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10. 전조
* * *
현관문 앞에 사뿐하게 착지한 나는 혜원을 공중에서 내려준 뒤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익숙한 전자음이 울리며 잠금이 풀리고, 빨리 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나는 서둘러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런 나를 반겨 주는 엉망이 된 집안.
사방에 널린 속옷과, 휴지, 일회용품들. 그리고 방 안에서 나는 진한 홀아비 냄새.
아니, 애초에 신체구조상 일단 여자가 사는 집인데 홀아비 냄새는 왜 나는데?
몸이라도 이런 여자가 됐으면 향기로운 냄새가 패시브로 장착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따위의 생각을 하며 코를 막고 집구석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어질러진 쓰레기들도 치우고, 가장 먼저 환기가 필요할 것 같았다.
“와우. 엄청 난장판이네요... 무슨 30대 백수가 살 것만 같은 집...”
“...너 언제 여기까지 들어왔어?”
나는 어느새 집 안에 들어와 난장판 감상하던 혜원을 밀어내며 말했다.
“잠깐만 나가 있어! 금방 정리하고 다시 부를 테니까!”
“후후, 잠시만 기다려 봐요.”
혜원은 그런 내 말을 무시하고 실실 웃더니 허리를 굽혀 무언가를 주웠다. 뭘 찾았나 싶어 봤더니 속옷이었다. 다만 거기에 검은 프릴과 리본을 곁들인.
“귀여운 속옷이네요.”
“뭐, 뭐?”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검은색 가터벨트였다. 호기심에 사서 딱 한 번 입어보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둔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
“평소에 이런 속옷 입으시는구나~”
“으아악 아니야!”
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녀에게서 속옷을 빼앗으려 들었지만, 용족의 몸으로 기본적으로 일반 성인 남성보다도 훨씬 힘이 센 서큐버스 종족을 당해낼 순 없었다.
결국 힘으로 혜원을 제지하는 것을 포기한 나는, 한 손에 가터벨트를 든 채 나를 쓰다듬으려 드는 그녀를 노려보며 마법을 캐스팅했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칼날이 목에 닿고 나서야 그녀는 웃음을 멈추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거 이리 내.”
일부러 목소리를 깔고 말하자, 그녀는 내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다고 받아들였는지 순순히 들고 있던 속옷을 내게로 넘겼다.
“여, 여기요.”
나는 돌려받은 팬티를 냅다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그 뒤에는 창문을 열었다. 환기를 위해서기도 했지만, 찬 공기로 홧홧한 얼굴을 좀 식히고 싶었다.
창 밖의 차가운 겨울 공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워갈 무렵, 나는 시무룩해져 바닥에 쭈그린 채로 앉아 있는 혜원을 불렀다.
“이름이.. 혜원이라고 했나? 어차피 못 볼 꼴은 다 보여 버렸으니까 와서 방 안 치우는 거나 좀 도와줘.”
얼음 칼날을 치우며 쓰레기들을 가리키며 제안하자, 그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청소를 돕기 시작했다.
바람 속성 마법으로 짧은 시간 내에 환기를 마치고, 혜원의 소환수들까지 불러 한바탕 청소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시간대는 한밤중.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집이 좀 좁지? 나름 투룸 치고는 넓은 편이긴 한데... 지내는 데에 조금 불편할 수도 있어.
“뭐, 제 집도 원래는 원룸이었으니 괜찮아요. 무엇보다 이렇게 귀여운 분과 함께 지낼 수 있어서 좋은걸요.”
그렇게 이야기하며 혜원은 등 뒤에서 날 껴안았다. 거대한 서큐버스 특유의 부드러운 부위가 등 뒤로 느껴지고, 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녀의 몸을 밀어내었다.
꼬르륵.
갑자기 들려온 꼬르륵 소리. 내 배에서 들린 소리는 아니었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혜원의 배 쪽으로 향했고,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 허허로운 웃음을 보이며 배를 쓸어내리다 움찔거렸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아, 아직 아까 맞았던 배가 다 낫지 않아서...”
“그래? 이리 와 봐.”
나는 혜원을 자리에 앉혀둔 뒤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으읏...”
“...그 정도로 아파?”
배에 살짝 손을 올린 것만으로도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에, 나는 그녀의 동의를 구하고 상의를 살짝 걷어올렸다.
“...이런.”
새하얗고 매끄러웠을 배에는 푸르딩딩한 멍들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나는 그녀의 고통이 실감이 가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녀의 배에 전투로 인한 상처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가까이서 볼 기회가 없었을뿐더러 우리 집에 도착해서 청소를 도와준 이후론 쭉 배 위에 이불을 덮고 있어서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다.
“...예진이가 이랬어?”
