였으니 불과 흑린을 구분 지을 필요는 없으리라.
"그리고……"
마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검은 불꽃이 자신을 보았다.
"진짜 왔네?"
검은 여인이 그렇게 말했다. 아주 즐겁다는 듯한 표정으로 키득거린 그것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사람이라면 있을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가 귀신처럼 웃었다.
"좋아. 기다려. 곧 놀아줄 테니까."
시선을 돌린 흑린은 품속의 소녀를 내려다보았고 순간 늑대는 어떠한 힘의 흐름을 느꼈다. 그것은 아까 느꼈던 시간의 흐름. 만상의 주인의 권능이 다시금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의식만이 남아 다시 수 년을 보내야 한다. 흑린에게는 그 능력에 대항할 힘이 있겠지만, 자신에게는 없다.
그렇다면 그 능력의 발동을 막아야 한다.
"아. 그건 이미 질리도록 봤어."
―――비슷한 생각을 흑린도 했던 모양. 만상의 주인의 팔이 기이한 모양으로 꺾이더니 어깨에서부터 비틀려 뽑혔다. 피와 살점이 기이할 정도로 솟구치는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그 순간, 늑대는 눈을 의심했다. 분명 팔이 뽑히는 걸 봤는데도 사라져 있었으니까. 뽑힌 팔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한눈팔았나? 아니다.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도 깜빡거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대체 어떻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엉켜간다. 어느새 무릎 꿇은 만상의 주인이 울혈을 토해냈다. 입가를 닦아내더니 검은 피가 손목에 흥건히 닦여나오는 게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흑린의 손이 그녀의 아래턱을 쥐어 들어 올렸다.
"재밌는 장난을 치던데."
높은 곳까지 들어 올려진 만상의 주인.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그녀를 확실하게 압도하고 있는 모양새.
……그렇게나 강했던가?
아니, 당연한 일이다. 만상의 주인은 스스로 패배를 시인했다. 그리고 초월의 영역에 올라 자신을 도우라고 말했다. 적어도 그녀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뜻이다.
――자신이 하겠다고 한 건 그런 흑린을 먹어치우겠다는 것. 미약한 고동이 느껴진다.
그 순간, 혈화가 피어올랐다. 아래턱이 부서져 붉은 핏물이 만개한 꽃처럼 흘러내렸다. 힘없이 꺾인 목이 기이한 방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눈앞의 시체. 그것마저 완전히 불타올라 사라지고야 말았다.
그리고 한숨 쉰 흑린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가더니,
"같잖은 허상만 쓰고 있을 셈?"
허상―― 그래. 그 말대로였다. 언젠가부터 어떤 손이 자신의 등줄기를 짚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도망치기만 할 거라면 여기까지 온 이유를 모르겠는데."
영락없이 귀찮음이 드러난 표정. 그리고 늑대는 자신에게 속삭이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도망칠 거야.'
그리고 어느샌가 갈라진 틈으로 자신을 집어 던졌고.
"놓칠 줄 알고?"
마지막에 그런 목소리가 언뜻 들려온 것 같았다.
***
네버랜드의 붕괴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린 건 용인 시의 대표 클랜인 용마의 거암이었다. 언제나 그 지척에서 매번 공략을 위해 움직이던 이들인 만큼 만약의 사태에 대한 대비 또한 철저하게 되어 있었다.
단 한 번도 있었던 적 없고 앞으로도 없어야 할 최악의 던전의 붕괴. 연달아 일어나는 재난에 맞서 백군태는 지휘 체계를 잡았고 그 말에 따라 일사불란히 움직이는 이들이 군과 연계해 시민들을 피난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다.
"전방! 스틸레톤 1개체!"
무전에 따라 총구를 겨눈 이들은 곧 거암의 헌터가 소리치는 것에 총을 거둬야 했다.
푸른 금속의 해골 병사. 공략대에 참여해 본 헌터는 그것들이 얼마나 단단한지 잘 알고 있었다. 대물저격총을 쏴도 힘들 텐데 고작 소총으로 가능할 리가 없다. 현대화기로 놈을 쓰러뜨리려면 미사일이나 탱크 정도는 가져와야 하리라.
