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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27화 (327/407)

〈 327화 〉 #152 크라켄 토벌 (2)

* * *

예상했듯이 크라켄을 쓰러뜨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거대하다는 건 그 자체로 위협이었지만 마법사에게 있어선 이야기가 다르다. 느리고 둔중하고 거대한 적. 마법을 적중시키기에 그 이상의 표적은 없으니까.

3절의 마법도 제대로 먹히지 않을 만큼의 강인함과 높은 등급의 재생 스킬로 인한 빠른 회복.

그러나 달리 말하자면 고작 그 정도라는 거다.

강인함이 따라오지 못할 만큼 뛰어난 마법과 재생할 시간을 주지 않게끔 몰아붙이면 된다.

즉, 대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홍유리가 도착한 순간부터 결과는 뻔하다는 뜻이다. 이곳의 대표 클랜과 여명의 3팀에게는 마법을 영창하는 동안 놈의 발을 묶을 능력이 충분히 있었으니까.

"Arzând în abis i transformându­se în cenuă!"

마법진이 회전하기 시작하자 크라켄과 싸우고 있던 헌터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발이 풀린 촉수가 그들의 뒤를 쫓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빠르게 마법이 작렬했다.

흑점의 폭발. 바다 한 가운데서 작렬한 대마법은 인근 수면의 온도를 몇 백도나 억지로 끌어올렸고 증발한 양 이상으로 치솟은 해일처럼 거대한 물보라가 시야를 가렸다.

해안가를 완전히 덮고 모래사장을 뒤엎어버린 터무니없는 위력. 멀리 서 있던 헌터들조차 그 여파로 인한 풍압에 서로를 붙잡고 견디는 게 고작일 정도였다.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위력. 뜨겁게 달구어져 붉게 달아오른 모래사장. 방파제는 깨져나가고 엉망진창이 된 해안가. 하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검게 그슬린 크라켄이 해안가에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으니까.탄 문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적어도 냄새만큼은 잘 익은 문어구이를 떠올리게 했지만…

이은하는 그 그로테스크한 모습에서 애써 눈을 돌렸다. 싸우느라 배가 꺼졌는지 뭐라도 먹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걸 먹을 순 없을 테니까. 이 상황에서 배가 고프단 게 스스로 느끼기에도 황당하기도 했고.

"그래서, 어디 있어?"

어느새 다가온 붉은 머리 소녀 홍유리가 묻자 이은하는 아까까지 알파가 있던 곳을 가리키려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 어라?"

분명 여기 있었는데 어딜 갔는지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 꿈이라도 꿨나 싶었지만 어쩌면 사람들이 많아 일부로 숨어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야, 최근에 사이비교가 많이 판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대체."

이은하는 가볍게 생각하고 넘겼지만 홍유리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

앞으로 이와 비슷한 일을 더 행해야 한다. 용혈을 흩뿌려 몬스터를 해안가로 불러들이고 바다 깊숙한 곳까지 나아가 모조리 없애버려야 한다.몬스터가 사라진 세상.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진정으로 평화가 찾아온 세상. 환계가 그러했듯 환수와 살아가게끔 해주는 것. 오직 그것이야말로 덧없이 사라진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빚갚음이리라.

다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늑대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느새 클랜 앞까지 돌아와 있었다. 아직 크라켄과 몬스터 무리의 뒤처리가 끝나지 않았을 터. 그네들이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리라.

문턱에 선 순간, 늑대는 의외의 기척을 느꼈다.

기척이라고 할 것도 없이 자색 마력의 흔적을 느낀 순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녀가 찾아왔음을.

사실, 올 거라고 생각은 했다. 오히려 늦은 편이리라. 며칠씩이나 걸렸다는 게 의외일 정도로. 그렇게계단을 오르는 도중 드물게 자판기 앞에 서 있는 거한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냐. 너 인마. 왜 혼자 왔어?"

같이 나간 거 아니었냐는 말. 늑대는 대답하는 대신 그가 양손에 두 개씩 들고 있는 네 잔의 코코아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이거? 잘 먹더라고."

누구에게 줬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 음흉한 웃음을 짓는 강태호가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하자 늑대는 거절하지 않고 뒤를 따랐다. 어차피거기에 페리가 있을 테고 그녀도 있을 테니까.

"아 참. 걔가 너 찾아왔더라. 그… 이름이 뭐더라."

이미 알고 있는 일. 끄덕거린 늑대는 지금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백소율."

"오. 맞다 맞아. 까먹고 있었지 뭐냐."

***

잘 마신다는 강태호의 말처럼 페리가 앉아있는 자리의 책상 위엔 종이컵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그리고 페리를 무릎에 앉히고 있는 여성.

긴 흑발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지만 못 본 사이에 조금 더 자란 것처럼 보였다. 그 때문일까. 한층 성숙하게 보이는 그녀가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오랜만이에요."

다소곳하게 앉아 인사하는 그녀와는 달리 냉큼 달려온 페리는 자신을 안아 들어올렸다. 촉수를 길게 뻗어 페리를 쓰다듬어주었지만 여전히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돼있었다.

성숙해진 모습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갈고닦은 마력은 처음 보았을 당시의 홍유리. 아니, 그 이상으로 보였다.

어떻게 이 짧은 시간동안 그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

지난 시간을 어떻게, 어떤 생각으로 보냈을지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만 같아 긴 한숨을 삼켜야만 했다.

