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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35화 (335/407)

〈 335화 〉 #156 접촉

* * *

낯선 천장… 그렇게 말하기엔 이미 여러 번이나 신세진 장소였다.

눈을 뜬 이은하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목이 마르다.'라는 거였다. 수액 링거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타오르는 듯한 근복적인 갈증.

물 한 컵이 간절해져 수액 팩을 뜯어 마실까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간호사를 부르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분명 버튼이 어딘가 있을 텐데…

"자."

코 앞에 들이밀어진 물 한잔에 허겁지겁 받아 마신 뒤에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도 고작 한 잔으론 터무니없이 부족해서 잔뜩 받아 마시고서야 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후아."

날숨을 뱉자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한다. 마치 오랫동안 사우나에 있었다가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 돌린 이은하는 옆에 앉아있는 동생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학교는 어쩌고?"

"주말이거든?"

"……주말?"

가만히 그 말을 곱씹어보았다. 쓰러지기 전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었기에 대충 자신이 얼마간 쓰러져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토요일인지 일요일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사흘 혹은 나흘. 오래도 누워있었다고 생각할 즈음, 갈증 다음으로 뻐근함이 찾아왔다.

아니, 진작에 그랬겠지만 이제야 깨달은 것이리라.

"……죽겠네."

무리도 아니다. 마지막에 있었던 일은 지금도 생생히 떠오를 정도였으니까. 조금만 잘못됐다면 괴물의 뱃속에서 그대로 밥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죽을 것 같아도 어쩐지 만족할 수 있었다.이번만큼은 자신의 힘으로 극복했으니까.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억지로나마…

이은하는 손을 펼쳐보았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손.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단 걸 잘 알고 있다. 전에 느꼈던,분명 바닥을 보인 마력이 더 깊은 어디선가 끌어올려진 듯한 느낌.

바닥이 바닥이 아니게 됐다는 뜻이다.

알고 있다. 비록 마법사는 아니라지만 홍유리에게 가르침받으며 그런 스킬이 있단 걸 들어 알고 있었다.

모든 마법사들이 꿈꾸며 바라마지 않는 힘. 대마력.계속 닿지 못했던 실마리를 마침내 이 손으로 붙잡았노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지?"

황당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동생에게 멋쩍게 웃은 이은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흔들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막 깨어난 사람이 손바닥을 보곤 실실 웃고 있단 거니까.

간호사를 불러오겠다는 말에 끄덕인 이은하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가 늑골이 쑤시는 아픔에 옆구리를 쥐었다.

하기야 어디 하나 부러지더라도 이상할 게 없으리라. 일으킨 몸을 다시 기대어놓은 이은하는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아픔에도 불구하고 입꼬리가 씰룩이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혼자 실실거리다가 동생과 간호사에게 머리 다친 거 아니냐는 말을 듣긴 했지만.

***

빛이 들어오는 창. 내리쬐는 햇살. 더없이 봄이라고 부를 만한 날씨였다. 카페테라스에 앉은 홍유리는 팔짱낀 채로 찾아올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스퀘어에서 찾아올 마법사를.

'스퀘어라……'

미리 주문한 커피를 들이키며 떠올렸다.

질병과의 결전에서스퀘어는 무너졌고 수십 년간 쌓아올린 지식과 재산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마법사들이 몰살당한 건 아니라지만 당연히 변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이지만 마법은 퇴화하고 있다고 봐도 좋으리라.

스퀘어가 추락하고 평화가 찾아온 대신에 간절함을 잃어버렸으니까. 설령 두렵더라도 나아가지 않으면 역병에게 삼켜진다는 공포와 인류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사명감을 잃어버렸으니까.

그나마 헌터로 전향한 건 일부일 테고태반은 그 능력을 간직한 채로 희희낙락 살아가고 있을 뿐이리라.