스틸레톤이 강하기도 했지만 군과는 상성이 좋지 않다.
검에 마력을 담은 헌터는 물러나라고 고갯짓했다. 그 말에 소대장이 병사를 지휘하는 사이, 달려든 스틸레톤의 무릎 뒤, 오금을 걷어찼다.
비틀거리는 스틸레톤이 손을 뻗어왔지만 헌터는 유려한 움직임으로 피해내며 균형을 무너뜨렸다. 금속 해골이기에 필연적으로 뻣뻣한 움직임은 헌터를 따라가지 못했다.
스틸레톤의 강함은 밀집에서 나오는 것. 좁은 미궁에 발 디딜 틈 없이 집결된 스틸레톤은 부서지지 않는 강철의 병사들. 하지만 딱 하나가 떨어져 나온 거라면 그렇게까지 어려운 상대는 아니다.
곧 관절부의 마디마디를 부순 헌터가 아직 움직이는 해골의 두개골을 짓밟았다. 급소임과 동시에 가장 단단한 부위였기에 바닥이 깊게 움푹 들어가며 쉽게 부서지지 않았지만.
"……."
문제는 이런 스틸레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 딱 한 번 3구역까지 도달한 적 있었던 헌터는 침음했다. 어두컴컴한 골목으로부터 어떠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외길을 따라 루트에서 벗어나선 안 되는 3구역. 한순간도 마법사들의 마력 장벽에서 나가서는 안 된다. 그게 금기라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언뜻 보이는 저것들 때문이다.
악귀ㆍ원령. 3구역과 4구역 전체에 즐비한 원혼들이며 강철의 정신을 가진 이들조차 한번 당하게 되면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정신을 파고드는 마물.
놈들까지 나온 거라면 최소한 1구획과 2구획의 보스도 풀려났다는 것일 터. 이 좁은 땅이 어떻게 될지는 상상하기도 싫다.
놈들에게 등을 돌리고, 헌터는 재빨리 대열로 돌아가 합류했다.
그러는 동안 어디선가 사자의 울부짖음이 들려온 것만 같았다.
***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이어지는 와중에 어지러운 차원을 몇 개나 넘어서야 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사슬에 속박돼 지친 표정의 만상의 주인에게 이끌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차원을 넘었다.
검은 불꽃이 이글거리며 틈새 그 자체를 불태우며 뒤쫓아온다. 뒤를 돌아본 소녀는 거리가 좁혀지고만 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라면 잡히고 만다. 혼자라면 어떻게 도망칠 수 있겠지만, 감정이 있는 한 검은 도깨비불은 어디까지라도 쫓아올 터… 그리고 붙잡히면 끝이다.
차라리 놓아버리면 도망칠 수 있겠지만, 희망의 가치가 발목을 붙잡고 있다.
……혼자서는 흑린을 쓰러뜨리기란 난해하다. 하지만 희망이 자신과 함께 흑린에 대적한다면 가능하다. 거기서 끝날 뿐만이 아니라 종말을 막을 방법까지도 자신에게는 있다.
거기까지 다다르는 장애물은 딱 하나. 고집불통인 희망을 설득하기만 하면 된다. 아까처럼 협박해서라도 어떻게든 협력을 끌어낼 수 있다. 즉, 이 자리를 벗어나기만 하면 끝이라는 거다.
그런데 흑린은 도무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어떻게든 여기서 끝장을 낼 심산인 모양. 포기하지 않는 집념에 혀를 내두른 소녀는 선택의 때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어쩔 수 없다. 이대로 잡힐 수는 없으니까. 즉 기나긴 술래잡기의 시작이라는 거다. 누굴 쫓을지 모르는… 아니, 거짓말이다. 언제든 잡을 수 있는 희망은 놓아두고 자신부터 쫓으려 하겠지.
두 개의 차원을 연 소녀는 마지막으로 늑대의 귓가에 어떤 말을 속삭였다.
***
제멋대로 내던져진다. 열린 차원의 문으로 집어던져진 채 그곳을 부유한다. 몸이 붕 떠 있는 감각. 이전처럼 좁은 틈새가 아니라 확실한 길을 지나고 있었다.
"―――."