"…그래. 오랜만이군."

"선생님은 아직 안 오신 모양이네요."

2팀의 벽에 걸린 TV 화면에는 여전히 해안가가 송출되고 있었다. 크라켄을 쓰러뜨린 이상 뒤늦게 몰려든 몬스터를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겠지만 아직돌아오려면 1, 2시간은 더 걸릴 터.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많이 걱정했는데."

늑대는 천천히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백소율을 보았던 때가 대체 언제였던가. 10개월이 아니라 거의 1년만이리라.

실제로, 흑린의 성에서부터 돌아오지 않고서 종말을 쓰러뜨리기까지 죽을 위기는 셀 수도 없이 겪었다. 그렇기에무사히 돌아왔다는 그녀의 말이 새삼스레 기적처럼 느껴졌다.

무슨 말이라도 건네야 할 텐데,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후계자가 됐으니 축하한다고 말할까. 아니면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어야할까.

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어색한 기분이었다. 그래서,말을 건네는 대신에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뭐냐. 이 분위기. 어…자리 좀 비워주랴?"

***

자리를 정리한 홍유리는 뻐근함에 어깨를 빙빙 돌렸다.

분명 있어야 할 터인 알파가 없다는 사실에 일말의 불안은 있었지만 크게 걱정되거나 하진 않았다. 알파가 어떻게 잘못 되리라곤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미심쩍기는 하지만 일단 그건 나중에 집에 돌아온 다음에 캐물어보면 되리라. 제멋대로 추측하는 것보다 그게 더 확실할 테니까.

"돌아가자."

팀을 집합시킨 홍유리는 타고 왔던 차량에 다시 올라탔다. 그리고 마침 출발했을 때, 강태호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의아해하면서도 건성으로 받았다.

"왜요."

[이야. 너 TV나오더라? 다 끝났냐?]

이제 와서 TV에 얼굴 좀 팔리는 게 뭐가 대수라고. 일의 진행을 물어보려 한 걸까? 정리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하니 의미심장한 휘파람부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너 인제 어쩌냐. 인마?]

"아 씨, 또 뭔 개소리야. 이 양반 진짜 또 지랄이네."

"뭡니까?"

"닥쳐."

클랜원의 물음을 신경질적으로 일축한 홍유리는 한숨을 푹 쉬곤 다시 핸드폰에 귀를 가져다대었다.

"할말 없으면 끊어요."

[야! 야! 그게 아니라 이 자식아. 네 라이벌 왔…]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한데. 그러다 홍유리는 마지막 끊어지기 직전의 말을 떠올렸다.

라이벌? 뭔 개소리야 진짜.

***

옥상으로 올라왔을 땐,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아름다운 노을이 새하얀 구름에 비쳐 붉고 노랗게 물들이지만 머잖아 새까맣게 덧칠되고 말리라.차가운 봄바람이 손끝에 얽히자 늑대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혀 변하지 않으셨네요."

변하지 않았다… 자신이 변했다던 홍유리와는 사뭇 다른 말이었다.

"여전히 그대로에요."

그 말에는 확신이 담긴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글쎄…그러는 넌 바뀐 것 같은데."

한층 성숙해진 외견만이 아니라 그 내면 또한. 초조함이 사라지고 차분함이 들어찬 듯 보였다. 스승인 환영의 나비보다는 겨울의 주인을 좀 더 닮은 듯한 분위기였다.

"전 사람이니까요."

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그녀는 잠깐의 뜸을 들이더니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도 있어요."

그 또한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못 본 사이에 이것저것 답을 내린 모양.

"여전히 선생님을 좋아하세요?"

"그래."

그 물음엔 망설임없이 답했다. 일순 흐려진 듯하던 백소율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옅은 웃음을 지었다.

"솔직하시네요."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

어차피 서로가 뻔히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변하지 않았다는 건 여전히 백소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아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사실, 돌아오지 않아서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어요."

"……."

"그도 그럴 게 10개월이잖아요."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근원을 되찾는 건 꼭 필요한 일이기는 했지만 더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다. 늦어버린 것에 대해 사과하자 백소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책망하는 게 아니라며 오히려 돌아와줘서 고맙다고.

"정말, 그렇게 불안했는데 선생님이나 은하 언니는 그런 것 같지도 않더라고요."

"……."

"아, 고자질하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믿고 기다릴 수 있단 게 대단하게 느껴졌단 거니까요."

늑대는 천천히 끄덕였다.

"사람들은 전부 다 잊어가는데, 저만 기억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주셨으니까."

오랜만의 재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조금 달라진 그녀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그 말을 좀 더 곱씹어 보아야만 했다.

그 이후, 완연한 밤이 찾아올 때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전에 그러했듯이.

***

좀 더 한국에 머무르겠다는 백소율의 말에 늑대는 편한대로 하라고 말해주었다.페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크라켄을 쓰러뜨리는 건 기정사실이었겠지만, 역시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었는지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드러나있다.

"이제 돌아왔나?"

"……어."

구두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현관에 주저앉듯 앉은 홍유리는 자연스레 어깨를 주무르는 손길에 이제 살 것 같다며 신음을 흘렸다.

그러기를 얼마간, 어깨가 풀리고 찌릿한 시선으로 늑대를 바라보았다.

"이제 말해봐. 뭔 꿍꿍인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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