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화 〉 #132 종말을 향해
* * *
침투하는 악의. 몸속 깊은 곳에 침투해 지배권을 빼앗아오려는 악귀ㆍ원령에 맞서는 마력. 까놓고 말하자면 아까 들이킨 물약 자체가 이놈들의 상극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체가 없는 놈들을 쓰러뜨리기 위해선 마력이 필수 불가결. 그런데 그게 넘쳐흐르는 지금 내부로 파고들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너덜너덜한 자신이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만 떠다니는 원령. 당연 강훈이 가만 있을 리 없지만 그럴 때마다 강태준이 제지하고 있다.
둘의 기량은 거의 호각. 밀리는 거라고 하면 순수한 힘 싸움이었지만 겨우 그 정도 차이로 형님을 떼어놓고 자신에게까지 올 수 있을 리 없다.
시간이 지나면 누가 우위에 설지는 뻔하지만…
"……물론 그러기 전에 장사 지내드려야지."
극한의 냉기가 팔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기에 안에서부터 얼어 괴사하고 있다. 마력으로 녹여냈다지만 이미 상처 입은 것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 대가로 그를 쓰러뜨릴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것이리라.
머잖아 완전히 사라진 악귀ㆍ원령을 뒤로하고 너덜너덜한 두 형제가 아버지였던 망령과 맞서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이우."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둘과 하나가 격돌했다.
***
스퀘어의 마법사들까지 참전하며 상황은 빠르게 정리돼갔다.
네버랜드를 여태 공략할 수 없었던 큰 요인 중 하나는 불확실성과 던전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함정을 비롯한 온갖 요소에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다.
하지만 바깥이라면 다르다.
폐쇄 직전의 광란도 미지의 요소도 없다. 인류에게 있어 도시란 건 익숙한 터전일 뿐이다. 건물은 그 자체로 벽이 돼 사방 팔방에서 둘러싸이는 걸 막아준다. 골목과 대로 사이로 넘어오는 몬스터마저 바리게이트를 쌓거나 군의 화력을 집중시키고 전국의 헌터가 모여 어떻게든 틀어막고 있다.
문제는 약한 다수가 아닌 강한 단수였지만,
그마저도 1구획의 처형자는 홍유리가. 2구획의 스노웰은 여명과 거암이. 3구획의 벤시와 4구획의 아우라우네는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쓰러뜨려주었다는 제보가 있다.
즉, 유일하게 남은 구획 보스는 이 불꽃의 잔재.
그렇기에, 극복할 수 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
"Zero absolute!"
높은 목소리. 눈으로 보일 정도의 한기. 눈보라와 함께 지상에 살포시 내려앉은 눈꽃이 녹아드는 듯하더니 전부 얼리기 시작했다.
온갖 것들을 흉내 낸 불의 잔재들이 가장 먼저 얼어붙어 움직임을 멈춘다. 그 외의 몬스터도 예외가 되진 못했다. 범위 내의 모든 것들이 겨울을 맞이해 갔다. 그렇게 시가지가 하얗게 물들어가는 때, 융단 폭격과도 같은 마법의 세례가 작렬했다.
미리 보았기에 알고 있다. 저 불꽃에게 무엇보다 효과적인 건 물이 아니라 바람이라는 것을. 영창하는 말이 얽히고 얽혀 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Vânt puternic!"
"O furtună furioasă mătură totul!"
바람의 마법이 서로 얽히고 얽혀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문을 외는 이는 아직 젊은 사내. 그러나 누구보다 위대한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Dumnezeul taifunului, vino!"
유일하게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옐로우 스퀘어. 본래 천둥의 마법을 다루는 계파였으나 천둥보다는 함께 몰아치는 흐름에 보다 정통한 이였다.
"În timp ce uriaul vântului merge, totul răcnete."
마법의 시조이자 모든 것에 통달한 만상을 제외한다면 이 세계에서 제일가는 바람의 마법사.
"Pleacăi capul în faa furtunii de neoprit!"
그 이름, 북풍의 주인.
마법으로 이루어진 모든 바람을 집어삼키고 몰아치는 수십 갈래의 폭풍이 어떠한 형상을 만들었다.
