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2화 〉 #200 빛바래지 않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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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함께 있는데도 오가는 말이 없다. 마치 혼자있는 것 같은 기분에, 은근한 불편함에 늑대는 속으로 한숨 쉬고 말았다.
하필이면 동행하고 있는 이은하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으니까. 둘이서 함께 환계로 가보자는 약속을 지키러 온 셈이었지만, 부득이한 일이 있었으니까.아직도 홍당무가 돼있는 이은하를 바라본 늑대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을 차리긴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혼미해져간다. 어쩌면 여기까지 데려온 게 기적일지도 모른다. 잠꼬대를 할 때부터 자리를 비켜줘야 했다.
누가 뭐래도 배려가 부족했다…… 그래도그렇게까지 무안해 할 건 없지 않은가. 사실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직접 자신의 입으로 말한 적도 있었고. 계속해 자신과 어울리는 걸 보면 여태 맘이 바뀌지 않은 것도 그려러니 싶을 정도였다. 이해가 안 되는 건 그쪽이 아니라 오히려.
'둘이나 있는데도.'
홍유리와 백소율이 있는데도 마음을 접지 않았다는 점. 그게 조금 의외였다. 멋대로 재단할 생각은 없지만 백소율에게는 집착의 이유가 있더라도 그녀에겐 없을 터.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냥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반대로 생각해 자신이라면 그럴 수 있을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늑대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 독점욕이 강하다는 걸. 다만, 그게 적용되는 범위가 국한돼 있어 잘 드러나지 않을 뿐.
내로남불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홍유리나 백소율과의 관계를 타인과 함께 공유한다고 하면 참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 스스로가 그걸 바라고 있다.
대체 그건 어떤 심정인 걸까.
솔직한 심정으로는 뭘 어쩔 거냐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그건 자신이 결정할 게 아니다. 계속하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그녀 자신이 생각해서 정할 일이었으니까.
"……."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마음은 기꺼웠다. 다른 걸 제쳐놓고 본다면 자신 또한 그녀가 싫진 않았다. 정말 싫었다면 약속을 지키긴커녕 그 이전에 약속하지도 않았을 터. 주변이 어찌 되든 간에 한결같은 마음 씀씀이가 싫을 리 없다.
허나 기꺼움 이상으로 안타깝다. 그 안타까움에 오지랖같은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나보다 더 나은 상대는 있을 텐데."
"사람도 아닌 나보다 더 어울리는 상대. 너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거다."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아주 오랜 옛날, 나무에 기대어 정신을 잃었던 그녀의 모습에 눈길을 빼앗겼던 적도 있었다. 화풍의 그림같은 그 장면은 지금도 뇌리에 새겨져 있다.
외모뿐만 아니라 A급 헌터 중에서도 실력자인 그녀는 어딜 가더라도 환영받을 존재. 그럴 상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이은하는 깊은 한숨을 뱉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내쉰 한숨에 늑대는 슬쩍 그녀를 돌아보았다.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 적잖은 실망처럼 보였다.
"이번엔 좀 기대했는데."
씁쓸하게 미소짓는 모습이 아련해보여 늑대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일을 구태여 말해버린 건 실수라고 생각해서.
그래도 확실히 끊어주는 게 낫다.
백소율의 경우를 떠올려보자면 그게 정답이었다. 이은하와 백소율의 경우에 있어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 호감은 있어도 그건 연애나 사랑에 관한 감정이 아니다.굳이 표현하자면 스승이 제자를 보는 그런 감정에 가까우리라.
그래. 차라리 대견함이었다.
노력하고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늘 대견하다고 느껴왔다. 그렇기에 받아줄 수 없다. 백소율의 경우와는 전혀 달랐으니까.
"이래도 아직 두 번…… 있잖아."
계속 감추고 있던 얼굴이 교차한 팔 위에 올려졌다.
"어제 그랬잖아. 계속 지켜보겠다고. 그래서 이번엔 기대했는데."
"그런 뜻은 아니었다."
"그럼."
"말했잖나. 말 그대로의 뜻이다. 만상의 주인. 네가 그렇게 될 수 없더라도 난 널 계속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불안. 늑대는 그것을 그렇게 규정했다. 바다와 같이 깊고 넓은 지식을 쌓아온 그녀라면 혹시 자신도 모르는 방법으로 무언가 안배해놓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설령 기억을 가지고 있다한들, 이번 연금술사의 일도 생각지 못한 우연이었다.
백소율의 마녀화 또한 그랬다. 그럼 그 이상의 변수가 없으리란 법은 어디에도 없다.
"친구를 지켜본다는 게 별로 이상한 건 아니잖나."
"친구……인 거야?"
말로 꺼냈을 때, 관계는 형상화되고 말았다. 이은하는 커다란 벽이 자신을 가로막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너무 두텁고 견고해서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 않은 벽. 철옹성이 이러할까. 너무 단단해보여 보고 있기만해도 숨이 턱턱 막혀왔다.
