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소꿉친구에 미친놈신정윤(完)
* * *
"······그래. 갈게."
"밥부터 먹어라. 차려놨다."
나는 의자에 앉았다.
······밥이 넘어가질 않는다.
······가기 싫다.
나가는 건 불편해.
"······왜 같이 가?"
나는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거기에 볼일이 좀 있어서. 강변에서 걔 엄마랑 있어."
나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착 받쳤다.
······식도에서 뭐가 올라왔다.
어지럽다······
"······다 먹었어."
"별로 안 먹었네?"
나는 방으로 올라갔다.
장롱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나는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뭐라고 말하지?"
미안하다고?
실수였다고?
······그냥 사고니까.
이마에 땀이 흘러내렸다.
"현준아, 차왔다!"
엄마가 방문을 팍 열었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내 발끝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안녕하세요!"
엄마는 운전석에 소리쳤다.
엄마는 조수석으로 달려갔다.
나는 신발을 마저 신었다.
······정윤이 옆에 앉아야돼?
내가 조수석에 앉으면 안 돼?
나는 정말 무겁게 발을 옮겼다.
"······."
나는 뒷자석의 손잡이를 잡았다.
창문을 넘어 정윤이의 얼굴이 보였다.
정윤이의 머리가 힘없이 풀죽어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얘까진 나올 필요 없는데?"
"현준이도 너무 집에만 있으면 안 되니까···."
앞자리에선 서로 신나게 떠들어댔다.
······뒷자리 분위기는 전혀 아니다.
정윤이의 눈은 창가로 고정되있다.
······뭐라도 말하자.
"저······ 안녕?"
나는 정윤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정윤이가 드디어 고개를 내게 돌렸다.
"······응."
정윤이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창가로 눈을 돌렸다.
······어떡해.
함께한 어느 순간보다 지금이 제일 어색하다.
······기다림이 답이다.
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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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나무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대교 기둥엔 참새들이 빼곡하다.
······앞좌석의잡담은 끝날 줄을 모른다.
우리와 대조되어 마음이 심란해졌다.
"······현준."
정윤이가 작게 속삭였다.
드디어 정윤이와 눈이 제대로 맞았다.
"왜?"
"이것 좀 발라줘······."
정윤이는 손을 내밀었다.
손에는 작은 막대기가 쥐어져 있었다.
"어······ 뭘?"
"눈썹에다 살살······."
정윤이는 목을 쭉 폈다.
······피부가 하얗다.
원래 하얗지만······ 오늘은 더.
······화장인가···?
지금 나이면······ 할 만하지.
"눈썹?"
"응······ 둘 다······ 살살."
나는 막대기를 건네받았다.
솜털 끝을 정윤이의 눈썹에 가져갔다.
정윤이의 눈이 질끈 감겼다.
"어······ 얼마나 해?"
"끝에 진해졌어?"
······정윤이의 눈썹끝이 진해졌다.
물감인가?
나는 반대쪽도 살살 발라줬다.
"어······ 괜찮은데."
"거울 없나?"
정윤이는 창문을 이리저리 쳐다봤다.
반사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괜찮네."
정윤이는 창문에서 물러났다.
······말했다.
드디어 대화했다.
어색함 없이······
그 일은 잊은 듯 행동했다.
이 정도···─
풀썩─
······허벅지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나는 턱을 아래로 내렸다.
무릎 위에 정윤이가 눕혀 있었다.
"······졸려서······ 잠깐······."
정윤이는 내 무릎 위에서 눈을 감았다.
······말릴 필요 없다.
······서로의 마음을 아는 눈치다.
갖고 놀려지는 것 같지만······
나는 정윤이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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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태워다줘서 고마워요."
창밖엔 드넓은 초원과 강변이 보였다.
정윤이는 내 무릎 위에서 곤히 잠들었다.
나는 정윤이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으으······ 응?"
"다 왔어."
정윤이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우리는 차 밖으로 나왔다.
"엄마, 우린 뭐 해?"
"저기 장터가서 먹을 거 사오자."
아줌마가 푸드트럭이 줄진 곳을 가리켰다.
"따라와!"
우리는 아줌마를 따라갔다.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공기 중에 음식 냄새가 배겼다.
우리는 여러 음식들을 샀다.
나는 컵밥과 핫도그를 들었다.
"돗자리 필게."
아줌마는 트렁크에서 돗자리를 꺼냈다.
바닥에 돗자리를 착 펼쳤다.
우리는 펼쳐진 돗자리에 앉았다.
"얘들아, 맛있어?"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칠맛나는 제육비계가 맛있었다.
케찹발린 핫도그도 맛있었다.
아쉬운 점은······ 마실 게 없다.
정윤이는 천천히 음식을 입에 넣었다.
"아이고, 물이 없네. 아줌마가 사 올게."
아줌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컵은 바닥을 드러냈다.
······주변이휑하다.
강이랑 멀어서 그런가.
나는 강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 먹었네."
정윤이는 컵을 탈탈 털었다.
"아줌마가 마실 거 사 온데."
정윤이는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강가의 소금쟁이들이 쭈뼛쭈뼛 움직였다.
"······어."
나는 작게 소리를 내뱉었다.
어깨에 무언가가 확 닿았다.
