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협박이라니, 이 늙은이는 추호도 그럴 마음이 없소이다. 다만 듣고 싶을 뿐이오. 정녕 가주에게는 세가의 충신보다 배신자의 여식이 중요하오?”
운해경은 일부러 오른팔을 들어 올리며 상처를 더 돋보이게 했다.
그는 가주가 대답 없이 무거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만 있자 서글픈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의 위치가 정말 저 계집보다 못한가 보오.”
이제 운해경과 운한의 거리는 일 장도 채 되지 않았다.
별안간 운해경의 얼굴에서 서글픈 빛이 사라졌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이 늙은이가 가주를 공격해도 죄책감이 없지…….”
“안 돼!”
“가주님! 조심……!”
“운해경, 감히……!”
모두의 안색이 급변했다. 운해경이 싸늘한 표정을 짓는 것과 동시에, 멀쩡한 왼손으로 비수를 꺼내어 운한을 향해 찔러갔다.
운한을 향해 호소하던 운해경이 기습을 할 줄이야. 피하기엔 너무 가까웠다.
이제 비수는 운한의 몸에 닿기 직전이었다.
펑!
운해경이 덤벼든 것만큼이나, 운해경의 뒤에서 날아온 공격도 순식간이었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기운이 그의 손에서 비수를 떨어트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운한이 뻗어낸 중장이 운해경의 어깨에 직격했다.
“태상장로님!”
“태상장로님이 제때 도착하셨으니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가주님께서 큰 낭패를 당하실 뻔하셨습니다.”
대전 안의 모든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갑자기 나타난 태상장로를 바라보았다.
운한은 감사의 뜻으로 태상장로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몸을 돌려 운해경에게로 다가갔다.
“언제부터 철랑방의 개가 된 거냐!”
운한이 중상을 입은 운해경에게 물었다.
“철랑방?”
운해경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내가 철랑방에 몸을 의탁했다고 하였소?”
“운해경, 아직도 궤변을 늘어놓고 싶은 것이냐?”
“흥, 감히 가주님을 기습해? 그러고도 배신이 아니라고?”
화를 참지 못한 이들이 운해경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운해경은 조소를 지었다. 운한과 다른 이들을 둘러보는 운해경은 이미 죽기를 각오한 듯, 태연했다.
“철랑방은 겨우 20년 된 세력이오. 일개 신흥세력에 지나지 않거늘, 이 몸의 충성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시오? 또한, 나는 운씨세가를 배신한 적이 없소. ……애초에 운씨세가의 사람이 아닌데 배신이 가당키나 한가! 내 몸에 흐르는 피는 존귀한 임씨세가의 피! 단 한 번도 운해경인 적이 없었소!”
임해경의 말은 모두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임해경은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운씨세가에 들어왔다. 수십 년을 운씨세가에 몸담고, 세가 내에서 입지를 굳혀 운한의 눈에 들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누구도 임해경을 의심하기는커녕 낌새도 눈치채지 못했으니, 간담이 서늘할 만했다.
“수십 년을 참았는데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냐?”
옆에 있던 태상장로가 갑자기 물었다.
“크큭, 이제는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오.”
태상장로를 돌아본 임해경은 다른 이들에게처럼 조소를 지어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월경 고수의 기세가 임해경에게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애써 태연한 척 말을 이어갔다.
“운씨세가가 곧 멸문하고 임씨세가가 천우성을 일통할 것인데 내가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있다고 보시오?”
“지나친 자신감이군. 운씨세가의 멸문은 둘째 치고 운씨세가가 멸문한다고 해도 임씨세가가 철랑방의 적수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태상장로가 콧방귀를 뀌었다.
“하하하……!”
임해경은 그 말에 갑자기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임씨세가가 철랑방의 적수가 될 수 있냐고? 이건 알고 있으시오? 철랑방은 이미 반달 전 임씨세가에 굴복했소!”
“뭐라……?”
이번에는 태상장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현재의 철랑방은 천우성 삼대 세력 중 가장 큰 세력으로 입지를 굳혔다.
운씨세가와 임씨세가가 손을 잡는다 해도, 철랑방에 미치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 그 철랑방이 임씨세가에 밀린 것도 모자라, 굴복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 믿기지 않소?”
임해경은 사람들의 반응을 눈에 담으며 냉소를 지었다.
“반달 전, 임씨세가의 소가주님께서 돌아오셨소이다! 월경 1단계인 철랑방주도 소가주님의 일초를 받아내지 못했는데, 당신들이 소가주님의 무위를 짐작할 수 있을까! 그들이 임씨세가의 산하로 들어온 것도 모두 소가주님 덕분이오. 그리고…….”
임해경의 눈이 다시 태상장로에게로 향했다.
“내일 철랑방주에게 긴장해야 할 것이오. 우리 소가주님의 힘으로, 철랑방주는 월경 2단계에 올랐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태상장로의 눈에는 깊은 걱정이 깃들었다.
원래 그는 철랑방주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자신보다 한 단계 아래인 데다, 그사이에 무위를 올릴 거라곤 예상치 못했으니까.
사실 철랑방주보다도, 그의 뒤에 있는 임위의 존재가 두려웠다.
