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다음 날 아침, 하늘이 채 밝기도 전에 누군가가 정원에 들어섰다.
일찍 일어나 수련을 하던 운청휘는 기척을 알아차리고 밖으로 향했다.
“이상하군, 내 느낌에는 정원의 영기가 바깥보다 훨씬 짙은 것 같은데.”
정원에 들어서던 운한이 의문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약 두 배 정도의 영기라…….”
태상장로는 월경의 고수로서 자연히 통찰력이 운한보다 뛰어났다. 그는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계속되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 설마 이 정원에 진법이 배치된 것인가?”
“잘 보셨습니다.”
말소리와 함께 운청휘의 신형이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이럴 수가! 네가 진법대사란 말이냐!”
운청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태상장로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뭐? 진법대사라고?”
운한도 태상 장로 못지않게 놀라며 운청휘를 쳐다보았다.
“청휘야. 내게는 연단사라고 하지 않았느냐? 왜 지금은 진법대사란 말이더냐?”
“백부님, 연단사와 진법대사는 저에겐 같은 의미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운한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니까…… 저 녀석이 연단사인 동시에 진법대사라는 말일세!”
태상장로가 운한에게 소리쳤다. 그의 상식으로는 한 인간이 연단과 진법을 동시에 해낼 수 없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연단사와 진법대사 모두 천성대륙에서 가장 존중받는 직업 중의 하나였다.
특히 진법대사는 더더욱 그러했다.
“하하하, 하늘이 운씨세가를 버리지 않았구나! 아니! 축복을 내렸어!”
잠시 후 겨우 진정이 된 태상 장로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대소를 터뜨렸다.
가주인 운한도 옆에서 감격해 마지않았다.
운청휘가 돌아오고부터 좋은 일이 끊이질 않았다.
“청휘만 있다면 우리 운씨세가는 곧 천우성 제일세가로 우뚝 설 것이야!”
“천우성? 후후 가주, 아니 운한아, 겨우 그 정도에 만족하는 것이냐? 노부가 장담하건대 운씨세가는 청휘가 있다면 백 년 안에 천원왕조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세가로 거듭날 것이야!”
태상장로는 눈을 흘기며 운한을 질타했다.
그러면서 운청휘를 부르던 호칭도 자연스럽게 ‘청휘’로 바뀌었다.
운청휘는 별말 하지 않았다.
태상장로는 운한에게 안목이 없다 했지만, 운청휘가 보기엔 그도 우물 안 개구리나 다름없었다.
백 년이면 운씨세가를 천원왕조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세가로 만드는 것은 물론, 선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세가로 만들 수 있었다.
운청휘는 어깨를 으쓱하며 태상장로를 바라봤다.
“그보다, 어제 제가 맡겼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태상 장로도 더 이상 운청휘의 하대하듯 하는 말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리해야 할 것은 모두 마쳤다. 이제 운씨세가는 우리의 수중에 있다고 보면 된다.”
태상장로는 슬쩍 ‘우리’라는 두 글자를 집어넣었다. 운청휘와 한배에 타겠다는 의미였다.
세 사람은 한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운청휘가 몸을 일으켰다.
운몽에게 운현과 운한, 태상장로가 사용할 칠보쇠체액의 준비를 일러둔 운청휘는 곧장 영약원으로 향했다.
운씨세가의 영약원은 임씨세가의 오인철 광산처럼 천우성 동남쪽에 있는 낙운산맥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성문을 나서자마자 자신의 최대 속도로 달려온 운청휘는 반 시진 후에 낙운산맥의 입구에 다다랐다. 앞을 바라보니, 끝없이 펼쳐진 숲 위로 자욱한 안개가 내려앉아 마치 신선들의 거처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대로 숲을 가로지르며 내달린 지 이 각여, 은은한 향이 운청휘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약재의 향이다.
향기는 저만치 보이는 담장 너머에서부터 풍겨 나오고 있었다.
“멈춰라! 여기는 운씨세가의 구역이다! 목숨이 아깝거든, 당장 돌아가라!”
입구에서 보초를 서던 열 명의 무인이 운청휘를 발견하자 경고했다.
“운씨세가의 소가주 운청휘다!”
필요 없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운청휘는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이곳의 책임자에게 안내하도록.”
말을 마쳤을 때 운청휘는 이미 호위들의 앞에 서 있었다.
“진짜 소가주님이시네…….”
그들 중 하나가 운청휘를 알아보았다.
“돌아오셨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진짜였어!”
운청휘를 알아본 호위의 얼굴에 감격의 감정이 어렸다. 운청휘는 운씨세가의 자랑이었고 많은 이의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 호위도 그들 중 하나였다.
“소가주님, 저는 진무라고 합니다. 소가주님의 말을 한 번 끌었지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운청휘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곳의 책임자는 운호 원주입니다.”
“당연히 기억하고말고. 3년 전, 채하와 사냥하고 돌아오는 길에 내 말 고삐를 잡아 주지 않았는가.”
