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펑! 펑! 펑!
숨을 한 번 내쉬기도 전에, 세 노인은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사방으로 불꽃이 튀고, 먼지가 일었다.
끊이지 않는 타격음에 공기가 불길하게 일렁였다.
전각의 사방으로 퍼져나간 공격의 여파는 사람들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몸을 피할 엄두도 못 내고 넋이 빠져 지켜보고 있었다.
월경에 접어든 강자의 전투가 이러한가. 눈으로 좇기도 어려운 움직임이었다.
“늙은이, 소문에는 월경 2단계라고 하던데? 겨우 이 정도인가?”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군! 설마 운씨세가에서 일부러 그렇게 소문낸 것인가?”
흑낙을 따라온 두 노인의 하찮다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네 놈을 상대하기 위해 왕급상품의 보검도 가져왔건만, 이제 보니 검을 뽑을 필요도 없겠어!”
태상장로는 대답 대신 코웃음으로 답했다.
전투는 시간이 지날수록 치열해졌다.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는 셋의 그림자가 서로 뒤엉켰다가, 잠시간 떨어졌다가, 또다시 들러붙어 어지럽게 춤을 추는 듯했다.
그러나 전각을 뒤흔드는 여파는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이게 월경 2단계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구나! 허세에 지나지 않아!”
“방주님은 나설 필요도 없겠어, 이 자리에서 죽여주마!”
우위를 점한 두 노인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들이 보기에, 일 다경 내로 태상장로의 목숨을 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 다경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몇 번의 손속이 뒤섞이자 두 노인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강렬한 위기감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한 노인이 다급히 외쳤다.
“빨리, 빨리 보검을 뽑아! 저 늙은이, 일부러 무위를 숨기고 있었어!”
“이제 와서? 늦지 않았느냐?”
그때, 묵묵히 전투에 임하던 태상장로의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두 노인의 왼쪽 가슴에 장법이 내리꽂혔다.
쿵! 쿵!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한 영력이 그대로 두 노인의 심장을 관통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두 구의 시체가 전각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들의 말대로, 태상장로는 실력을 다 드러내지 않았다. 두 노인이 보검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실력을 드러냈다면,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보검을 꺼내 휘둘렀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는 태상장로도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방금 노부더러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 했느냐?”
태상장로가 몸을 홱 돌리며 서늘한 눈빛으로 철랑방의 소방주 흑낙을 노려보았다.
***
그 시각, 흉수산맥.
운청휘와 기령이 세가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운청휘의 직감, 선제의 직감이 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지금, 운씨세가는 위험에 처했다.
***
철랑방 소방주 흑낙은 황망한 눈으로 태상장로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데려온 두 노인은 월경 1단계의 고수였다.
철랑방 내에서는 방주 다음으로 강하며, 한 명은 왕급상품의 보검도 지니고 있었다. 비록 한 번 뽑아 보지도 못하고 시체의 품에 안겨 있었지만.
그들을 믿고 지금껏 안하무인으로 굴었던 흑낙이었지만, 지금은 바람 앞의 촛불과 다름없는 신세였다.
“선…… 선배님, 오, 오해십니다…….”
흑낙이 몸을 덜덜 떨며 겨우 말을 뱉었다. 태상장로의 말에 놀랐다기보다는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월경 고수의 기세에 눌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오해? 허허, 이놈, 방금 임해경을 죽인 자는 네놈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 하지 않았느냐? 노부가 바로 임해경을 죽인 자다!”
태상장로가 살기를 품은 눈으로 흑낙을 노려보며 말했다.
“분명……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하, 하지만 그때는 노선배이신 줄을 몰랐습니다. 만약 알았다면 감히 제가 원망하였겠습니까?”
월경 2단계 고수의 기세에 눌려 덜덜 떨었지만, 정작 흑낙은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태상장로는 자신을 죽이지 않을 터였다. 정확히는 ‘지금’ 죽이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임씨세가의 지시를 받은 철랑방은 운씨세가를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임씨세가는 운씨세가의 사람들이 되도록 오랫동안 공포에 떨며 죽어가는 편을 원했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이 운씨세가에 품은 분노가 누그러들 것 같았으니까.
다만 시간을 끈다면, 운씨세가에도 기회가 있다. 그에 따른 변수가 생길 터이므로.
태상장로는 가만히 흑낙을 주시하며 저울질했다.
만약 흑낙을 이 자리에서 죽인다면, 부친인 흑괴는 임씨세가의 지시를 생각할 겨를이 없을 터.
철랑방의 무인 전원이 운씨세가를 습격해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남는다.
“지금 노부가 너를 죽이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거냐?”
하지만 태상장로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하하. 노선배의 체면을 생각해 말하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노선배가 먼저 꺼내셨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흑낙이 태상장로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말했다.
“맞다, 노부는 네놈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태상장로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살기를 일으키며 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저놈들에겐 노부가 본보기를 보여야겠다.”
