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손잡이 두 개 달린 용족이 되었다-43화 (43/59)

〈 43화 〉 18. 불청객

* * *

“미안하지만, 네 말에 따를 생각은 없어.”

“...너.”

무시무시한 기세로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꽤나 위협적이었다. 살기가 가득 담긴 눈빛에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려왔다.

“...후우,”

나는 몸을 안정시키기 위해 마나를 순환시켰다. 시아의 살기를 버텨내기 위한 마나가 온 몸을 몇 번 돌고 나니 호흡이 안정되고, 정신이 차분해졌다.

스스로가 깨우친 마나 연공법의 효능을 실감하고 있던 찰나, 시아가 위협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좋아, 가족들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이거지?”

“미안하지만, 그 사람들은 내 가족이 아니야.”

“...뭐? 그 자식이 직접 가족 관계란 걸 확인했다고 했는데­”

‘그 자식’이라, 나는 그녀가 말한 ‘그 자식’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고민했다.

시아는 남자였을 적부터 게임 상에선 여포였지만, 현실에선 먼저 말조차 못 꺼내는 잼병에 천생 아웃사이더였다. 그래서 더더욱 현실에서 받지 못한 관심을 게임에서 갈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천생 아싸인 탓에 친구가 없었던 그는, 친구라고 스스로가 인정한 사람만큼은 엄청나게 아끼는 편이었다. 흔히 삼국지의 유비로 대표되는 ‘내 사람’은 끔찍이 생각하는 좋은 친구.

그런 그가 야밤에, 비록 옛 친구라지만 한때는 친한 친구였던 사람의 침실에 몰래 침입한다?

그것도 열렬하게 사랑하던 남자친구가 실종된 뒤에?

무조건 그 뒤에 배후가 있을 것이다. 아마 그 배후는,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인 남자친구나 다른 지인들을 인질로 잡고 있을 터.

감히 예상해보건데, 그 자식이라 불린 사람이 시아에게 내 목을 가져오라고 시주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굳이 나를 노리는 이유가 뭐지?’

배후는 아무래도 과격파 유저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아니라면 나를 구태여 노릴 이유가 없거든.

그러나 아무리 방심했다고 해도 랭킹 4위이자 도적 계열인 시아의 기감을 피해 남자친구를 납치할 수 있는 수준의 유저가 과격파에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납치 같은 일은 도적 계열의 직업군들 전문인데, 시아가 그 도적계의 최상위권 랭커이자 스페셜리스트니까.

만약 시아의 기감을 피할 수 있는 괴물같은 도적 유저가 과격파를 이끌고 있었다면 대한민국의 수도는 지금쯤 화려하게 불타오르고 있겠지. 나 역시 진즉에 목이 떨어졌을 거고.

“...가족을 데리고 협박해도 소용이 없다니, 너도 못 본 새 참 달라졌구나.”

“되도록 옛날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가족들을 그리 끔찍히 아끼더니, 누가 누굴 보고 많이 달라졌다고 하는 건지. 나는 그저 박히는 맛에 빠진 것뿐인데, 넌 그냥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 되었구나.”

“비록 범죄자만 골라 죽였다지만, 유저100여 명을 현실에서 학살한 연쇄살인마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네.”

“난 적어도 소중한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는 냉혈한은 아니라서.”

“자기한테 소중한 사람들만 안 죽으면 되니까상관없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이야,성인군자 납셨네.”

“...”

욕만 안 섞였지, 선을 넘은지 한참인 원색적인 비난이 몇 번이고 이어진 뒤 다시금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이 침묵을 깨는 대신, 미리 속으로 영창 중이던 마법을 발동했다. 시아의 토끼귀가 이변을 감지한 듯 쫑긋거렸다.

“한겨울 너...!”

“이제 알아챘어? 감이 많이 옅어졌네. 역시 잔챙이만 상대해서 그런가?”

­<중급 마법:="" 영원한="" 속죄의="" 사슬(a="" chain="" of="" eternal="" atonement)=""/>

가성비는 쓰레기같이 없지만 약간의 활용 가능성 덕분에 배워 둔 스킬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아무리 네가 상성상 우위라고 해도, 비슷한 수준인 상대방과의 대면 상태에서 방심하면 안 되지.”

영원한 속죄의 사슬. cc기 효과가 포함되어 있는 스킬이자, 악한 행위를 할 때마다 쌓이는 카르마 수치에 비례해 상대방을 속박하는 정도가 강해지는 특이한 스킬이었다.

