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그들은 발 한번 구르는 것으로 천원왕조에 지진을 일으킬 수도 있다. 오죽하면 네 세가가 힘을 합하면 새로운 황실을 세울 수 있다고 할까.
이곳 천우성의 삼대 세력 중 하나인 운씨세가도, 그저 황성 운씨세가의 방계 중 하나일 뿐이었다.
“청휘의 성정에 죽어도 본가에 무시로 가려고 하지 않을 것인데…….”
“그저 녀석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래야지…….”
***
운청휘는 쉴 새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흉수산맥을 내달리는 동안 불안함이 점점 더 엄습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운씨세가가 멸문지화를 당해 한 줌 재만 남을 듯한 불안함이, 계속해서 운청휘의 등을 채찍질했다.
어떠한 근거도 없는, 그저 직감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선제의 직감은 한 번도 운청휘를 배신한 적이 없다. 운청휘 또한 자신의 직감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황혼이 산등성이를 붉게 물들일 무렵, 운청휘는 남은 거리를 계산했다. 앞으로 삼천 장 정도만 더 가면, 흉수산맥을 벗어날 수 있다. 이 속도라면 흉수산맥을 벗어나고 반나절 정도만 더 가면 천우성에 발을 디딜 수 있을 터였다.
계산을 마친 순간, 운청휘는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에 몸을 돌렸다.
기령 또한 위기감을 느낀 듯 털을 빳빳이 세우며 이를 드러내었다.
언제라도 전투에 돌입할 준비가 되어 있는 둘을 향해, 어둑해진 산림 저편에서 그림자 하나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범이 도약하듯 내달리는 그림자 또한 어찌나 빠르던지, 어느새 삼십여 장 떨어진 거리까지 좁혀들며 주홍빛 노을에 물든 긴 머리칼을 흩날렸다.
긴 백의 무복을 입은 늘씬한 여인이었다. 한 손에 먹색의 긴 활을 들고, 등에는 먹색 화살이 담긴 화살통을 멘 여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러나 무심한 그 표정마저 장인이 혼을 담아 빚어낸 도기처럼 매끄럽고 찬란했다.
“음?”
운청휘의 동공이 수축했다.
그녀의 외모에 감탄해서가 아니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이 여인의 무위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선제가 된 후로, 운청휘가 무위를 가늠할 수 없는 존재는 오직 아홉 선제들과 혼돈 영수인 기령뿐이었으니.
놀라기는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또한 눈앞의 운청휘를 보며 무위를 읽어낼 수 없었고, 그의 어깨에 앉아 있는 영수도 안개 속에 있는 듯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난 청연지심화가 필요해.”
잠시 둘을 훑어보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맑고 청량한 목소리였지만,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청연지심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호기심을 참지 못한 운청휘가 묻자, 여인은 대답 대신 품에서 지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낡고 너덜거리는 지도 위에 운청휘가 청연지심화를 얻은 장소가 표시되어 있었다.
운청휘가 급히 아공간 행낭을 들춰보았으나, 지도가 잡히지 않았다.
“지도에 낙인을 찍어 두었거든. 천리 내에만 있다면, 원할 때 언제든 되찾을 수 있어.”
여인이 천천히 말했다.
“그런가. 일부러 지도를 흘린 거로군. 진법을 풀 힘이 없으니, 지도를 흘려 누군가가 진법을 풀면 뒤를 칠 생각이었군.”
“그래.”
여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청연지심화가 필요해, 내놔.”
“애석하게도, 나는 입안에 들어온 것을 뱉는 습관은 없다.”
운청휘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필요한 거란 말야!”
여인은 아름다운 얼굴을 굳히며 침음했다.
“이렇게 된 이상, 싸워서라도 가져가는 수밖에!”
여인이 화살 하나를 활에 메겨 시위를 당기더니, 운청휘를 조준했다. 비록 싸우는 일이 달갑진 않아도, 필요하다면 싸우겠다는 자세였다.
그 순간, 운청휘는 머리칼이 곤두서며 두피가 저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저 여인의 활, 절대 참천신검의 검집에 견주어 밀리지 않을 터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천성대륙, 참천신검과 같은 신보가 흔한 곳이 아니다. 선계라면 모를까.
윙!
그때, 운청휘의 등에서 검집이 울어대더니 그가 부르기도 전에 손아귀에서 검집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집을 손에 쥐자 불쾌하게 머리칼이 곤두서는 느낌이 사그라들었다.
“대체 너는 누구냐?”
“너는 도대체 누구야?”
둘은 거의 동시에 서로에게 물었다.
서로의 실력이 가늠되지 않을뿐더러, 서로의 수법에 놀라고 있었다.
운청휘도 여인도, 살면서 자신이 가늠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진 이들을 마주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마주쳤으니, 그 놀라움이 오죽 클까.
“만약 우리가 싸운다면, 대가가 매우 크겠군. 어쩌면…… 둘 다 감당이 안 될지도 모르겠어!”
