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4화 〉 #176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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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이은하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이야기를 경청했다.그건 요정어를 아는 자신이 아니라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일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대부분 말하는 건 요정과 후운뿐. 말을 할 줄 아는 환수는 아무래도 생각보다 더 드문 모양이었다. 그리고 둘에게서 들은 상황은 이은하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들은 말로는 갈등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언젠가 알파가 우려했던 대로의 상황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사람의 탐욕은 끝이 없으니까. 그건 사람을 초월한 능력을 가진 헌터 또한 마찬가지. 그 사실에 이은하는 환멸을 느끼고 말았다.
몬스터가 사라진 자리. 헌터의 일거리는 사라졌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그 자리를 대신한 환수들이 아직 남아있었으니까.
합법이 불법으로 변했을 뿐 돈을 벌 방법은 남아있었다.하물며 이제까지보다 더 쉽게. 잘하면 저항조차 하지 않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부산물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토악질이 나올 것 같다. 후운의 어눌한 말과 요정의 부족한 어휘력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최악의 상황. 가쁜 숨이 당장에라도 호흡곤란으로 이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번에도. 분명 그럴, 거다. 분명히!"
서화의 폭주에 대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 것 치고는 후운은 제법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 말에 분명한 미움이 담겨 있었다.
"우리도 이대, 로 계속 있을 순. 없다."
계속 당하고만 있을 순 없다. 후운은 그렇게 말했고 이은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되갚아줄 거다. 반드시…!"
환수와 인간의 대립구도. 말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오로지 일방적으로 당했을 환수들에게 자신이 대체 뭐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말려야 해.'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서화의 폭주를 막는 것조차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신이 그러할진데 칠영웅이나 스퀘어 마스터라면 어떨까. 환수는 많지만 사람은 그보다도 더 많다. 부딪쳐봤자 계란으로 바위치기. 서로에게 상처밖에 남지 않는 싸움이리라.그 끝에 결국 환수는 멸종하고 말 터. 그건 절대로 여왕이 바란 게 아니리라.
마지막 순간에마저 자신을 구했던 그녀는 절대 그런 걸 바라지 않으리라.
'말려야 해. 말려야 하지만……'
그렇다해도 이미 들불처럼 거세진 이들의 분노를 대체 어떻게 잠재워야 할까. 만약 반대의 입장이었다 해도 자신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도와줘서, 고맙다. 인간."
"고마워! 은하!"
넋을 잃은 채 그 인사를 받은 이은하는 결국 산을 내려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그렇게 된 걸세."
백록으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은 늑대는 생각을 거듭했다. 최근, 이런저런 문제가 골치를 썩였는데 거기서 하나가 더해진 셈이다.
'제도는 확립했을 셈이지만.'
당연히 금전적인 지불도 했다. 분명 제도적으로 환수들의 거주지는 확보했을 테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이 일에 대해선 여명이 앞장 서 일을 끝마치게 했지만, 그래. 그러하리라.좀 더 확실하게 억제할 방법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잊고 있었나.'
늑대는 눈을 감은채로 생각을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유지되는 듯하던 환수와 인간의 공존은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말았다.자신이 사라진 지난 10개월 동안 탐욕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고작, 탐욕. 하잘 것 없는 탐욕이었다.
"."
빠드득, 이가 갈렸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참 더러운 기분이었다.
환수를, 영물을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마지막 순간에조차 자신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다. 한심하게도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회생의 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몸을 바친 그녀를 끝내 구하지 못했다. 만상의 주인을 막기 위해 격을 포기하면서까지 스스로를 희생한 그녀에게 전혀 보답하지 못했다.
환계를 포기하면서까지 스스로의 생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도왔지만 그 끝에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악의의 안에서 죽어가는 외롭고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으리라.
그것이 사무친 응어리였다. 결국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했고 구하는 것마저 불가능했으니까.
그래서, 강박과도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반드시 그녀를 부활시키고 말리라는. 여왕을 되살리고 말리라는 일념을 가지게 되었다. 더는 어떠한 고통도 없는 세상에서, 한 마리 몬스터조차 남지 않은 세상에서 여왕이 자신의 아이들과 바라는 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
……틀렸다. 그러기 전에 환수들부터 지켰어야 했다. 환수들이야말로 그녀의 아이들이고 유산이었는데.일이 이렇게 됐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건 어디까지나 변명에 불과하다. 자신이 신경쓰지 못한 탓이다. 지레짐작으로 관심두지 않았던 탓이다.
