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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403화 (403/407)

〈 403화 〉 #200 빛바래지 않을 (7)

* * *

"기분 좋다아……"

산 정상에 누워 바다를 올려다 본다는 것. 억만금을 줘도 불가능할 일을 맘만 먹으면 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이리라.

그런 사치스런 일을 겪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눈이 옆으로 가고 만다. 자신이 베고 있는 까만 털뭉치의 주인에게. 자신과는 달리 엎드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더없이 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해 보고 있기만 해도 맘이 놓인다.

맘이 놓일 뿐이랴. 기분좋은 떨림마저 느껴진다. 풀 내음이 잔뜩 나는 산의 정상, 풀숲에서 이렇게 누워있는 게 대체 얼마만일까?

"이런 건 환계에서밖에 못하니까."

"이제 몬스터도 없지 않나."

"그래도 벌레나 진드기같은 게 있잖아."

"싫어하나?"

"응. 그래도 나 정도면 양반일 걸?"

홍 팀장님같은 경우에는 아주 질색을 한단 말에 늑대는 공감했다. 그런 부분에서 묘할 정도로 예민한 경향이 있었으니까. 그러고보니 숲의 던전에서 대마법을 썼지 않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절로 고개가 저어진다. 숲 한면을 통째로 태워버렸으니까. 만약 숲의 중심부에 적중했다면 그날 산채로 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게. 팀장님답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 성격도 행동도. 벌레가 나온다고 마법부터 쓰진 않으니까."

뒷담 아닌 뒷담에 맞장구치며 키득거린 이은하는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더부룩해지는 어느 때를 떠올리고야 말았다.

"벌레라고 하니까 떠오른 거지만."

늑대가 담담히 풀어주는 얘기에 이은하는 몸서리치고 말았다. 어찌나 생생한지 눈을 감으면 떠오를 것만 같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도 아닌데 끔찍할 정도로 상상되는 바람에 현장에 직접 들른 듯한 착각이 든다. 워낙 생생한 기억으로 인해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어서이리라.

그 탓에 덩달아 떠오르는 모습들이 있었다.

그게 언제였더라? 분명 좀 예전이었는데. 벌레라는 키워드에 트라우마처럼 기억 속에 묻어둔……

우글우글. 바글바글.

그 드글거리는 모습을 상상만해도 속이 울렁거린다. 낯을 찌푸린 이은하는 언젠가 환계에서 겪었던 어느 던전의 모습을 확연히 떠올리고 말았다.

거기도 하필이면 벌레가 가득했었다. 더 정확하게는 몬스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잔뜩 커다래진 벌레들이었지. 수련이랍시고 가리지 않고 던전을 전전했던 걸 가장 후회한 날이기도 했다.

"……다, 다른 얘기 할까?"

한쪽 눈만 슬며시 뜬 늑대는 아주 질색하는 그녀의 표정에 이내 못봤다는 듯 눈을 감았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다양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그래도 심심하진 않구나 생각하면서.

"슬슬 밤이 돼 가는데."

언제 돌아가겠냐는 말을 완곡히 돌린 표현에 이은하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하늘 대신 바다가 떠 있었기에 노을이 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달밤이 내려오는 모습은 또 다른 각별한 매력이 있다.

"예쁘다…… 그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기울어진 초승달이 완전히 떠오를 때까지 넋놓고 보고 있던 이은하는 조용히 말했다.

"달밤 예쁘다. 분위기도 좋고."

벌레가 우는 소리 대신 요정들의 노랫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온다. 그 독창적인 음정과 선율은 사람으로써는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특히 아름다웠다.

절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되고 만다. 박자에 맞춰 노래하는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소리를 음미하는 모습이 더없이 아름다워 보여 그 모습을 감상해버리고 말았다.

"있잖아. 지금 분위기도 좋고 달도 예쁜데."

"지금 고백해도 안 받아줄 거야?"

갸웃거리며 묻는 모습엔 아까의 좌절은 어딜 갔는지 평소의 천진한 모습이 돌아와있었다. 그 사이에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럼 이번이 세 번째 고백이 되는 건가 하는. 정말 제 풀에 지치거나 누구 하나 꺾일 때까지 계속 하려는 생각일까.

"……아직은."

그 탓에 조금 이상한 답을 주고 말았다. 눈동자를 휘둥그레 뜬 씰룩거리던 입꼬리가 귀 아래까지 치솟아 올라가더니 만면에 환한 미소를 보였다.

"응!"

***

이은하를 배웅하려 그녀의 집까지 향하는 길목에 늑대는 그럼 이번이 세번째 거절이 되는 건가 생각해보았다.

그래. 세 번째. 세 번째였다.

돌아 생각해보면 참 질긴 인연. 어찌저찌 성사된 인연이 결국 여기까지 왔는데도 아직 이어지고 있다. 그 길이만 따지자면 다른 누구보다도 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말았다.

분명 앞으로도 그녀와의 인연은 이어지리라.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그리고 하필이면 여지를 주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더더욱 들어오겠지.