“...네.”
“좀 심하네. 그 애라면 다른 방법으로 제압할 수도 있었을텐데.”
예림이가 내게 했던 것처럼 목을 졸라 기절시킨다거나 하다못해 관절기로 붙잡고 결계를 깨서 식사를 하고 있었을 우리를 부르는 방법도 있었다.
일부러 우리의 식사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싶어서 혼자서 처리하려고 든 것 같기는 한데...
‘이상하게 이런 데서 조금 과하게 행동한단 말이지.’
마음가짐 자체는 착하지만,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 같달까.
나중에 한소리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간단한 회복 마법을 사용했다.
<중급 마법:="" 원상회복(Recovery)=""/>
초록빛의 이펙트가 잠시 방 안을 밝히고, 그 환한 빛이 점차 사그라들자 몸이 조금 편해진 듯 혜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보니 벽에 기대고 있던 등 뒤쪽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이렇게 땀까지 흘릴 정도로 아팠으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말해봤자 일단 지금 저의 취급은 포로나 다름없으니, 알아서 참으라고 하실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이런 걸 참는 건 익숙하기도 하고...”
"그래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 적어도 회복 마법 정도는 바로바로 걸어줄 수 있었는걸."
"이 정도는 나름 참을 만 해요. 괜찮아요."
고통을 참는 건 익숙하다며 애써 자신은 괜찮다고 반복적으로 대답하는 그녀의 표정은 오히려 상처가 낫기 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 아마 내 말이나 행동이 트리거가 되어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 거겠지.
이런 부정적인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나는 치트키를 사용하기로 했다. 핸드폰을 들어 통화 최근기록 화면의 가장 상단에 있는 주소록을 눌렀다.
이내 경쾌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오더니, 일주일에 몇 번씩은 꼭 들었던쾌활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00치킨집입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맛있는 음식과 술만한 것도 없다. 만일 그 맛있는 음식과 술이 각각 치킨과 맥주라면 그 시너지는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라는 것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OO콤보 반반 세트 부탁드려요. 음료는 콜라로, 감자튀김 쿠폰도 쓸게요.
배달은 한 시간 정도 걸리실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냥 제가 직접 찾으러 갈게요.
간단한 통화를 마친 후 핸드폰을 내리니 혜원이 질문했다.
“치킨이에요?”
“응. 아까 보니까 네가 배고플 것 같아서.”
그 선명한 꼬르륵 소리가 내심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우리가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도착했던 시각이 열 두 시. 점심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대였던 만큼 그때부터 예진과 교전했을 혜원이 점심을 먹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아마 점심도 거른 데다가 지금이 한밤중이니 저녁마저 거른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을 터.
아무리 유저의 몸이 초인에 가깝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배고픔이란 욕구는 누구나 느낀다. 점심과 저녁을 통으로 걸렀으니 허기의 강도도 엄청나게 강했을 것이다.
내심 고통까지 참아가면서 배고픈 배를 부여잡고 있었을 혜원에게 방 청소까지 시킨 게 조금 양심에 찔려서, 그녀에게 일종의 상으로 치킨 세트를 내리고자 했다.
예상대로, 치킨이란 보상이 잘 통했는지 그녀의 반응은 꽤나 긍정적이었다.
“...제가 치킨 좋아하는 건 어찌 알고.”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리고, 침샘에 침이 고인 듯 계속 군침을 삼켰다.
“딱 보면 견적 나오지. 애초에 치킨을 싫어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
"그건 그렇네요."
내가 웃으며 그리 대꾸하자, 그녀도 마주 웃음을 지었다.
“금방 다녀올테니 얌전히 있어.”
“어차피 도망쳐봤자 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데요 뭐.”
“그런가?”
물론 제한적이나마 그녀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사실이었기에, 나는그녀가 내 집에서 나갈 수 없도록 꼼꼼하게 결계를 쳤다. 정은 정이고 공과 사는 지켜야 하니까. 만약에 내가 방심했다가 그녀가 탈출해버리게 된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예진과 예림이였다.
각종 결계를 치는 상급 마법이 캐스팅된 후, 혜원이 마법의 제약 없이 풀 컨디션인 상태에서도 나가는 데에 한 시간은 걸릴 것 같은 결계가 완성되었다.
이제 완벽히 안심한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결계를 치는 작업에 집중했더니 어느새 시간이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슬슬 치킨이 나왔을 시간이네. 금방 다녀올게. 냉장고에 맥주 캔 있으니 도착하기 전에 세팅 좀 해 둬.”
“세팅은 금방 끝나니까 조심히 다녀오세요. 기다릴게요!"
나는 그렇게 참으로 오랜만에 누군가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왠지 모르게 가슴 한 켠이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