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7)

2.

눈 깜짝할 사이 서연의 첫 현장경험 날짜가 다가왔다. 스튜디오는 사무실과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개방적이면서 소란스러웠고 여러 부서의 팀원들이 모여 훨씬 시끌벅적했다. 그 틈에서 정신이 없을 법도 한데, 다행스럽게도 사수인 백 대리가 서연을 잘 챙겨주어 크게 혼란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한가하기까지 했다.

‘차라리 바빴으면 좋겠다…….’

이원 놈 마주칠 틈도 없게.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바빠 보이는데, 덩그러니 서서 그들을 구경하려니 민망해진 서연이 백 대리에게 물었다.

“백 대리님, 저는 뭘 하면 될까요?”

“사실 이렇게 상습적으로 무단 잠수나 일정 파기가 있는 분들의 경우는 수시로 매니지 쪽이랑 연락하면서…….”

대충 선수가 도착할 때까지 편하게 둘러보고 있으라고 할 법도 한데, 백 대리는 서연에게 현장에서 자주 일어나는 몇 가지 일들과 자잘하게 신경 써야 할 것들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백 대리의 설명을 듣던 서연은 불현듯 든 생각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대리님. 이원 프로 말이에요…… 이번에도 펑크 내는 건 아니겠죠?”

그렇게 묻는 서연의 속내는 제발 펑크 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절망적이었다. 매니지 쪽에서 이번에는 확실하게 이원을 보내겠다고 확답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일순 스튜디오가 소란스러워졌다. 수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서연 또한 입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가장 먼저 시야에 담긴 건, 키가 훤칠한 노란 머리의 남자였다. 꽤 날티 나게 생긴 외모가 그림 같은 남자.

서연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이원이었다.

‘와, 염색은 또 언제 한 거야.’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차분한 검정 머리였는데. 지금의 그는 탈색을 몇 번이나 한 건지 완전한 금발이었다.

확실히 눈에 띄는 화려한 외모 덕에 다른 팀의 몇몇 사람들은 그를 보며 짧게 비명을 내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서연은 잘생긴 그의 얼굴에 감탄하기보다 어떻게든 인파 틈에 숨으려고 안달이었다.

그런데 멀찍이서 본 이원의 표정은 어쩐지 좋지 않아 보였다. 서연이 알고 있는 원의 얼굴은 장난스러운 웃음이 항상 깃들어 있는 낯이었는데, 지금의 그에게서는 짜증이 노골적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사적인 자리도 아니고 공적인 자리에서 말이다.

‘뭐야, 사고는 자기가 쳐놓고 표정이 왜 이렇게 썩어 있어?’

쟤 진짜 요즘 무슨 일 있나?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오랜 친구의 모습에 서연은 어색함을 느꼈다.

사람들 틈에 최대한 몸을 숨기고 있는 서연이었는데, 눈치 없는 백 대리가 이쪽으로 와서 이원과 인사하라며 서연에게 손짓했다.

‘아, 대리님. 제발 눈치 좀…….’

더는 피할 곳이 없겠구나, 체념할 무렵. 시종일관 짜증을 숨기지 않던 이원이 입을 열었다.

“인사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볼일이나 빨리 보고 빨리 끝내요.”

이건 그가 스튜디오에 도착 후 가장 처음으로 뱉은 말이었다. 그러니까 기본적인 인사나 지난 무단 펑크에 대한 사과 따위는 조금도 없다는 뜻이다.

순간 서연은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어 머릿속이 멍해졌다. 다행히 그런 서연과 달리 백 대리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대처했다.

하지만 서연은 충격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아무리 오랜만에 마주한 친구라지만, 그의 원래 성격이 저렇지 않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3살 때부터 옆집에서 단짝처럼 자랐으니 당연했다.

‘뭐야, 쟤 진짜 왜 저래?’

하지만 현장의 말단 사원인 그녀가 나서서 무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고. 서연은 그저 잘됐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원을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인파 속에 몸을 파묻고 조용히 현장이 마무리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친구로서 본 원과 업무 대상으로 본 원. 단언컨대, 후자의 원은 정말 최악이었다.