구세마랑회라는 말 같지도 않은 조직에 가담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스퀘어라는 이름은 이제 이름으로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빛바랠 일 없을 것 같았던 권위도 제법 추락한 셈.일부는 빛살 좋은 개살구라고 부를 정도로는.

때문에, 그 긍지와 자부심으로 번들거렸던 얼굴이 어떻게 변해 있을까 생각하니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뭘 실실거리고 있어? 기분 나쁘게."

언제 온 걸까. 당연하다는 듯이 맞은편에 앉은 얼굴에 인상을 찌푸린 홍유리가 맞받아쳤다.

"나도 네 면상 보기 싫거든? 애초에 영감탱이 아니었으면 오지도 않았어."

아침부터 보는 얼굴이 하필이면, 하고 혀를 찬 홍유리는 커피를 들이켰다.

"일 얘기나 하고 꺼져. 들어는 줄 테니까."

"……나도 일만 아니었으면 이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리는 모습. 자연스레 바로 앞에 놓인 커피를 들이킨 그녀가 눈이 휘둥그레져 헛기침하자 통쾌함이 밀려왔다.

에스프레소 샷 추가. 원래 쓴 걸 잘 먹지도 못 하는 그녀인 만큼 혀에 닿은 감촉은 강렬했으리라.

보기도 싫은 년을 보러 미리 와 있었던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테이블을 탁 치고 일어난 도로시가 눈을 부라려온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기세에 기가 눌려 아무 말도 못했을 테지만 그 맞은 편에 있는 사람은 오랜 앙숙. 되려 화내는 모습에 체증이 내려간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 이게 진짜! 너 몇 살이야 대체?!"

"뭐. 꼬우면 가던지."

부탁하는 사람과 부탁받는 사람. 둘 중 누가 유리한 입장인지는 명확하다. 실실거리는 얼굴에 기 막혀하던 도로시는 아득바득 이를 갈았다.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거든?!"

"어쩌라고. 체면 좀 지키시지? 쪽팔리게 진짜."

무려 스퀘어 후계자씩이나 되면서. 그 말이 이어졌을 때 질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큰 목소리에 시선이 집중돼 있다. 부들부들 손을 떨던 도로시는 한숨과 함께 손가락을 튕겼다.

고작 그 간단한 동작만으로 이목이 흩어진다.

여기 있었단 걸 전부 잊어버렸다는 듯이. 십중팔구는 이곳의 소리도 바깥으로 새나가지 않으리라.

"일 얘기나 하자. 어차피 내버려 둘 것도 아니잖아?"

"……."

"마랑회. 전부 쓸어버릴 거야. 말단부터 머리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그딴 쥐새끼들, 난 용납 못 해."

스퀘어의 이름에 먹칠하는 잡것들. 한 마리도 남김없이 없애버리겠다는 말에 들어는 보겠다는 듯 턱을 괴었다.

"뭘 더 말해? 그러니까, 너도 손 좀 보태라는 거야!"

꼬리는 잡았으니까. 자신만만하게, 도로시는 더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

바다에서 올라온 늑대는 몸을 흔들어 털었다.

물기가 이리저리 튀는 바람에 깜짝 놀란 페리와 베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돌려 도망쳤지만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얇은 막에 가로막혀 흘러내리는 물줄기. 이미 진작에 대마력마저 습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과연 마녀의 그릇이었던 재능다운 성장세였다.

"정말 여기 있어도 괜찮으세요? 전…"

떨쳐내지 못한 죄악감에 가슴 위에 올린 손은 주먹이 되었다.

"여기 있는 게 정답이다."

"……."

"분명 네게 접촉해 올 테니까."

이유가 어찌됐건 마랑회는 그녀로부터 시작됐으니까.

이곳에 있는 마랑회가 전원 연락이 두절된 이상, 어떤 방식이던 백소율에게 접촉할 건 분명하리라.

그 꼬리를 잡으면 따라서 이어가면 될 뿐이다.

"……저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어요."