싫은 게 아니다. 정말 싫었다면 단호히 끊어냈으리라. 하지만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다. 백소율의 경우와는 달랐기에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보다 세 번째가 쉽다 하더라도 그렇게 간단히 받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닐까. 서로를 위해서라도 제대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늑대는 머릿속으로 그녀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보았다. 그랬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예지에 가까운 미래를 보는 힘이 있었기에 반대로 상상력이 빈곤해진 걸지도 모른다.

그럼 자신과는 반대로 그녀는 무얼 바라고 있을까. 이은하가 떠올리는 미래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

떠오를 리 없다. 스스로 납득한 늑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건 확실함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끊어냈다고 했을 셈이었지만, 이은하는 이 정도론 포기하지 않는다. 하물며 기분 좋아보이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면 더 확실하게 끊어야하지 않을까.

그럴 여지조차 남기지 않게끔. 확실하게 등을 떠일어줘서 자신을 떠나게 하는 게 오히려 배려가 아닐까. 당장은 힘들지 몰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과 함께 걸으며 웃을 수 있길 바라는 게 옳지 않을까.

그게 친구로써 할 수 있는 올바른 선택이 아닐까.

결국 조금 더 이어진 상념에 얼마 남지 않은 거리. 그녀의 집이 맨눈으로 보이는 거리에서 늑대는 걸음을 멈추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

"……?"

대답은 하지 않아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단 사실에 늑대는 다시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나는 널 사랑하진 않는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네 마음을 받아주긴 어렵다."

서로가 알고 있는 새삼스러운 말이었다.

앞으로 한 마디. 하나의 말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 길은 갈라지리라. 새로운 행복을 찾아 나서게끔 할 수 있으리라. 스스로 자신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녀에게 부탁하기만 하면 될 일이다.

자신에게는 이미 두 명이나 있다.

게다가 널 사랑하지도 않는다고.

그러니까, 이젠 그만하자고.

자신을 좋아하지 말라고.

그렇게 부탁하기만 해도. 강압하기만 해도 스스로 포기해주리라. 이제까지와는 달리, 부탁하기만 해도 떨어져나가리라.단순히 거절하는 것과 그 마음마저 접어달라 말하는 건 전혀 달랐으니까.

그 다음 말을 예상하기라도 했는지 멍한 얼굴에 핏기가 가시기 시작한다. 덜덜 떠는 손이 올라가 귀를 막으려하고 듣지 않으려한다.

떼 쓰는 어린아이같은 모습에 늑대는 촉수를 뻗어 그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분명히 상처받고 말 터. 계속 아파하고 잊지 못할 흉터로 남으리라. 시간은 아픔을 낫게 해준다지만 그 때까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으, 응. 알고 있어. 알고 있어! 그래서 나, 계속!"

얼버무리려는 말에 늑대는 눈을 마주했다. 얼버무려서 도망치고 듣지 못했다고, 없던 일로 하자고 만들 순 없다.

어느 쪽이든 확실하게 해야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얼른 내리려고 도망치려는 이은하를 단단히 붙잡고 늑대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도리도리 흔드는 고개. 그 탓에 차오른 눈물이 흩뿌려졌다. 하필이면 왜 지금 이렇게 갑자기 말하냐는 듯이 아연실색하던 이은하는 결국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곤 몸부림조차 멈추고 말았다.

힘이 빠져 축 늘어지고 만다. 아까 그렇게 힘차게 흔들었던 머리는 푹 숙여져 머리카락에 가려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어렴풋이 보이는, 입술을 앙다문 그녀가 보기 드문 모습을 보였을 때 늑대는 긴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래도 네가 변하지 않을 거라면 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그런 감정이 지금은 없더라도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없었다.

이은하를 끝내 거절하고 밀어냈을 때, 그녀를 상처입히고도 계속 지켜볼 수 있다는 자신이. 그렇기에,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감정의 영역이 커졌기에 내려버린 아둔하고 어리석은 생각. 결국 정답인 가시밭길을 걷기 싫어 멋대로 도망치고 만 정답과는 거리가 먼 편한 길. 멍청하기 짝이 없는 결론에 기저에 깔린 것이 없기에 언젠가는 파국으로 치닫을지도 모른다.

"……꼭 그런 감정이 있어야만 관계가 이어지는 건 아니라고 누가 그러더군."

허나, 그렇다 해도 누군가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아픔을 남기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숙였던 고개는 들어지고 차올랐던 눈물은 끔뻑이는 눈동자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우물쭈물거리는 입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단 것처럼 망설이고 있었다.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아주면서 늑대는 말했다.

"울지 마라."

"……!"

그렇게 말해도 오히려 엉엉 붙잡고 우는 모습에 다시 한숨 쉬고 말았다.

"울지 말라니까."

이은하를 달래주면서도 집에 돌아가면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나. 그런 생각에 달을 올려다보고 말았다.

'이것도 그런 추억일까.'

잊히지 않을, 빛바래지 않을 추억일까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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