왜 포털 사이트에 이름을 검색하면 비난으로 가득한 기사들이 도배된 건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현장에서 원의 행동들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연은 현장에서 원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수많은 뉴스와 기사들 속 이원은 아주 많이 미화된 모습이었다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이원의 태도에 낯선 감정을 느끼던 서연의 귓가로 백 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 주임, 이거 이 프로님 소지품. 이것만 따로 잘 챙겨줘.”

“네, 알겠습니다!”

“원래 현장에서 우리가 이런 잡일까지 할 필요는 없는 건데…… 아무래도 연예인 현장이랑은 조금 달라. 알아만 두고 외투랑 소지품들 분실 없게 잘 부탁해.”

이번에도 백 대리는 현장에 처음 나와보는 서연을 위해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그런 백 대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서연은 더욱 빠릿하게 움직였다.

멀찍이서 보이는 원의 모습은 확실히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큼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했다. 왜 그렇게 엄마가 원을 예뻐하는지 이해를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난 평범한걸.’

화려하게 빛나는 원의 곁에 있으면 소박하게 빛나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한층 더 묻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서연은 점점 나이가 들수록 어릴 때처럼 그에게 아무렇지 않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현장을 구경하고 있었을까. 슬슬 여유 시간이 생긴 서연은 괜스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조용하네.’

현장에서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일 동안, 한 번도 울리지 않은 제 휴대폰을 보며 서연이 묘한 섭섭함을 느꼈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sdfesdfa에게서 별다른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연락은 지난밤이었다. 오늘은 일이 좀 있어 바쁠 것 같다는 말을 끝으로 종일 메시지 하나 없었다.

‘많이 바쁜가?’

잠시 고민하던 서연은 숨 돌릴 틈이 생긴 사이, 그에게 짧은 메시지를 남겨두었다.

sxxyxx2 뭐해? 일해?

그런데 그녀가 발신 버튼을 누른 그 순간. 서연이 보관하고 있던 이원의 외투 속에서 짧은 진동 소리가 들렸다. 기막힌 타이밍에 서연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이내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우연이겠지.’

세계적인 골프 스타가 SNS에서 폰섹이나 하고 있겠어? 이원 정도면 여자가 발에 치일 텐데.

서연은 건너건너 알던 지인들마저 제게 이원 사인 한 번만 받게 해 달라며 조르던 수많은 연락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봐도 정말 우스운 망상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적인 골프 스타가 SNS에서 폰섹이라니. 당사자가 안다면 노발대발할 망상이었다. 아니, 노발대발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명예훼손으로 고소까지 당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는 마음속 한구석에는 혹시나, 설마 하는 아주 작은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래서 서연은 다시 한번 그에게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메시지 한 통 더 보낸다고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래, 혹시 모르니까 한 번만 더. 정말 딱 한 번만 더 보내보자.’

sxxyxx2 나도 오늘은 너무 바쁘다 ㅠㅠ

그럴 리 없을 거야. 아까는 우연이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서연이 발신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는 손쉽게 부서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짧게 울리는 휴대폰 진동 소리.

서연의 낯에서 핏기가 싹 가시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서연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내보았다.

sxxyxx2 많이 바빠?

아니어야 해. 제발 아니어야만…….

서연의 잇새로 제발, 제발, 제발. 이라는 말이 몇 번이고 더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하늘은 서연의 편이 아니었다.

그녀가 메시지를 보내기 무섭게, 전과 마찬가지로 이원의 외투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에 서연은 완전히 경악해버렸다.

“미친.”

너무나 당황한 서연은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는 걸 느끼며, 곧장 이원의 외투 주머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원의 휴대폰을.

그녀는 자신이 지금 타인의 물건을 허락 없이 만지고 있다는 것조차 까무룩 잊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렇게 만진 휴대폰의 잠금 버튼을 한 번 누른 순간.

