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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09화 (309/407)

〈 309화 〉 #142 집행

* * *

페리를 되찾고서, 이제 절반에 불과하다.

악의를 쫓아 끝을 맺어야한다. 그것이 향하는 방향이 진리와는 동떨어진 곳임은 알고 있다. 그 시커먼 속내는 냄새만 맡아도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뻔하다.

그것을 물어뜯은 순간, 깃들어있던 힘은 어느샌가 자신에게 넘어와있었다.

근원을 앗아왔다는 건 당연하게도…

'악의.'

그것들이 술렁거린다. 당연히 전부는 아니나 근원에 붙어있던 악의가 자신에게 스며들어왔다.

시끄러운 소리. 비명. 단말마. 괴성. 호소.

언어와 짐승의 소리가 정신을 어지럽혔지만, 닿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극기 99 → 100]

이미 악의따위는 침투할 수조차 없을 만큼 견고한 정신. 육신에 남는 스테이터스와는 달리 극기는 더욱 견고해진 채로 정신 속에 남아있었으니까.

[극기 100 → 불굴(不?)]

악의는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완전히 사라지고 힘의 정수만이 온전한 형태로 자신에게 남아 있었다.

'근원.'

그게 근원이란건 알고 있다. 또한, 초월의 영역에 필적하는 그 힘조차 고작 일부에 불과하단 것 또한. 적어도 만상의 주인이 생각했던 건 틀리지 않았다는 거다.

근원에 깃든 힘은 마찬가지로 진리의 이면인 종말과 대등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힘을 전부 갖게 된다면 종말을 쓰러뜨리는 것 또한 불가능하진 않으리라.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전부 가지지 못한다면…"

종말과 맞서기엔 무리가 있다는 뜻이다.

늑대의 후각이 머나먼 곳의 냄새를 들이켰다. 그러자 머나먼 곳의 풍경이 가까운 곳에서 보이듯 뇌리에 떠올랐다.

처참하게 쓰러진 만상의 주인의 모습이.

***

쓰러뜨릴 수 없는 폭력의 화신.

가까스로 반계를 사용해 멀어지고 영원을 자신에게 겹쳐 상처를 회복했을 뿐. 고작 10%. 일부에 불과할 뿐인데도 악의가 가져간 그 힘이 구멍을 만들고 말았다. 호각이었던 싸움을 불리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몇 번이나 죽었는지 모른다. 영원의 보조와 반계가 없었다면 셀 수조차 없었으리라.

중간중간 끊긴 의식과 악의에 침식당한 정신에 기억이 혼탁했다.

상처는 입힐 수 있으나 거기서 끝. 재생하는 속도와 큰 차이는 없다. 따라서, 쓰러뜨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패색은 짙은데 승산은 보이지 않는다.

뒤늦게 엘릭서에 깃들었던 악의를 완전히 잠재웠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말았다. 거기에 들어간 신혈이 흑린이 아니라 여왕의 것이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좀 더 서둘러서 했어야 했나. 아니, 애초에 희망이 성장하길 기다려서는 안 됐었나. 차라리 진작에 싹을 밟아두었더라면.

'그렇지 않아.'

충분했다. 자신은커녕 흑호에도 미치지 못했었다. 그런데도 기어코 흑호를 쓰러뜨리고 계획을 헝클어뜨려 놓았을 뿐.

실패에 이어진 실패. 모든 건 자신이 어설펐기 때문에.

만상의 주인은 웃어버렸다.

그 웃음은 즐거움이나 기쁨이 아닌 허탈함에 흘러나온 실소.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통하기 때문에 허탈하고 절망스러운 거였다.

흑운과 근원에 상처입으면서도 도무지 죽지 않으니까.

뛰어난 수 읽기가 이미 명명백백한 미래를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물론 아직 싸울 순 있지만, 마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어느새 상처는 회복했지만 결국 이대로 간다면 이 백중세마저도 놈의 재생에 묻히고 마력이 바닥난 자신이 먼저 쓰러지리란 건 명백한 사실.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 저 거대한 괴물을 올려다보았다.