그 말과 함께, 태상장로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한 호흡도 지나지 않아, 전각 밖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흑낙이 데려온 100여 명의 무인은 모두 산전수전을 겪은 철랑방의 정예였으나, 월경 2단계의 고수인 태상장로에겐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이 늙은이가! 멈춰라! 철랑방의 복수가 두렵지 않으냐! 멈추지 않으면 네놈의 십족(十族)을 멸해 버릴 것이다!”
흑낙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 댔다.
귀중한 정예를 곡식 추수하듯 거침없이 베어 넘기니, 눈에 뵈는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태상장로는 멈추지 않았다.
주인을 잃은 말들이 겁을 먹고 투레질을 했지만, 이내 말들까지 태상장로의 손에 목숨을 잃으며 잠잠해졌다.
“흑괴에게 전하거라. 내일의 생사결(生死之鬥)에서, 노부가 놈의 목을 취하겠다고!”
서릿발 같은 음성과 함께, 흑낙의 눈앞에 태상장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흑낙의 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전각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허수아비처럼 내던져진 흑낙은 수백 장을 날아가 세가 밖 길거리에 나동그라졌다.
푸학!
흑낙의 입에서 선혈이 왈칵 뿜어져 나왔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참으로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아아악! 이 늙은이, 죽여주마…… 네놈도 운씨세가도 전부 죽여주마! 아아악!”
“가주. 잠시 노부와 함께 가셔야겠소. 나머지는…… 내일이 되기 전까지 세가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말거라!”
세가 밖에서 흑낙이 고래고래 악을 썼지만, 태상장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운한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운씨세가의 밀실.
“가주님, 태상장로님……. 죄송합니다.”
밀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노총관이 두 사람을 보자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결국…….”
그 말에 태상장로와 운한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시간이 흘렀다고 이제는 세가의 생사도 외면하는 것인가…….”
태상장로가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그래, 물은 아래로 흐르고 사람은 높은 곳으로 향한단 말이지…… 황성의 본가에 줄을 댔으니, 이 보잘것없는 천우성의 운씨세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거지!”
운한은 말이 없었다. 그저 꽉 쥔 두 주먹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태상장로님, 가주님, 오해십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노가주님이 가문의 위기에 나서지 못하시는 것은 이번에 노가주님과 같이 돌아온 자들 중에 본가의 소가주도 있어서입니다. 그자가 노가주님을 막고 있습니다.”
노총관이 급히 해명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본가의 소가주가 말하기를, 운씨세가를 돕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 조건이…… 운청휘 도련님을 그자의 무시(武侍)로 삼겠다고…….”
운한이 갑자기 분노하며 호통쳤다.
“청휘를 무시로 삼아? 감히, 그자가 말이더냐! 본가의 도련님이 아니라 황실의 태자라도, 청휘를 무시로 삼을 수 없다! 연단술사와 진법대사라는 신분만으로도, 청휘는 누구의 시중을 들 녀석이 아니다! 청휘의 성격에 그럴 바엔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야!”
운한과는 다르게 태상장로는 얼굴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노총관을 바라보았다.
“본가의 도련님이 진정 그렇게 말했단 말이냐?”
노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태상장로님, 왜 그러십니까?”
운한이 급히 태상장로에게 물었다.
노총관의 대답을 들은 태상장로가 그사이 몇 년은 더 늙어 보였다.
“가주, 이 말을 해줄 때가 된 것 같소.”
태상장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황성의 본가는 세대마다 방계의 세가에서 무시를 차출하는 관습이 있소. 그 무시는 세가에서 가장 출중해야 하는 동시에 소가주, 혹은 당대 가주여야 하오. 50년 전, 부친이 갑자기 가주 자리를 내려놓은 일을 기억하시오? 그때도 마찬가지로…… 본가에 가기 위함이었소. 본가의 어느 도련님 눈에 든 게지. 천우성의 운씨세가뿐만 아니라 다른 방계의 세가들도 세대마다 무시로 선택된 이들을 황성으로 보낸다오.”
그 말에 운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상장로를 바라보았다.
“거절하면 어떻게 됩니까?”
“거절?”
태상장로가 쓴웃음을 지었다.
“낙극성의 운씨세가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황성의 방계 세가였소. ……30년 전 그들은 본가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하룻밤 사이에 멸문을 당했소.”
멸문? 운한이 갑자기 몸서리를 쳤다.
“모두 운씨 성에 같은 피가 흐르는데 그렇게 쉽게 멸문을 결정하는 겁니까?”
태상장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가주가 몰라서 하는 소리요. 본가에 있어 방계의 피는 그저 가축만도 못한 것이오. 오직 그자들, 본가의 몸에 흐르는 피만이 고귀한 운씨 가문의 피인 것이라오.”
엽씨세가, 상관세가, 구양세가, 마지막으로 운씨세가. 이들은 황성의 사대 가문으로서 황실 다음으로 위세를 떨치는 세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