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8화 〉 #171 뒷일
* * *
그 날로부터 사흘이란 시간이 흘렀다.
마녀의 일이 일단락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잊혀지기에는 짧은 시간이기도 했다.지난 사흘동안 늑대는 제법 바쁜 시간을 보냈다. 직접 움직여 마랑회를 궤멸시켰으니까.
적어도 백소율은 남은 이들이 전부 악행을 저지르진 않았다는 말로 설득해왔지만늑대는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만, 적어도 백소율은 이렇게 알고 있으리라.마랑회는 무너지고 그 구성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으리라고.
'이게 더 낫다.'
늑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그래야만 그녀가 자신의 손으로 누굴 죽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을 테니까.
"이제 다 끝났어?"
"그래."
이미 구속되어 있는 이들을 제외하곤 전원 처리했다. 그 장소에 있는 이들은 더더욱. 적어도 마랑회의 흔적은 이제 다시는 바깥으로 나오지 않으리라.
"잘 했네. 뭐."
콧등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짜디짠 바닷바람이 쿗잔등을 스치고 지나가며 털끝에 닿는 감각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왜? 감상이라도 생겼어?"
늑대는 천천히 끄덕였다. 새삼스레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조금 더 능동적으로 행동해야 했다는 후회가 있다.그랬다면 이번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뒤처리가 아니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뭔 개소리래."
홍유리는 그 생각에 코웃음쳤다.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너무나 가볍게 돌아온 답에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다가 안 됐으면 그게 끝이지. 왜 네가 궁상떨고 지랄이야?"
"……."
"우리가 하겠다고 했고 멋대로 죽 쑨 거잖아. 네가 책임질 일도 아니고."
가만히 그 말을 곱씹어보았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고맙다. 이거 한 마디면 끝날 일이잖아.……그치?"
마지막에 답지도 않게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에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웃긴 했디만 속으로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해버렸다.
……다음엔 실수하지 않겠다고.
"뭐, 존나 괘씸하긴 하네."
"……?"
"그 망할 년. 어딜 하늘같은 선생한테 주먹질을 해. 완전 미친거지. 나 때는 생각도 못할…"
주먹질을 했던 건 마녀가 아니라 그녀 본인일 텐데. 씩씩거리는 그녀를 보곤 늑대는 고개를 저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가만 계산해보았다. 별로 의식한 적은 없었지만 2070년이 조금 넘은 이 세계. 아직 홍유리가 서른 줄이라는 건 2030년대 생이라는……
"뭔 생각했어?"
수상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의 모습에 늑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집요하게 말을 캐물어왔다.
물론 앞으로도 신경쓸 일은 없겠지만…… 그리고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21세기 30년대 사람이라는 점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져서였다.
"아, 그래? 끝까지 말 안한다 이거지?"
"……?"
"그럼 뒈져!"
수상하다는 눈빛과 함께 덮쳐오는 것에 늑대는 그만 웃어버리곤 한참이나 그녀와 뒹굴었다.건방지게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손길에 촉수로 겨드랑이와 무릎 뒤를 간질여 보복하면서.
"야 이씨! 그건 바, 반칙!"
평소처럼 금세 백기를 들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버틴 홍유리는 끝까지 우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결국엔 먼저 지친 그녀가 대자로 뻗어 천장을 볼 때가 되어서야 늑대는 촉수를 거두곤 가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애당초 간지럽히기로 승산이 있을 리 없다. 여태 한번도 진 적이 없을 정도로나.
"…고맙다."
"뭐가."
그러니까, 이건 그녀 나름의 배려이리라. 굳이 티내지 않고 다독여 주려 한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까…… 너 걘 왜 데리고 왔어?"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묻자 늑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은하 말이야. 굳이 데려올 필요 없었잖아."
"……."
"너 설마 딴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눈 사이를 좁히며 의심스러워하는 말에 늑대는 웃어버렸다. 물론 이은하가 싫은 건 아니다. 답답하게 느꼈던 때도 있었지만 계속 노력하는 모습은 매번 그녀를 달리 보게 만드니까.
그러나… 늑대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그녀를 연애대상으로 보긴 힘들었으니까. 그저 바다 위에 있느라고 시간이 없었다고 순순히 말해주자 홍유리는 곧 고개를 주억거렸다.
***
"놀랍군요.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는데."
조금의 표정 변화였지만 정말 놀라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럴 일이니까."
환영의 나비는 짤막하게 답했다. 후계자가 된 이상, 제 앞가림은 홀로 하게 내버려뒀지만 이번 일은 다르다. 자신의 제자가 마랑회의 수뇌인 데다가 마녀로 화해 도시 일부를 붕괴시켰다는 소식에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딨지?"