······가벼운 무게감.
정윤이의 머리다.
목길이의 머리카락이 내 다리를 스쳤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기대오면 좋겠다.
안아주고 싶다.
마음 표현 못하는 내성적인 아이. 얼마나 귀여워?
나는 정윤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현준아."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내 달팽이관을 자극했다.
선선한 분위기에 나는 숨을 들이 마셨다.
"······왜?"
"알잖아······."
정윤이는 갈망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살짝 벌려진 입에 시선이 쏠렸다.
"······난 진짜 모르겠네?"
"······너도 말못하는 찐따야."
정윤이는 내 턱을 착 부여잡았다.
턱선이 엄지에 꾹꾹 눌렸다.
······나도 찐따지.
1년동안 밥상을 걷어찼으니.
······소꿉친구고 나발이고 연애나 할걸.
"······그래. 나 정도면 충분히 좋아할···─"
"당당하네."
정윤이의 일침이 가슴에 팍 꽂혔다.
내 시선은 이리저리 튕겨졌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게······그 사람한텐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
정윤이의 목소리가 갸름하게 떨렸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다.
"······다 그렇게 생각은 안해."
"어떻게 알아?"
"나 너 좋아하거든."
정윤이의 눈썹이 올라갔다.
화장된 두 볼이 홍조로 대조됐다.
······계속 밀당만 할 바엔.
무지성이다.
······되겠지 뭐.
"······어디가?"
정윤이의 얼굴이 더 다가왔다.
······어지럽네.
피해의식에 쩐거 같아.
1년 전에 딱 이랬지.
"······다."
"······에?"
"말하고 끄덕이고 걷고 게임하고 사고치고 싸우고 전부 다."
정윤이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진짜야.
작고 아담한 키에 하얀 머리.
그 모든 행동들이 다 귀여웠다.
"······나쁜 점은?"
"말 안해."
"······뭐?"
정윤이의 입술이 가라앉았다.
······말 하기 싫어.
그걸 말하면
너는 계속 이거에 집착할 거 잖아.
그러지 말라고.
"······니가 알면, 그거에 계속 집착할 거 같아서."
"고칠 수 있어."
"아니. 못고쳐. 사람은 안변해."
진짜야. 사람 안변해.
채륜이 봐라. 초딩부터 고딩까지 쳐 패는 게 일상이야.
"내가 안 예쁘면··· 내가 귀찮아지면··· 어쩌지?"
"······."
"이 생각만 하다 또 전처럼 한 성질 할거잖아."
정윤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 안하던 화장까지 하고. 어색해 죽겠어."
"······너도······ 걱정해···?"
"당연하지. 니가 다칠면 어쩔까··· 사고치다 들키면 어쩔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윤이는 피식 웃었다.
"······신경 써 주면 되겠네."
"그렇지?"
나는 열심히 끄덕였다.
······내 설령 여친을 우습게 보겠냐.
나는 정윤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전완근에 힘을 주고 확 당겼다.
정윤이의 정수리에서 향긋한 샴푸향이 풍겼다.
······살다 살다 여친을 만드네.
······잼민이지만.
얘 만큼은 제일 성숙해 보인다.
잘해 줄 테니까.
집착만 하지 마.
이게 나쁜 점이다.
······괜찮겠지.
정윤이의 얼굴이 내 가슴에 푹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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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 앞의 식물이 살살 흔들렸다.
갈수록 여긴 점잖게 보이네.
손님 온다고 꾸미는 거야 뭐야.
나는 손잡이를 당겼다.
"안녕하세요."
"부르지도 않았는데···."
누나는 물 한 컵을 들이켰다.
"안녕하세요···."
"······어라."
정윤이는 내 등 뒤에서 슬며시 뻐져나왔다.
누나는 안경을 벗고 고개를 들었다.
정윤이는 내 팔꿈치를 꼭 붙잡았다.
"······알겠네."
누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윤이는 모자의 챙을 쓰윽 위로 올렸다.
"축하축하."
누나는 조용히 박수를 쳤다.
우리는 누나 앞에 앉았다.
"딱 너희들 같았어. 속으론 응원했다고?"
지랄하네. 따먹으려고 안달난게.
우리는 크림빵을 주문했다.
"마셔마셔."
누나는 가방 속을 뒤적였다.
잠시 후, 누나의 손에서 캔 여러개가 딸려왔다.
"······맥주?"
"축포야."
누나는 캔 2개를 우리 앞에 탁 내려놨다.
"······써서 싫어요."
정윤이는 캔을 굴려 누나에게 돌려줬다.
"······난 먹을래."
나는 캔의 뚜껑을 딱 열었다.
정윤이는 큰 눈망울로 바라봤다.
"나왔습니다."
점원이 접시 2개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접시는 크림으로 범벅이였다.
나는 빵을 집고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느끼한 크림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묻었다."
정윤이는 휴지를 뽑아 내 입가를 스윽 닦아줬다.
"······손으로 닦을 줄 알았는데."
"개더러워."
정윤이는 내 어깨를 찰싹 때렸다.
······그럼에도 정윤이의 입술은 가라앉을 줄 모른다.
······재밌어 보이네.
그럼 됐지.
그럼 된 거야.
누나는 우리를 흐믓하게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