불의 거인과도 흡사한, 이른바 바람의 거인.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전황이 뒤바뀌기 시작한다.
아까의 한기와 거인의 움직임이 불의 잔재를 억눌러간다.
"……뭐, 자리값은 하네."
늦게 온 주제에 폼 잡는다고 투덜거리던 홍유리의 불만이 쏙 들어가게 만들기에 충분한 마법이었다. 거인이 날뛰면 날뛸수록 도시는 엉망으로 변했지만, 이미 그런 걸 따질 만큼 남아 있지도 않았다.
머잖아 시간이 더 흘렀을 때, 불씨는 잦아들어갔다. 여태 그 모습조차 확인하지 못했던 5구획의 보스치고는 다소 허망한 끝이었다.
사상자는 있었지만 언뜻 예상했던 수치에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니까. 겨우 이 정도로 틀어막았느냐, 하고 김 빠지는 느낌마저 있었다.
"……."
물론 그 이면에 누군가가 3, 4구획의 보스를 홀로 쓰러뜨리고 5구획 보스의 약점을 귀띔해 준 데다가 스퀘어의 지원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홍유리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여기서 상황은 끝이다.
클랜장님과 그 망할 근육 뇌가 돌아오기만 하면 정말 끝이다. 당연히 도우러 갈 생각이지만… 홍유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바깥의 상황이 정리된 때, 미궁 안에서 시끄러운 격돌음이 울려 퍼진다.
던진 팔뼈를 막으며 몇 미터인가 밀려난 강훈은 그것을 아래로 쳐 냈지만 이미 지척까지 검이 들이닥친 뒤였다. 목을 노리고 다가오는 붉은 검. 그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다.
건틀릿으로 검을 비껴낸 강훈은 몸을 숙이며 파고들었다. 이런 공격이 통할 리 없겠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다.
고통이 없다고 체력의 한계가 사라진 건 아니라는 뜻이다. 어깨에 부딪쳐 나가떨어진 강태준이 반대편 벽에 처박히기 직전, 몸을 날린 강태호가 그를 받았다.
"……!"
소리 없는 아우성. 안 그래도 부러져 콕콕 찌르고 있던 늑골이 폐를 완전히 꿰뚫은 것이다. 눈을 크게 뜬 강태호는 그를 받은 게 실수란 걸 깨달았다.
숨이 쉬어지지가 않는다. 밖으로 배출돼야하는 날숨이 뚫린 구멍으로 새어 나와 몸속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간다.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강태호는 이를 악물고 옆구리로 손을 가져다 대고는 폐를 찌른 갈비뼈를 완전히 부러뜨렸다.
몸 바깥이라면 모를까, 몸 안까지 마력으로 뚫린 구멍을 막는 미세한 컨트롤은 어렵다. 아무리 참아봐도 결국엔 한계가 온다.
"괜찮나?"
묻는 말에 대답할 수가 없어 끄덕인 강태호는 이미 들이켰던 숨만을 이용해 싸우기로 했다.
그사이, 쫓아온 강훈의 검이 세차게 휘둘러졌다. 창염이 일렁이며 그 모습이 가려지는데 먼저 나선 강태준이 얼어붙은 대기를 베어냈다.
살얼음이 끼는 듯한 한기를 참아내고 이를 악문 강태호는 숨을 쉴 수 없는 그대로 동강 난 하나 남은 팔뼈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본래라면 그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을 테지만 역시나. 가볍게 내동댕이쳐지고 복부를 걷어차였다. 울혈을 토한 강태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시벌.'
도무지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고작 숨 좀 못 쉬게 됐다고 이렇게 된 게 한심했지만 이미 몸속엔 에너지를 연소시킬 산소가 남아 있지 않다.
재생 스킬을 가지곤 있지만 낫기 전에 죽는 쪽이 먼저이리라. 목덜미를 부여잡고 주저앉자 흘깃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고 어떻게든 일어나려 했지만,
"그대로 있거라."
제지하는 목소리가 자신을 말린다. 듣지 못했단 것처럼 강태호는 팔에 힘을 주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데 이미 자신은 일어날 수조차 없게 돼 버렸다.