일초에 월경 1단계인 철랑방주를 쓰러트리고, 철랑방주를 단기간에 월경 2단계로 끌어올리다니……. 임위가 이 정도로 두려운 적이 있었던가?
“소가주님의 실력이라면 이 자리를 허허벌판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소. 하지만 당신들이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은, 오직 소가주님이 운청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이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지, 그렇고말고. 이번 혼담도 소가주님의 지시오. 상대도 직접 선택하셨지! ……크크. 운비비가 철랑방의 그 졸부 자식들에게 더럽혀진 걸 알면, 돌아온 운청휘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하고 계신다오!”
임해경이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전각바깥의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때가 되었군.”
임해경이 갑자기 바닥에서 일어났다.
“내가 죽음을 받아들였으니 이리 초연한 줄 알았소? 크크, 나도 그럴 거라 생각했소만…… 멍청한 놈들이 내게 살길을 열어주는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가 밖에서 땅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다그닥 다그닥!
소리의 기세를 보아 적어도 100여 필의 말이 동시에 달려오는 듯했다.
“철랑방의 소방주가 부친의 명을 받아 운씨세가의 여식 운비비를 데리러 왔소이다!”
멀리서부터, 잔뜩 거드름을 피우는 목소리가 전각 안까지 들려왔다.
상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운씨세가의 사람들도 혼수로 요구한 오인철 광산에 정신이 팔려 정작 상대를 알아볼 엄두를 못 내고 있던 터였다.
“흑낙이라 하였소? 하하하! 아직 듣지 못한 건가! 흑괴, 그 늙은 놈이 말을 못 한 것이겠지!”
“무슨 소리냐? 그 뜻은 비비의 결혼 상대가……?”
“맞소! 철랑방의 방주 흑괴가 그 결혼 상대요!”
임해경이 운한의 말을 끊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철랑방에서도 도착했으니, 나도 더 머물 이유가 없군.”
임해경이 말을 마치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러나 태상장로가 먼저 움직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수십 년을 운씨세가에 숨어 있던 것도 모자라, 지금 온전히 떠날 수 있다고 보느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임해경의 정수리를 향해 태상장로의 일장이 날아들었다.
대답은 없었다. 임해경의 몸은 그 자리에서 허물어져 내렸으므로.
일 다경 후.
대오를 이룬 100여 명의 철랑방 무사들이 전각의 문 앞까지 도달했다.
전각 안에서도 그들의 넘실대는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살생의 길을 걸어온 이들답게, 문 너머의 기세가 흉흉했다.
“모두 밖에서 대기하라! 대 당주, 이 당주는 따라 들어오도록!”
황금색 갑옷을 입은 청년이 수하들에게 분부를 마치고, 환갑이 넘은 노인 둘을 데리고 운씨세가의 전각에 들어섰다.
“만약 이 후배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노선배께서 운씨세가의 태상장로시지요?”
황금색 갑옷을 입은 청년의 시선이 태상장로에게로 향했다.
“운한 가주, 보아하니 아직 정신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이어서 청년의 시선이 운한의 몸으로 옮겨졌다.
“음?”
운한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청년의 아미가 구겨졌다.
“임해경이 죽었어?”
그는 임해경의 시체 앞으로 걸어가 허리를 숙여 살펴보았다.
“아직 시체가 따뜻한 걸 보아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황금색 갑옷을 입은 청년의 눈빛이 갑자기 차갑게 가라앉았다.
“채 일 다경도 안됐군. 그 말은…… 내가 온 걸 알면서도 임해경을 죽인 거요?”
청년은 차가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사람들은 마치 독사의 눈을 마주 본 것처럼 저마다 흠칫 몸을 떨었다.
청년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운한에게로 향했다.
“운한 가주, 단도직입으로 말하겠소. 누가 임해경을 죽였소? 어서 나와 내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하시오. 그러면 운씨세가의 죄는 면해주겠소!”
전각에 들어섰을 때부터, 청년의 태도는 안하무인이었다. 태상장로와 운한을 대할 때도 말투에 거만함이 배여 있었다. 운씨세가 사람들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흑낙, 정당히 해라, 여긴 운씨세가야!”
“흑낙, 임해경은 운씨세가에 수십 년을 숨어있던 간자다. 가주님을 기습하기까지 했으니, 마땅히 운씨세가에서 처벌하는 것이 옳다!”
“건방진! 이 미천한 놈들이 감히 소방주님의 존함을 입에 담는 것이냐!”
흑낙의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노인이 벌컥 화를 내더니,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운씨세가의 두 사람을 사로잡았다.
콰득! 콰득!
잡힌 두 사람의 목이 부러졌다.
“죽음을 부르는구나!”
별안간 일어난 사태에, 태상장로의 눈에서 살기가 폭발했다. 이어 섬뜩한 살초가 그의 손에서 펼쳐졌다.
“늙은이, 해보겠다는 거냐?”
흑낙이 데려온 노인들은 무서워하기는커녕 음습한 눈으로 태상장로를 바라보았다.
“이것도 나름 괜찮겠군. 우리가 먼저 방주님 대신 너의 실력을 봐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