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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401화 (401/407)

〈 401화 〉 #200 빛바래지 않을 (5)

* * *

결론은 진작부터 나 있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졌다곤 해도 처음부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만약 이게 이야기라면 종말을 없앤 시점에 이미 완결지어진 이야기이리라.여왕의 말을 듣고서 이제야 전부 끝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이야기 바깥의 이야기 또한 마무리지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왔어?"

"오셨어요?"

살갑게 반겨주는 목소리에 끄덕거린 늑대는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말을 꺼냈다. 요정들까지 데려다줬으니 여기서 더 있을 필요는 없을 테니까.

엉덩이를 털며 맨바닥에서 일어난 홍유리는 가기 싫다고 떼쓰는 페리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 번쩍 들어올렸다.

"그럼 여기서 살려고? 확 두고 가버린다? 어쭈? 볼에 바람 안 빼지? 이게 어딜 반항을."

까르르 웃으며 홍유리에게 그대로 안긴 페리는 고사리같은 손으로 콩콩 두드렸다. 그렇게 장난치면서도 자신에게 업히는 모습이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바로 그 옆에 앉아있던 백소율 또한 다소곳이 일어나자 촉수를 뻗어 당긴 늑대는 셋을 등 위에 태우고 걷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여기까지 오느라 좀 많이 걸어서."

"얘 마력 벌써 다 차려고 하는데? 이대로 가도 괜찮아?"

"10분도 안 걸릴 테니 걱정마라."

"죄송해요. 하필이면 이런 몸이라."

씁쓸해하는 백소율은 자신을 탓했다. 의도치 않아도 마력을 받아들이고 마는 몸인 탓에 마녀와 관련한 소동을 벌여 면목이 없다면서.

"뭐 그딴 시덥잖은 걸로 끙끙 앓고 있어?"

"제가 이런 몸만 아니었다면 좀 더 있어도 됐을 텐데."

늑대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랬으면 만날 일도 없었을 거다."

"……."

"자책할 필요는 없지 않나. 그건 네 탓이 아니니까."

이렇게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던가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녀가 그런 체질인 이유를 늑대는 사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단순한 우연일뿐. 다른 누가 그랬더라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

위로할 생각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

그녀가 마정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마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만한 마력을 가지고도 몸이 버틸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존재한다.

'환계의 파편.'

과거, 만상의 주인은 숫한 노력 끝에도 차원을 넘지 못했었다. 좌절하던 그녀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흑린의 변덕과 여왕의 실패로 인해서. 우연이 겹친 결과로 정수의 존재를 깨달은 그녀는 드디어 세계를 넘나드는 방법을 깨달았다.

그렇듯, 우연은 곳곳에 존재한다.

같은 일로 인해 또 다른 우연이 탄생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으리라.

백소율이 마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단순한 우연에 불과하다. 여왕의 실패로 인한, 그녀의 시행 착오로 인해 아주 머나먼 이전에 환계의 일부가 됐을 정수가 스며들어서일뿐이었다.

극히 일부라고는 하나 초월자의 격이 거대한 마력과 함께 스며든 것이다. 그게 원인이었고, 결과가 지금의 그녀였다.

완전한 마력 체질. 여왕의 자식인 환수와 닮아있으면서도 그들보다 마력에 민감하다. 특히, 환계의 마력을 물을 빨아들이는 솜처럼 받아들이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 터. 환수와 환계 정도가 아니라 스며든 것이 환계 그 자체였으니.

"……존나 터무니없네?"

스케일이 다른 얘기에 눈을 끔뻑이던 홍유리의 말. 늑대는 정말 그렇다며 공감하는 한편 자신이 아는 사실들을 조금 더 털어놓았다.

"악몽을 꾸게 된 건 그래서겠지. 환계가 다시 만들어지면서 널 자극했을 테니까."

그 탓에 본래 알 수 있을 리 없는 평행 세계의 일을 꿈결로나마 느끼게 돼 버렸다.

"처음 듣는 얘기인데… 묘하게 납득이 가네요."

그러하리라. 이 또한 만상의 주인을 쓰러뜨린 뒤에야 알 수 있었던 사실이니까. 알려준 적이 없었으니 답을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까 분명 다룰 수 있게 될 거다. 마정이 아니라 더 큰 힘이라도. 그러면 스퀘어 마스터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꿈은 아니겠지."

"……그건 아무래도 좋아졌어요."

"뀨웃!"

"처음부터 뭐라도 하려고 발버둥 쳤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도 없잖아요?"

그렇지 않느냐고 되묻는 말에 늑대는 끄덕였다.

"그래도 소화해볼게요. 원치 않았어도 기왕 찾아온 기회니까요.……그냥 순순히 포기하면 선생님이 좋다고 쫓아낼 것 같기도 하고."

"뭐? 이게 진짜!"

뒤를 돌아보며 눈을 부라리는 홍유리. 하지만 그 뒤에 앉아있던 백소율이 허리에 팔을 두르자 깜짝 놀라 크게 눈을 뜨고 말았다.