격전이 이어지는 중에 강태호는 한 번 더 걷어차였다.
강훈이 아닌 자신의 형에게. 물러날 수 없는 그를 걷어차 싸움에 휘말리지 않게 한 거였다.
고통은 없다. 없는데… 비참했다.
여기까지 와서 겨우 이깟, 이깟 상처 때문에 주저앉아 있다는 사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알고 있다.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걸. 자신이 아는 어떤 짐승처럼 몇 번이나 그걸 넘어설 순 없다. 기적이란 일어나지 않기에 기적이었고 한계란 넘을 수 없기에 한계라는 걸.
헌터는 냉정해야 한다.
그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도무지 그럴 수 없다.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한심한 건 그래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
딱 한 번. 딱 한 번만 죽일 수 있으면 그걸로 끝인데.
아버지였던 망령에게 끝을 선사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한데……!
그게 못내 분해서 이가 갈렸다.
왜 몇 번이고 닿질 못하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늘 실패해 버리고 만다. 정작 자신의 주변엔 몇 번이나 기적같은 일을 이룩한 이가 있는데.
여기서 둘 다 죽어 버리고 지금 어떻게 됐을지 모를 바깥에서 그가 학살을 이어나갈 거라고 생각하면…
혼자 버티는 건 예상대로 불가능했다. 지치고 상처 입은 건 자신만이 아니라 형님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어느새 엎어진 강태호는 어지럽게 얽히는 발놀림을 보다가 결국 바닥에 붙어 있는 발은 딱 두 개뿐이게 되었다.
즉, 목덜미를 붙잡혀 들어 올려진 것.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잘 싸웠다."
담담히 칭찬하는 말과 함께 고기가 잘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마저 잊어 버리고 강태호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생동감없이 쓰러지는 누군가의 모습이. 그런데도 유난히 생생한 붉은 피가 시야를 가득 메운다.
어느샌가 강태호는 주먹을 쥐고 있었다.
심장이 세차게 방망이질하고 거친 숨이 더욱 거칠어졌다.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속에 들어찬 것을 짐승이 포효하듯 울부짖었다.
"!"
그리고
[미약한 재생이…]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몇 번이나 들어 본 적 있는 말소리. 그런데도 유독 선명히 들리는 듯하다. 그렇게 본래 가지고 있던 재생의 등급이 오르자 폐부의 구멍이 메워지기 시작했다.
'……!'
창백한 안색이 조금씩 색을 되찾아간다. 들이킨 숨의 산소가 혈관을 타고 전신을 달리자 강태호는 가슴께를 긁었다. 그러자, 흉부를 찢고 구멍이 난 가슴 안쪽에서 공기가 새어 나왔다.
한계는 극복할 수 없기에 한계라지만 그걸 넘어서는 데 필요한 건 아주 사소한 계기일 뿐. 갑작스레 일어난 강태호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강훈은 어깨에 밀쳐져 나가떨어졌고, 강태호는 검을 들었다.
여태까지 휘둘렀던 팔 뼈가 아니라 붉은 검.
쓰러진 강태준의 검이었다.
***
세계는 고요함을 되찾았다.
불청객이 사라진 이 공간, 모든 게 사라진 곳에서 조용한 정적을 맞이했다. 어떤 마법과 대가와 의지에 빛을 찾았던 세계는 다시금 잠들었다.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세계는 잠들지 못한 채 움직이고 있었다. 만상의 주인이나 흑린의 예상과는 달리.
그건 있을 수 없는 일. 광활한 우주의 티끌이나 먼지와도 같은 개인의 의지 따위가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건 본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미 그 의지는 혼자만의 것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비대해져 있다. 스며든 감정과 기억은 그를 홀로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늑대였던 존재가 다시금 세계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 섞여 버린 그는 새로운 세계의 형태가 되었으니.
달라진 점은… 그래. 잠들지 않았다는 것.
세계는 자신을 움직였던 그 강렬한 의지에 동화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리의 이면이자 끝을 상징하는 존재. 종말을 죽이기 위하여.
늑대였던 세계는 다른 세계와 차원을 넘어 아직은 머나먼 곳에 있는 종말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