용과 악마가 섞인 모습의 절대자. 결코 쓰러뜨릴 수 없는 폭력의 화신, 종말. 결국 닿을 수 없었다는 거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고 정해진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어쩐지 바닥을 짚고 일어서고 있었다.

포기해야 하는데. 하다못해 도망치는 정도는 가능할 텐데. 이미 결과가 뻔히 보이고 있는데 왜 이렇게 어리석게도.

'…….'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딱 한 번쯤은 기적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그처럼 한 번쯤은 불가능을 뛰어넘고 시련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영겁의 시간동안 쭉 바라왔던 염원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다못해…"

그래서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처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

놀라운 집념이었다.

온전한 형태는 아니라고는 하나, 일개 인간이 근원을 되살린 건 진리가 탄생한 이래 전무후무한 일이었으니. 그건 분명한 기적이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나 그 어떤 무엇보다 놀라운 업적이기는 했다.

하지만 결국 거기까지. 근원을 되살린 인간은 산산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악의에 침식당해 이루지 못한 염원을 품고서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완전히 존재마저 사라졌으니 그녀가 가지고 있던 근원의 힘은 다시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리라.

종말은 다시 머나먼 곳을 보았다.

알고 있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일부에 불과하지만 근원의 힘을 가지고 도망친 잡것이 있다. 어쩌면 그것이 아니었다면……

빼앗긴 건 되찾아야만 한다.

질서는 바로잡아야 한다.

별의 순환. 정말 영원한 것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새로운 가능성과 세계의 탄생을 위해 낡은 세계는 없어져야만 한다.

조금 이르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

종말은 기꺼이 집행의 의지를 다졌다.

근원의 일부를 가지고 도망친 악의가 향한 곳. 그것을 찾아 회수하고 마지막 남은 세계마저 부숴버리리라.

다만, 종말은 알지 못했다.

근원의 힘을 받아들였던 전무후무한 인간과 싸우며 한눈 팔 겨를이 없었기에 그 짧은 시간 동안 근원의 일부는 더 이상 악의에게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종말은 악의를 뒤쫓아 차원을 넘었다.

***

'다 왔어.'

악의는 새하얗게 웃었다. 비록 근원의 힘을 빼앗겼더라도 여기저기에 뚫려있는 차원의 틈새를 이용하면 마지막 세계까지 도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악의가 차원을 넘어 지구에 도달한 순간, 가장 가까이서 본 것은 비행기였다.

실수. 굳이 자신을 숨기지 않았기에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흑단처럼 긴 머리칼을 한 누군가와.

'……저건 조금 귀찮겠어.'

저 여자 자체는 상관 없다. 하지만 함께 비행기에 타고 있는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자색 마력이 범상치 않다. 적어도 인간의 한계에는 도달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근원의 힘을 뺏긴 지금이라면… 설마하니 질 리는 없겠지만 제법 시간을 뺏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이에 늑대가 쫓아올 수도 있을 테고.

한 때 종으로 부리던 정신체 수준의 힘마저도 남지 않았단 게 허탈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래도 이깟 버러지들을 상대하기엔 차고 넘치는 정도다. 벌레나 마찬가지인 재앙 하나 쓰러뜨리지 못하는 인류 따위는 여전히 같잖지도 않다.

"……!"

그래서 비행기에 함께 타고 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악의는 자신을 숨기기로 했다. 곧, 눈이 마주쳤던 누군가­ 백소율은 순간 검게 물든 세상을 자신의 착각이라 치부하고 말았다.

***

늑대가 열어준 차원의 틈새 너머에서 빠져나온 홍유리와 이은하는 그 사이에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알게 됐다.

어느새 6월의 중순 끝자락. 말도 없이 무단으로 보름이 넘도록 결근한 셈. 사실상 클랜에서 제적당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돌아오자마자 쌓여있는 문자와 부재중 통화에 새하얗게 질린 이은하는 어디부터 연락해야 하나 질끈 눈을 감고 막막해 했지만 홍유리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았다. 어딜 간 거냐며 쪼아대는 하연의 잔소리를 듣는둥 마는둥 넘기며 커피만 계속 들이켰다.