'이게 이런 뜻이었구나.'
계속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율이가 됐으니 자신도 되지 않겠냐는 안일함이 은연중에 섞여 있었을지도. 이제야 현실을 자각하자니마음이 아려와서 부서질 것만 같았다.
***
"두 사람만 보내도 괜찮았을까요?"
"왜. 걱정 돼?"
"아뇨. 상관없어요."
백소율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두 번째로 들어왔으니 세 번째가 있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진 않으리라. 하물며 그 세 번째라면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게 은하 언니라는 것도 사실. 게다가 자기 마음을 깨닫고도 가만 있었던 그녀를 부추겼던 건 자신이 아닌가.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너 진짜 그쪽 취미 없는 거 맞아?"
의심스러워하는 눈초리에 백소율은 픽하고 웃었다.
"왜요? 시험해볼까요?"
"건드리기만 해 봐. 아주 손모가지 꺾어버릴 테니까."
"농담이에요. 그냥, 얽힌 사람들끼리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요."
"얽혀?"
"접점이요. 가족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요?"
"난 질색이거든?"
하기야, 자신보다도 관계를 좁고 깊게 가지는 홍유리의 성격에야 그러하리라.
"요정들도 떠나고 조금 심심하잖아요. 그렇다고 애를 낳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애?"
"애기요. 애기."
백소율은 배를 어루만졌다. 생물은 행위를 통해 번식하지만 그 한계는 정해져 있다. 사람인 자신과 생물로 분류하기도 어려운 알파의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날 리 없다.
"생각해본 적 있으실 거 아녜요?"
"그야 뭐."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리라. 행복한 가정을 떠올리는 건 누구나 한 번쯤 할 법한 생각이었으니까.……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요원했다.
"선생님은 용이시고 전 마정을 갖고 있어요. 알파가 아니라도 쉽지 않을 거예요."
용종이 된 홍유리는 차치하더라도 자신 또한 몸 속에 과한 마력이 쌓이고 마는 체질인 이상 생명을 잉태하긴 어렵다.
"적적해질 바에야 말상대라도 많았으면 하네요. 은하 언니라면 더할 나위 없고요."
"고작 그거 때문에?"
아무리 그래도 이유가 너무 사소하지 않냐는 물음에 배를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이 조금 더 내려갔다.
"……밤에도 조금 힘들고요."
"너, 너?!"
"농담이에요."
살갑게 웃는 모습은 아무것도 아니라하지만 홍유리는 어쩐지 모를 찝찝함을 버릴 수 없었다.
"쯧. 그럼 뭐 해? 백날 생각해봤자 어차피 받아주지도 않을 걸."
"그러네요."
"그래도 괘씸하긴 하네. 이렇게 내버려두고 둘만 갔다는 게."
"그러게요."
***
높은 산의 정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경치는 낮이건 밤이건 보는 맛이 있었지만 환계에서는 더욱 그랬다. 만금을 주고도 보지 못 할 값진 풍경. 평생 기억에 남을만큼 아름다운 경치였다.
푸르스름한 환계 특유의 환경이 스며드는 듯 아름다운 데다가 여기에 몰려 날고 달리는 환수들의 모습을 보면 더더욱 그렇게 느꼈으리라.
……30분 가까이 죽치고 있지 않았더라면.
홍시처럼 익은 얼굴은 다시 식었더라도 여전히 기운차리지 못하는 게 참 안타까웠다. 정작 그녀가 바라던 환계에 왔더라도 이래서야 의미가 없지 않은가.
속으로만 한숨 쉰 늑대는 갑자기 번쩍 고개를 쳐드는 이은하를 보고 눈을 끔뻑거렸다.
"결정했어."
"……?"
"나, 포기 안 할 거야. 계속 부딪쳐볼래."
"……."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잖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찍다보면 언젠가는."
불끈 두 주먹을 쥔 이은하는 묻은 흙을 털어내곤 두 발로 섰다. 기운차린 모습에 대견하게 느끼면서도 또 안쓰러웠다.
"적어도……"
"적어도 앞으로 어떻게 될 진 모르는 거잖아."
자기 말이 맞다는 듯 혼자 끄덕이고 납득하는 모습에 늑대는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뱉었다.
"그러니까, 포기 안 할래. 백번이고 천번이고 찍어볼래."
"지금 그게."
"그래서 꼬부랑 할머니로 혼자 죽게 되면 죽을 만큼 원망할 거야."
째려보기 시작했다. 영락없이 떼 쓰는 어린아이 같은 말. 논리도 뭣도 없는 그 말에 또 실소가 터져나왔다. 변덕이 죽 끓는 듯하다는 표현으론 나타낼 수 없다. 제멋대로 풀 죽었다가 기운차리고 선전포고하는 듯한 고백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마음대로 해라."
"응!"
……그래도 그 활기찬 모습이 아까보단 좀 더 나은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