빠드득, 이가 갈렸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그 무력감이 사무친 원한처럼 파고들었다.
둘의 싸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지한 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같은 영역에 자리하지 않는 한 싸울 수 없단 걸 확인한 거나 다름없다.
여기까지 온 걸 후회하는 건 아니다. 종말이 오는 걸 늦출 수 없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천천히 성장해 초월의 영역에 다다를 시간은 없다. 그렇다면 설령 아무리 적은 확률일지라도 싸워보는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싸움이 성립하기는커녕 이렇게 제멋대로 끌려다니는 게 고작이었다.
절대적으로 힘이 부족하다.
위에는 위가 있다. 그 사실은 매번 뼈저리게 느껴왔다. 자만할 시간조차 없이 더한 괴물들이 자신을 가로막았으니까. 그러나 단 한 번도 좌절한 적은 없다.
그 길은 멀어도 닿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힘이 있다면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거다. 시간이 있다면 힘을 기를 수 있을 거다. 그러나 현실은 시간도 힘도 터무니없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조차 저항하고 있는데 닿지 않는다.
그렇게나 달려왔는데. 사선을 넘으며 억지로 여기까지 다다랐는데 모자란다는 건가? 아득한 정상에는 닿을 순 없다는 걸까.
……당연하다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만상의 주인은 영겁이란 시간 속에서 마침내 그 영역에 다다랐을 테니까. 이 세계에 오게 된 지 1년 남짓한 자신이 투덜거리는 게 이상한 거였다.
하지만 그건 변명이 되지 않는다. 종말이 자신의 사정에 따라 찾아올 리는 없을 테니까. 닿지 않을 거라고 손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네버랜드와 던전이 일거에 붕괴해 지금 현계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것저것 가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만 한다.
열린 차원의 틈새로 되돌아온 곳. 흑린의 성에서 늑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만상의 주인이 굳이 여기까지 자신을 날려 보낸 이유는 달리 떠올릴 수 없으니까.
홀로 고성에 남게 된 늑대는 준비된 만찬―― 자신과 같은 정신체들을 씹어먹으며 새삼 다짐했다. 반드시 초월의 영역에 올라 둘을 먹어치우고 종말을 막아내고야 말겠다고.
그리고.
'시간은 벌어줄게.'
마지막에 들린 속삭임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
골목 사이에 있던 산양은 별안간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좆같았는데 잘됐네."
이죽이는 표정과 말투. 마치 자신을 찾아오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말해온다. 팔짱을 낀 채 오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조그마한 것이 붉은 구름 위에 떠 바닥에 침을 뱉자 산양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시발 안 그래도 꿀꿀했는데 잘 걸렸다고. 이 씹새끼야."
손을 들어 올린 조그마한 것으로부터 붉은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 심상치 않은 힘에 마찬가지로 마력을 일으켰다.
회색 마력과 붉은 마력이 팽팽히 충돌― 아니, 명백히 붉은 마력이 압도하고 있었다. 끝을 모르는 마력이 해일처럼 쏟아져나와 자신의 마력을 뒤덮어버렸다. 조그마한 것, 홍유리는 처형자를 비웃었다.
"뭐야. 별로 대단할 것도 없네."
네버랜드의 구획 보스― 재앙을 제외하면 최악의 몬스터라 불리는 그것을 상대로 우두둑, 손가락을 꺾었다.
전에는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가능하다. 그 커다랗고 암담해보였던 구획보스가 이제는 벽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 그만큼 자신이 강해진 거다. 비록 알파의 성장세와는 비견할 수 없더라도 여기까진 올 수 있다.
자신이 강해졌다는 걸 실감하게 해주는 상대. 그 앞에서 홍유리는 눈살을 좁혔다.
갑자기 이것들이 기어 나오게 된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다른 차원으로 떠난 알파와 모종의 연관이 있으리라고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도대체 뭔 개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지.
그래도, 아주 조금이나마 머리가 맑아졌다. 같이 싸울 수는 없더라도 그 뒷바라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상대는 구획 보스. 당연히 방심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질 것 같지는 않다.
산양은 거대한 낫을 어깨에 짊어진 채 걸어오고 있었다. 용인시의 어느 골목에서 산양과 반룡이 격돌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