벌써 몇 잔 째일까.

카페인이 가득 차서 머리는 쌩쌩 돌아가는데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악의에 빼앗긴 페리의 정신. 그리고 다시 육신을 되찾은 알파. 분명 가만히 기다리라고 했는데…

"아, 씨발."

홍유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복잡한 머리와 눌러도 눌러도 치고 올라오는 걱정에 푹 한숨이 나왔다. 숨이 꽉 막혀서 가슴이 답답해져온다.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미 백록은 산으로 돌아갔고 언제나 그랬듯 이은하는 잔소리를 듣고 있다. 그냥 가만히 일상에 복귀해 알파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는 건 알고 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몇 번이나 되뇌여도…

'그야 그렇겠지.'

당연한 일이다. 알파가 실패하면 결국 종말이 찾아오는 거였으니까. 그냥, 전부 끝. 도망치지도 못하고 모두 죽고 마니까. 그런데 지금 일 같은 게 손에 잡힐 리 없다.

하다못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라도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답답하진 않을 텐데.

'전부 되찾아오겠다.'

그 한 마디 말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게 한탄스러웠다. 박박 이를 갈다가 결국 산처럼 쌓인 서류를 처리한 건 고작 세 장. 그런데 어느새 해가 저물어 있었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팀원들을 보고 홍유리는 턱을 괴고 말했다.

"뭐? 누가 뭐라 하냐? 퇴근하든가."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이내 반색한다.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화색을 띤 상기된 표정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어휴. 저렇게들 좋을까. 홍유리는 실소와 함께 한숨을 내쉬다가.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상념을 깨는 목소리에 고개만 돌려 아직 퇴근하지 않은 우택을 보았다.

"왜? 넌 안 가?"

"아직 할 게 남았잖습니까."

일을 쌓아두는 성격이었나? 그럴 리 없는데. 일이 남았다는 것 치고는 이미 깨끗하게 정리된 책상을 보곤 모로 고개를 꺾었다가 그 손가락이 자신의 책상을 가리키는 걸 보곤 이맛살을 찌푸렸다.

"넌 이게 끝날 거 같냐?"

"그럼 뭐 안 하시렵니까?"

그냥 되묻는 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야, 안 할 수는 없으니까. 이은하까지 끌고 가서 보름 넘게 자리를 비운 것도 모자라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답시고 땡땡이까지 피웠는데 뻔뻔하게 안 하겠다고 할 수는……

"……시발."

저 위에선 세계가 멸망하네 마네 하고 있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고작 이런 것. 푹푹 한숨 쉬면서도 도무지 바뀌지 않는 현실에 홍유리는 결국 펜을 쥐어야만 했다.

…….

한참이나 했는데도 아직 산처럼 쌓여있는 서류 더미는 아직도 절반 넘게 남아 있었고 뻐근하다는 듯이 기지개를 켠 홍유리는 바깥이 어두컴컴하게 물들어 있음에 혀를 차고 말았다.

어느샌가 시간이 자정을 넘기고 있었으니까.

"야. 커피라도…"

한 잔 가지고 오자고 그렇게 말하려다 자리에 없는 그를 보고 의아해하다 창가에 붙어 바깥을 보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농땡이 친 건 아닐 테고… 도대체 왜? 이 새벽에 볼 게 뭐가 있다고?

하물며 그 고개는 아래가 아니라 한참이나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홍유리는 깨달았다.

조금의 미동도 없는 그의 모습에서 위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라 넋을 잃은 거라고.

도대체 뭐가 있길래?

마찬가지로 올려다본 홍유리는 그저 어두컴컴할 뿐인 하늘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아 뭐. 암것도 없잖아."

이게 아까 쪼아댈 땐 언제고 그냥 확…?

"……없습니다."

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와 손가락이 저 높은 하늘을 가리켰다.

"달이, 달이… 없습니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에 가려지기라도 했단 것처럼.

"뭐?"

말같지도 않은 소리에 찾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은 홍유리는 유심히 하늘을 살폈고, 착각이었을까? 조금이지만 하늘이 움직인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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