운청휘는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막힘이 없이 말했다.
“예. 맞습니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서른이 넘은 진무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어린애처럼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운호 원주는 언제 여기로 파견되었지?”
운청휘의 기억에 운호는 원래 운씨 성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운씨세가를 위해 세운 적지 않은 공로가 인정되어 운씨 성을 하사받았었다. 배분으로 따지면 그는 운청휘의 숙부항렬이었다.
“운호 원주는 1년 전 성경 7단계로 올라선 뒤 영약원으로 파견 왔습니다.”
진무는 있는 사실 그대로 말했다.
“그래?”
운청휘는 의혹이 점점 더 커져갔다. 운호는 자질이 평범해 이번 생에는 성경 7단계로 도달할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누구……, 운청휘 소가주?”
마침 눈이 큰 사십 대 중년인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운청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식을 일으켜 눈앞의 중년인을 살폈다.
‘성경 8단계, 다만 영약으로 억지로 끌어올린 무위이군.’
운청휘는 신식 한 번으로 운호의 모든 것을 알아내었다.
“잘 오셨습니다. 소가주님이 돌아오셨다더니 그게 진짜였군요. 얼마 전 세가에서 물자를 보충하는 사람이 왔었는데 그자가 그러더군요. 3년이나 실종되었던 소가주가 돌아왔다고, 그때 세가로 돌아가 보려 했는데 영약원을 지켜야 하는 책임이 워낙 커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중년인은 한숨을 내뱉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원주가 시간이 없으니 이렇게 제가 오지 않았습니까?”
운청휘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원주, 최근 뭔가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신식을 풀어 운호의 안색을 관찰했다.
“특별한 일이요? 제가 여기로 오고부터 영약원은 늘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할 것이 없지요.”
운호는 표정을 고치지 않으며 대꾸했지만 눈동자에 스치는 당황함은 감추지 못했다.
“원주님, 요즘 약재가 자주 도난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곳에 동물의 발자국도 찍혀 있었고요.”
운청휘의 옆에 서있던 진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약재가 도난당해? 동물의 발자국이라?”
운청휘는 몸을 돌려 진무를 돌아보았다.
“자세히 말하도록.”
“예, 소가주…….”
그러나 그는 운호에 의해 말이 끊겼다.
“진무, 자네는 이제 나가보게. 내가 직접 소가주께 고할 테니까.”
진무가 머뭇거리며 나가자 운호는 운청휘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 어떤 야생동물이 담장을 넘어와 영약원 안의 약재를 훔쳐 먹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영약원의 대지는 몇 만 장에 달합니다. 게다가 몸집이 작은 놈이어서 좀처럼 잡히지 않았지요.”
그는 운청휘의 눈을 한번 슬쩍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손실이 난 약재들도 모두 평범한 것들이어서 소가주가 아까 특별한 일이 없느냐고 물으셨을 때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 발자국. 제가 한번 봐야겠습니다.”
운청휘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예…….”
운호는 뭔가 망설이다 마지못해 대답했다.
영약원은 많은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일반적인 약재를 재배하는 곳도 있었고 진귀한 약재를 재배하는 곳도 당연히 있었다.
일반적인 약재를 재배하는 곳에서도 종류에 따라 구역을 나누었고, 진귀한 약재를 재배하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진귀한 약재는 종류가 아니라 햇수에 따라 구역을 나누었다.
영지(靈芝)를 예로 들자면, 10년 이하의 영지 구역, 10~20년 사이의 영지 구역, 20~50년의 영지 구역이 있는 것이다.
다만 백 년이 넘어가는 희귀한 약초들은 그 수가 적어, 모두 한 구역에서 재배하고 있었다.
운호는 운청휘를 영약원의 중심으로 안내했다.
인삼 구역을 지날 때, 운청휘가 별안간 걸음을 멈췄다.
바닥에 두 줄에 작은 발자국이 있었다. 아이의 주먹보다도 더 작은 것으로 보아, 매우 작은 ‘동물’인 듯했다. 다만 바닥이 깊이 파여 있었고, 발가락도 하나뿐이었다.
‘이건 영물이 남긴 발자국 같군…….’
순간 운청휘의 머릿속에 수천 종의 영물이 떠올랐다.
그러나 작고 무거우며 발가락이 하나인 영물은 하나도 없었다.
“소가주. 소가주가 보기엔 어떤 동물이 남긴 흔적 같습니까?”
운호가 갑자기 물었다.
“동물? 이건 영물이 남긴 발자국입니다.”
운청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영물.
동물과 비슷한 생김새를 지녔지만 동물과는 엄연히 다른 존재였다.
그들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높은 지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수련이 가능해 선천생령의 경지에 도달하면 사람의 모습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
선계에서는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영물을 요족(妖族)이라 불렀는데, 십대 선제 중 셋이 바로 이들이었다.
‘이상하군. 신식으로도 감지하지 못하는 영물이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