자신에게서 비롯된 이상 실수는 바로잡겠다는 말에 늑대는 작게 끄덕이곤 아까 집어 온 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다에서 가져온 건 불길하게 느껴지는 병.

이미 내용물은 거의 비어 있었지만 바다의 몬스터를 불렀던 게 바로 이것이었다.

"이건 대체?"

후계자로서 수련에만 필사적으로 매진해왔던 그녀가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자백제와 흥분제를 적절히 섞어놓은 일종의 마약. 본래 심문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뜻하지 않은 효과로 몬스터를 끌어들이는 힘이 있음이 밝혀진 이후 이미 십수년도 전에 제조가 금지된 물건이었으니까.

진작에 사장된 물건이었으나 그 기록은 남아있었을 터.아마그걸 보고 재현한 것이리라. 그뿐만 아니라 은막대 또한 마찬가지.만상의 주인의 기억을 읽어 알 수 있었던 내용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한 것 같지만…'

그럴 리 없다. 스퀘어라는 조직은 그리 어수룩하지 않으니까. 3절 이상의 마법을 철저히 관리하고 1, 2절에 이르러서도 헌터나 아카데미의 학생이 아니라면 익힐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엄격하다.

어디까지나 스퀘어가 추락하기 이전의 얘기였지만.

아무튼, 사장된 연구 기록을 열람했을 정도라면 제법 요직에 앉아 있는 사람이 분명하다.백소율의 반응을 보건대 출처가 그녀가 아닌 건 확실하다.

제법 수뇌부에 가까운 인물이 마랑회에 섞여 있다. 애초에 구성원 중에서는 마법사들도 제법 있었을 터.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리라.

거기에 아직 외국에는 구세마랑회가 더 남았을 테고.병을 유심히 살피던 백소율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미끼였군요."

늑대는 다시 끄덕였다.

바로 이 병을 수거하러 여기까지 온 거였으니까. 기존의 물건을 개량했는지 미끼로써 작용하는 힘이 더 강해진 모양이었지만.

"제가 괜한 짓을 해서. 설마 이렇게까지……"

늑대는 자책하는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덮어주기만 한다면 죄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속죄. 스스로 뿌린 씨앗을 거둘 기회가 필요하다.또한, 그것은 자신이 아닌 그녀 스스로가 붙잡아야 할 터.

"…전부 끝내고 나면."

조용히 읊조리는 그녀의 말엔 각오가 실려있었다.

흐린 말끝에 이어질 말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전부 끝내고 나면, 자신의 입으로 밝히리라고.

그 대상이 홍유리가 됐든 이은하가 됐든 간에.

'기회라.'

늑대는 그 말을 곱씹어보았다.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있는 이상 구세마랑회는 무너뜨릴 생각이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정면에서 맞서주진 않을 터.

놈들이 자신을 숭배한다는 건 어느 정도는 자신의 힘을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은막대로 자살을 시도했던 것처럼.

꼬리를 쫓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외국에서까지 계속 이어져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어찌 됐건 지금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알빠! 알빠!"

언제 돌아왔는지 아깐 도망쳤던 페리가 자신을 흔들고 있었다. 며칠간 조금은 말하는 법을 배워서인지 어색하게나마 이름을 부르면서.

만면에 미소 지은 그 얼굴에선 조금의 근심도 찾아볼 수 없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 그 자체. 실로 외견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어눌한 말솜씨에 백소율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말을 가르친 건가요?"

"아무래도 저런 모습이니까."

요정용의 모습 그대로였다면 괜찮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과 평생 접촉하지 않을 것도 아닐 터. 다음 탈피가 언제인지는 몰라도 지금을 대비하는 게 옳은 일이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도 곧 괜찮아질 거다."

성대와 언어가 낯설 뿐이지 말은 이해하고 있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늑대는 페리의 손에 이끌렸다. 페리 그리고 베타와 함께 어울리는 알파.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백소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파… 알빠… ……아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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