마랑이 나타났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본인 혹은 여명이 신변을 맡고 있다는 뜻. 강태준이 아니라면 누가 알고 있으랴.
"여명에는 없습니다. 직접 맡겠다고 하더군요."
"……."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그 반대겠죠."
"그렇겠지."
환영의 나비는 천천히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랑이 제자에게 해를 끼칠 리는 없을 테니까. 따라서, 지금의 행동은 오히려 그 반대. 백소율을 구속하고 가두는 게 아니라 외부로부터 그녀를 지키는 행동이었다.
"문제가 없진 않을 텐데."
"감수하겠지요."
마랑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들끓을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불씨였던 마녀를 내놓으라는 목소리는 확실하고 분명하게 있었으니까. 심지어 자신들 여명에 마랑을 내놓으라는 이들 또한 있었다.
"미쳤군."
환영의 나비는 그렇게 일축했고 강태준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왜 다들 그렇게 생각이 없지?"
"모르고 있어서겠죠."
환멸조차 느껴지는 목소리에 쓰게 웃어버렸다. 평화가 찾아와 마랑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우스운 건 마녀와 마랑을 비판하는 목소리에는 정작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은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쓰러뜨릴 수 없었던 마녀. 그런 마녀를 손쉽게 제압한 마랑. 도대체 무슨 수로 징벌하겠다는 뜻일까. 이미 그 비호 아래 있는 한 누구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을 텐데.
"휴…… 경솔한 짓만 안 했으면 좋겠는데."
"동감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필요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마랑회가 바라던 대로 알파의 존재가 다시금 수면 위로 드러난 이상 확실히 각인시켜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결국 본보기가 필요한 시간일지도 모른다고 강태준은 그리 생각했다.
"일단, 알파가 있는 곳은 알려드리겠습니다."
***
상처는 다 나았음에도 백소율은 여전히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해코지를 당할까봐 그런 게 아니라 그저 문제를 만들고싶지 않아서였다.
진작에 후계자로써 자리잡은 그녀였다. 마녀로서의 마력은 사라졌어도 마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즉, 마력의 용광로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뜻. 비록 마녀는 아니라한들 홍유리와도 자웅을 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탓에 다소 부작용이 생기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런 힘으로 트러블에 얽혔다간 그리고 괜히 모습을 드러냈다간 일이 더 꼬일 게 분명했기에 스스로 숨기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한참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답답하진 않나?"
백소율은 천천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확실히 무릎을 베고 잠든 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는 그 모습이 부자유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좋네요. 휴가같아서."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단 게 좋다는 말이기도 했다. 확실히 일취월장한 그녀의 실력을 보건대 제대로 쉬는 시간조차 없었으리라.
"아직 제어는 힘든가?"
"……면목없네."
"손좀 내밀어보겠나?"
얇고 새하얀 손목을 짚은 늑대는 그녀의 안에서 들끓는 마력을 느끼곤 자신에게로 유도했다. 거칠고 난폭하게 흐르는, 마치 홍수라도 난 것만 같은 그 마력을 모조리 받아들이고서야 작업을 마쳤다.
기진맥진한 숨을 뱉는 백소율의 안색이 다소 창백해져있었지만, 필요한 작업이었다.
'사람의 몸으론 안 되는 게 당연할 테지만.'
너무 거대한 마력은 몸을 해친다. 본래 정신체의 영역에서나 얻을 수 있던 거대한 마력의 용광로를 탑재한 이상, 육체가 견디지 못할 만큼 많은 마력이 생기는 게 부작용이었다.
그나마 방출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도시 안에서 방출할 수 있을 만한 마력이 아니니까 결국 이렇게 흡수하는 수밖에 없다.
"……괜찮나?"
"네. 괜찮아요. 오히려……"
조금 홀린 것처럼 답하는 그녀의 시선은 멍하고 눈은 풀려있어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에요."
끄덕거린 늑대는 위아래로 그녀의 모습을 살피다 이내 방 밖으로 나왔다. 이미 강태준에게 들어 알고 있지만 곧 환영의 나비가 찾아올 터. 앞으로도 계속 붙어있을 수만도 없으니 이 방법에 대해 논의해볼 생각이었다.
결국 답이 나오지 않으면 그녀에게 깃든 스킬인 마정 그 자체를 제거해야겠지만…… 조금은 아깝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정말 백소율이 마정을 다루어 정신체의 영역에 다다를 수 있다면 여왕을 되살리는 일에도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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