서연의 얼굴은 완전히 하얗게 질려버렸다.

왜냐고?

sxxyxx2 뭐해? 일해?

sxxyxx2 나도 오늘은 너무 바쁘다 ㅠㅠ

sxxyxx2 많이 바빠?

화면에는 그녀가 조금 전 보낸 메시지들이 고스란히 떠 있었으니까.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확인하기 무섭게 곧장 휴대폰을 원래 자리로 넣어둔 서연이 초조하게 입술을 뜯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랑 그렇고 그런 메시지를 주고받던 게…… 저, 저, 저, 이원이라고?’

아니 저, 저…… 저 미친놈이 대체 왜 SNS에 얼굴도 모르는 여자한테 자기 몸 사진이나 보내면서 음담패설을 하는 건데? 좆 사진은 왜 보내고 폰섹은 왜 해!

믿기지 않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다 순간 서연의 머릿속으로 그동안 그가 뱉었던 음란한 말들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sdfesdfa 만나는 게 부담스러우시면 폰섹 같은 것도 괜찮습니다. 저 말 좆같이 잘하거든요. 그쪽 천박한 말 들으면서 보지 젖는 타입 맞죠?

sdfesdfa 근데 너 자지 빠는 거 좋아하냐?

sdfesdfa 착하네, 보지도 잘 젖고.

sdfesdfa 왜, 싫어? 너 묶어놓고 뒤에서 씹질하면 진짜 존나 야할 거 같단 말이야. 나중에 꼭 박게 해줘. 어차피 너도 이런 거 좋아하잖아.

제발, 누가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줘. 서연은 울 것 같은 낯으로 인터뷰에 집중하고 있는 이원을 응시했다. 다행히 서연 외에도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고 있었기에, 눈이 마주치거나 하는 민망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서연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백 대리가 무슨 일 있냐며, 물어볼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온몸의 힘을 짜내어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화장실로 자리를 피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다 못해 입 밖으로 토해질 것 같았다.

‘나 어떡해……?’

소꿉친구와 그렇고 그런 짓을 했다는 충격. 아니, 정확하게는 소꿉친구의 거기를 보면서 자위한 거로도 모자라! 소꿉친구한테 제 소중이 사진을 보냈다는 충격이 서연을 쓰나미처럼 덮쳤다.

서연의 손이 덜덜 떨렸다. 복합적인 것들이 서연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쿵쾅대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키고, 객관적인 의견을 들어봐야 하나 싶어져 휴대폰을 들고 절친한 친구에게 연락을 하려 했다. 하지만 역시 이것도 우스웠다.

‘연락해서 뭐라 그래.’

내가 사실은 SNS에서 모르는 남자랑 폰섹을 했는데 그게 알고 보니 세계적인 골프 스타인 이원이래! 그런데 알지? 내가 얘랑 소꿉친구인 거!

‘와, 정신병원 추천받기 딱 좋다, 진짜.’

서연은 제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이마만 팍팍팍 내리쳤다.

‘아니, 잠시만.’

생각할수록 더 이상한데?

나는 그렇다 쳐. 그런데 얘는 얼굴도 팔릴 만큼 팔린 애가 무슨 깡으로 폰섹을 하고, SNS에서 만난 여자랑 만나기까지 하려 한 거지?

여태까지는 충격에 이성적인 사고가 되지 않았는데, 조금씩 진정하기 시작하니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져놓고, 단순히 성적 취향이 잘 맞는 것 같아서 SNS로 연락을 한다고? 거기다 만나자는 말도 하고, 자기 몸 사진도 보내고…… 거기 사진까지…….

‘아악, 저 멍청이!’

상대가 나여서 다행이지. 아니었어 봐!

막말로 서연이 지금 나쁜 마음을 먹고 그의 평판에 흠이 가는 일을 만들고자 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 증거가 차고 넘쳤다. 물론 서연은 그와 가까운 사이였으니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혹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걸 빌미로 돈이라도 한탕 뜯어내려 했을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생각 없이 군다고……?’