"뭐, 뭔 짓이야?"

"흔들리네요. 떨어질 것 같아서요."

"개뿔이!"

"슬슬 인정하신 줄 알았는데. 포기가 참 느리시네요."

"지, 지랄하지 마! 너! 손 떼라고! 손!"

달리다 말고 뒤를 돌아본 늑대는 기겁한 홍유리가 허리춤에서 조금씩 올라가는 손에 발악하는 모습을 보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저, 그런 취미는 없지만 선생님이라면 의외로 괜찮을 것도 같아요. 한 번 시험해볼까요?"

"이 미친!"

"페리도 보고 있는데 나쁜 말 하시면 안 되죠?"

비명 지르고 발악하며 학을 떼는 홍유리를 놓아준 백소율이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기운 차린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언제쯤 티격태격 거리는 게 사라질까?

아니, 어쩌면 다툴 만큼 관계가 회복된 거라고 봐야 할까. 가슴께를 양 손으로 가리고 질색하고 있는 모습에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추억이라.'

빛바래지 않을 추억. 이것도 거기에 포함되는 걸까를 생각하면서.

"돌아가면 조용해지겠네요. 이제 요정들도 없고."

"조용하긴 개뿔! 집에 가면 넌 뒈졌어!"

그러다가, 아직 마지막으로 남은 시덥잖은 약속을 떠올렸다.

***

두두두두­

일어나자마자 이불을 수도 없이 걷어찼다.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져서 걸레조각이 됐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개, 개꿈……"

아니, 사실은 늑대 꿈. 떠올리기만 해도 민망한 꿈.

손으로 얼굴을 덮자 확 달아오른 열기에 덩달아 달아올라 뜨거워지고 말았다. 마지막에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잤더라.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이런 꿈을 꾼 걸까?

호, 혹시 굶주렸나? 성욕에?

"미쳤지. 진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침이 넘어간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관심 가질 시간이 없었지만 성에 무지한 건 아니다. 당연히 그런 욕구는 자신에게도 있다. 있는데…… 그래도 그렇지. 무슨 이런 망측한. 사춘기도 아니고 이제 와서 무슨 이런 꿈을. 무슨 이런……

그 생생한 꿈을 다시 떠올리자 또 목울대가 넘어갔다. 정말 미쳤구나 싶어 머리를 헝클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부러웠다.

부럽다. 꿈 속의 자신이. 정말 미치도록 부러웠다.

또, 그걸 부럽다고 생각해버리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깨어나자마자 찾아온 현자타임에 질끈 눈을 감고 있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핸드폰에 출력되는 시간은 아직 세 시. 뭘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일단 클랜에 연락부터 해야지. 그리고 또… 핸드폰 자판을 두드리며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던 이은하는 결국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꿈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진짜 현실에서 알파와 함께인 홍 팀장님이나 소율이는 어떨까.

"으으."

모르긴 몰라도 서로 달콤한 말도 속삭이고 하고 싶은 것도 맘껏 할 수 있으리라. 나도 그렇게 있고 싶은데. 셋이라도 좋고 넷이라도 좋다. 꼭 독점같은 걸 하지 않아도 상관없이……

'아. 이래서 안 되는 거려나?'

마음이 약해서.침대에 엎드린 그대로 물장구치듯 발을 번갈아찼다. 홍 팀장님도 소율이도 됐는데 왜 자신만 안 됐는가하는 이유는 반대로 그런 독점욕이 없어서가 아닐까. 남과 싸우고 다투더라도 꼭 가지겠다는 그런 치열한 맘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어필이 좀 부족했을까. 아니, 어필은커녕 혼자서 질질 짜기만 했는데 어필은 무슨 얼어죽을. 그래. 각오를 다지자. 언제까지 이렇게 애매하게 있을 순 없다. 또 깨지더라도 혼자서 끙끙 앓을 게 아니라 끝까지 부딪쳐보자.

선자님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고 했으니까. 이런 꿈까지 꿀 정도면 이미 볼 장 다 본 거나 마찬가지. 새삼 움츠러들 필요는 없으리라. 심기일전한 이은하는 불끈 주먹을 쥐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 구태여 소리내어 말했다.

"그래. 다음엔 꼭 고백해야지."

또 깨지더라도 실망하지 않기로 했다.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나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지 않았는가.

언젠가는 꼭 반드시. 꼭!

"……."

그런데 아까부터 느껴지는 묘한 시선. 왠지 따스하게 지켜보는 듯한 눈길에 설마설마하고 고개 돌린 이은하는 이게 꿈이기만을 바랐다.

저 작고 귀여운 검은 강아지가 제발 자신이 자는 사이에 동생이 분양받아온 애완동물이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잘 잤나?"

"……."

"잠버릇이 요란하더군."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입만 뻐끔거리며 대체 왜 여기 있느냐고 눈으로 묻자 늑대는 방 바깥을 가리켰고 구면이었던 자신의 동생이문을 열어줬다고 말한 순간, 부정할 여지 없이 현실임을 깨달은 이은하는 태어난 이후 가장 크게 소리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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