그 순한 환수와 영물들이 들고 일어날 정도라는 건 대체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렸단 말인가. 도대체 탐욕에 희생된 환수들의 숫자가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
이것저것, 전부 다 엉망진창으로 꼬여서 어디서부터 손대야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천천히, 짙은 감정이 담긴 깊은 숨을 내쉬었다.
***
"……."
이를 가는 소리에 백록은 말을 잊어버렸다. 말을 잊어버린 것뿐만 아니라 등골이 서늘해져 오슬오슬 몸이 떨려올 정도였다.
'알리지 말았어야 했나.'
조금은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더는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는 커져가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막을 수 있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렇듯, 지난 10개월간 일은 조금씩 꼬여가기 시작했다.
늑대가 사라진 동안 어쩔 도리도 없이 엉망진창이 되기 시작했다.
마랑의 경고는 마랑이 사라진 동안에는 유효하지 않았다는 뜻.
"……알고 있는 사람은 있나?"
조용한 물음이 되돌아오자 백록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하리라. 왜냐하면 죽은 건 환수들만이 아니었으니까. 저항하는 과정에서 인간 또한 죽고 말았으니까.
이은하나 홍유리를 비롯해 환계와 인연이 있는 이들은 있었지만, 결국엔 인간. 그들이 어디까지 자신들을 도와줄지는 미지수였으니까. 무엇보다도 늑대가 사라진 시간동안은 더더욱.
"그래."
결국, 참을대로 참아왔고 계속 눌러왔던 도화선이 마침내 터지고야 말았다……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는다.환수들이 아무리 날뛰어봤자 인류는 어렵지않게 제압할 수 있을 터. 다소의 타격은 있겠지만 인류의 본대가 나서게 되면 그 결과는 불보듯 뻔한 것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그렇게 두지는 않을 거라는 점.
슬슬,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너무 물렀노라고. 그리고 안일했노라고.
'더 확실하게 알렸어야 했다.'
그 사실에 이가 갈렸다. 되돌아보면 자신 또한 그러했으니까. 인류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겠지만 오해받고 쫓기고 죽을 뻔한 위기는 셀 수도 없이 넘겨왔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있었던 건, 납득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이 본래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입장이 반대였다면 당연 도시 어딘가를 떠돌아다니는 위협요소인 몬스터를 배제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듯,자신에게 향하는 것이라면 괜찮았다. 그들에게 있어 어디까지나 몬스터에 지나지 않았던 자신을 핍박했던 건 납득할 수 있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마랑회가 날뛰어 자신의 이름을 사칭했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잘못된 길을 걸어간 인류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하물며, 그 끝에 마녀가 된 백소율 또한 어느 의미로는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으리라.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게 있다.건드려서는 안 되는 게 있다.
감춘다고 감춘 모양이지만, 늑대의 눈에는 또렷히 보이고 있었다. 커다란 벽이나 마력조차도 꿰뚫어보는 그 눈에 아직 다 낫지 않은 상처의 흉터들이 보이지 않을 리 없다.발톱이나 이빨이 아닌 무기로 인한 상처의 흔적이.
'그래. 그랬을 테지.'
백록이라면 분명 그러했으리라. 다른 영물과 환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쉴새없이 뛰어다녔으리라. 그리고 그 결과, 교전이 일어난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리라.
부글부글,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게 있다. 납득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양보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만약 조금만 더 일이 잘못됐더라면 백록마저 볼 수 없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고작 탐욕이라는 것에 새어나오는 실소를 참지 못했다.
본신이었다면 혹은 이전이었다면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르나 늑대는 그럼에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확실하게 하겠다."
백록의 앞에서 늑대는 어절 하나하나를 씹어뱉듯이 토해냈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그리고는 다짐했다.
변절자가 아닌 이들, 인류에게 처음으로 이빨을 드러내겠노라고. 확실하게 본보기를 보여주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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