나름 10대 시절을 그와 함께한 서연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서연은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어 다시금 스튜디오로 향했다. 머릿속이 아직 다 정리되지 않은 탓에 땅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스튜디오로 돌아오기 무섭게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화려한 이목구비와 조각 같은 얼굴.

그래. 이걸 왜 여태껏 알아보지 못했을까.

저 화려한 얼굴 속 그린 듯 날렵한 턱선은, 남자가 보낸 사진 속에서 수도 없이 봤던 그 하관이 맞았다.

* * *

“자자, 10분 쉬고 다시 들어갈게요.”

한창 진행 중이던 화보 촬영이 잠시 중단되었다. 카메라 팀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이원 또한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의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그를 보며, 서연이 유별나게 몸을 굳혔다.

‘망할, 오지 마, 오지 마! 제발 오지 마!’

이원이 가까워질수록, 서연의 머릿속에서는 팔뚝만 하던 시커먼 자지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졌다.

‘아악! 차서연 이 한심한 기집애야! 너는 이 상황에서 왜 쟤 고추가 생각나는 건데!’

그녀는 누가 봐도 수상할 만큼 몸을 굳히고 빳빳하게 로봇처럼 굴었다. 이쯤 되니 제발 저 좀 봐 달라고 아우성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 서연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건지, 이원 또한 그녀 앞에 멈춰섰다. 서연은 제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의식하며 더욱 어깨를 굳혔다.

‘제발, 제발, 제발…….’

모든 게 최악이었다. 서연은 온몸에 피가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차라리 이대로 콱 기절해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애꿎은 제 신발 끝만 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건 여전했다.

‘제발 그만 쳐다봐.’

서연이 간절하게 빌었다. 종교가 없는 그녀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온 세상의 신들에게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하지만 세상은 야속했다.

“……뭐 하냐, 차서연.”

서연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무심하게 떨어졌다. 서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말았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고, 오랜만에 마주한 소꿉친구의 얼굴에 서연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자꾸만 그의 고추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미쳤어, 미쳤어, 아 좀! 고추 생각 그만하라고!’

아니, 그보다 이렇게 단번에 날 알아본다고?

그러다 이어진 뒷말에 서연은 무언가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근데 섭섭하게 넌 알은척 한 번을 안 하네.”

“……뭐?”

“친구를 오랜만에 봤으면, 어? 인사라도 해야 할 거 아니냐. 씨발, 맨날 내 연락 씹어먹더니 이젠 인사도 안 하고 쌩까?”

큰 목소리로 저를 알은체한 원 탓에 스튜디오의 이목이 쏠렸다. 서연은 어디론가 숨고 싶었지만 숨을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카메라 팀과 잠시 대화를 나누던 백 대리가 황급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제 후임이 개차반으로 유명한 이원에게 이렇게 붙잡혀 있으니, 천성이 선한 그로서는 아마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이리라.

‘제발 오지 마세요, 백 대리님.’

그렇게 절망하고 있는 서연의 귓가로, 시건방지기 그지없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진 채 귓가에 내려앉았다.

“……서연아.”

“잠시만, 원아. 내가 다 설명…….”

“나 좀 섭섭하다.”

원의 입에서 뱉어진 건 의외의 말이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서연은 멀뚱히 서서 눈만 끔뻑였다.

두 사람 사이엔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섣불리 끼어들 수 없는 그런 침묵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억겁과도 같이 느껴졌다.

살짝 허리 숙인 원이 서연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씨발,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한테는 보지고 뭐고 다 보여줘 놓고, 친구한테는 인사 한 번을 안 하네.”

그제야 서연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뭐? 지금 그게 무슨…….”

“하긴,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어도 좆 사진 하나 보고 알아보는 건 좀 힘들었지?”

그가 질 나쁘게 킥킥대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너 보지 예쁘더라.”

그리고 원은 완전하게 쐐기를 박았다. 서연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졌다.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묻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연에게는 물을 용기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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