게임 상에선 pvp 경기나 전장을 제외한 곳에서 유저를 10명 이상 죽이면 공적으로 지목되고, 고인물 유저들이 공적을 죽일 때마다 드랍되는 금전을 얻기 위해 공적이 된 유저는 아무리 길어 봐야 몇 시간 내로 척살당하곤 했다.

당연히 한번 죽고 살아나면 그 유저의 카르마 수치는 ‘0’으로 리셋되므로, 이 ‘영원한 속죄의 사슬’은 게임상에선 영창 시간만 길고 활용도는 적은 노답 스킬 중 하나였지만­

역설적으로, 유저를 100명도 넘게 살해해 카르마 수치가 잔뜩 쌓인 여느 한 랭커에겐 너무나도 위협적인 스킬이었다.

“랭킹 1위와 전장에서 만날 때를 대비해 찍어 둔 스킬인데, 특별히 너를 위해 써 줄게.”

­­­­­­­­­

주변에서 수없이 빗발쳐 오는 사슬을 피하기 위해 시아는 최대한 빠르게 발을 놀렸다.

‘미친, 저 쓰레기 스킬을 찍어 둔 랭커가 있었다고?’

고인물 중의 고인물인 시아조차도 게임 내에서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모두에게 외면되던 쓰레기 스킬을, 스킬 포인트 하나하나를 신중히 투자해도 달성하기 힘든 상위권 랭킹의 유저가 사용하고 있었다.

‘저기에 걸리면 끝장이다.’

시아의 직업은 ‘그림자 도적’. 그림자가 있는 곳에서 강해지고, 그렇지 않은 곳에선 약해지는, 기습과 습격에 특화되어 있는 전형적이고도 단순한 특정을 지닌 도적 직업군이었다.

그렇기에 당장이라도 그림자 투성이인 골목길로 도주하고 싶었지만, 당연히 겨울은 자신의 노림수를 알고 있다는 듯 진즉에 사슬로 시아가 빠져나갈 수 있는 활로를 가로막은 상태였다.

‘젠장, 마법을 영창하고 있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만약 진즉에 겨울의 노림수를 알아차렸다면,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건 그 괴물이였던 랭킹 1위에게도 ‘탈출’ 하나는 인정받은 시아에겐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닿기만 해도 온몸이 수십 분이나 속박되는 끔찍한 사슬들이 겨울의 컨트롤에 따라 근처의 그림자로 향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는 그녀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평범한 마법사라면 정면돌파를 시도하거나, 견제기를 통해 컨트롤 미스를 유도시키고 빈틈을 봐서 탈출하겠지만­ 상대는 그 겨울이다. 당연히 모든 상황에 대비해두었겠지.

‘그렇지만, 이젠 진짜 활로가 없어. 어떻게든 돌파해야...!’

시아는 후드에 감추고 있던 칼날을 빼들었다. 여기서 겨울에게 잡히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미안하지만, 진심으로 돌파할 수밖에.

그 과정에서 누가 죽고 누가 다치든, 그건 이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그녀가 칼날을 옛 친우에게 겨눈 순간, 귀를 찌르는 듯한 꺼림척한 소리가 귓가를 강타했다.

­삐이이이이이.

“이런, 알람이 울렸나 보네.”

“이런 상황에서 알람은 무슨...?”

겨울을 향해 도약하려던 시아는 기감에 잡히는 두 거대한 존재감을 알아차렸다.

이 강대한 기, 적어도 레벨이 150은 넘길 랭커급 유저들이었다.

“우리 집에는 도적 특유의 넓은 기감이나 감지 마법을 왜곡시키는 결계도 설치해 뒀거든.”

아, 참고로 지원하러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랭킹 2위랑 34위야. 대충 누군지 알지? ­라며 천연덕스럽게 덧붙이는 겨울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아는 허허로이 웃음을 흘렸다.

“...하하.”

이건 못 도망간다.

완벽하게 그녀의 설계에 당했다.

혼자 나타나서 방심을 유발한 다음, 예상치 못한 속박 마법으로 상대방을 잡아둔 뒤, 지원을 부른다.

간단하기 짝이 없는 설계였지만, 나름 랭커라고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던 자신이 이 설계에 제대로 당한 것이다.

역시, 잔챙이만 상대하다 보니 뇌가 굳어버린 걸까.

그러나 아직까지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남자가 '쭉정이만 가득하다'는 평가와 함께 돌려준 두루마리가 있었으니까.

'자신에겐 쓸모가 없으니 위험할 때만 찢어서 사용하라고 했었는데, 일단 믿저봐야 본전이지.'

점차 두 랭커 유저의 기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시아는 남자의 말대로 품 속의 붉은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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