운청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도 싸우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난 청연지심화가 필요해. 내놓지 않는다면……, 싸울 수밖에!”
여인이 대답했다.
그녀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싸우기 싫어도 그럴 수 없다는 것처럼 들렸다.
다만 그녀의 말투에는 여전히 감정이 하나도 묻어있지 않았다.
“더는 못 봐주겠군. 마지막으로 경고하지. 내 손아귀에 들어온 것을 돌려주는 습관은 없다. 더욱이 너와 어울릴 시간도 없지. 그래도 싸우겠다면, 둘 중 하나가 죽기 전까지 멈출 수 없겠지.”
운청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터. 결과를 감당할 수 있겠나?”
“그럼 싸울 수밖에!”
“좋다!”
더 이상의 말을 주고받을 것도 없었다. 두 그림자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쾅쾅!
찰나의 순간, 둘은 이미 한데 엉켜 공격을 주고받았다.
초식이 부딪칠 때마다 주변의 나무들이 휘청거렸다.
두 사람이 펼치는 초식 하나하나가 모두 완성된 경지에 가까웠다.
한 호흡이 끝나기 전에 수천 번의 공격이 오가며, 뒤늦은 여파가 대지에 육중한 떨림을 일으켰다.
***
일 다경도 지나지 않아, 반경 삼백여 장의 산림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뿌리가 드러난 나무들이 여기저기 겹쳐 쓰러진 모습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기령은 운청휘와 여인의 전투를 주시하고 있었다.
기령의 눈에 감탄과 경악이 스쳐 갔다.
여인의 무위도 운청휘와 같은 성경 단계다.
그러나 같은 단계라면 가볍게 제압당했던 그간의 적수들과 달리, 여인은 운청휘와 대등하게 맞서고 있었다.
기령은 눈앞에 일어나는 전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운청휘가 강한 것은 그가 선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여인은? 그녀의 무위와 무공은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넌 대체 누구냐?”
“너는 도대체 누구야?”
격렬한 결투 중에도 운청휘와 그녀는 서로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상대방에게 물었다.
전투를 하기 전에도 물었던 말들의 반복이었다.
좀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는 운청휘지만, 그만큼 놀랐다는 방증이었다. 그것은 여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나는 청연지심화만 있으면 돼!”
“나도 손에 들어온 걸 포기할 수는 없군!”
잠시 멈추었던 둘은 다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운청휘의 주먹이 날카롭게 공기를 찢어내며 음폭(音爆)을 만들어 냈다. 운청휘를 감싼 공기가 성난 파도처럼 물결치며 여인의 몸에 적중했다.
쿵!
여인은 뒤로 몇 장 밀려났지만 눈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었다. 그 대신, 감정을 찾아볼 수 없던 눈동자에 진중함이 스쳤다.
이어 여인이 일장을 뻗어내자 기이하게도 공간이 휘어지며 충격파가 운청휘를 덮쳐갔다. 영력이 담기지 않은 공격임에도 위력적이었다.
운청휘는 급히 뒤로 피했지만 충격파를 피하기엔 늦었다.
충격파가 적중한 몸이 허공에서 빙글 돌아 겨우 지면에 착지했다.
그 역시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이었다. 다만 여파를 입은 주변만이 본래의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로 폐허가 되어갔다.
“야옹…….”
기령은 아연해하여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둘의 전투는 성경의 사성에 이른 이들의 일전이었다.
전투의 격렬함과 화려함을 본다면 선천생령들도 그들에 미치지 못할 터였다.
아무렇게나 펼치는 듯한 초식들마저 하나하나가 계산을 끝마친 것들이었다.
호흡 하나, 눈빛 한 번까지도 승패의 갈림길이 될 수 있었다. 진정한 사성 고수들의 결투란, 그런 것이다.
반 시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러나 둘의 얼굴에 지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치열하게 주고받는 공격이 대지를 무자비하게 할퀴고 공기를 갈랐다.
처음에는 서로의 무위를 알 수 없었다. 반 시진에 걸친 전투로, 운청휘와 여인은 서로의 무위가 성경 8단계이리라 짐작했다.
그 와중에도 약속이나 한 듯, 둘 다 검집과 활을 꺼내 들지 않았다.
다만 전투가 끝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비장의 한 수를 꺼내야 한다.
운청휘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의 직감은 끊임없이 운씨세가에 큰일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당장 천우성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청연지심화를 포기할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운청휘도 잘 알고 있다.
그 또한 청연지심화를 내놓을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이 싸움은 무조건 승부를 내야 했다.
“한 번에 끝내자!”
“한 번에 끝내자꾸나!”
운청휘와 여인은 동시에 침묵했다가, 몇 번의 공방이 오간 후 동시에 입을 열었다.
둘의 시선이 뜻하지 않게 마주쳤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공통점이 많았다.
캉!
캉!
둘은 동시에 각자의 병기를 뽑아 땅에 꽂아 넣었다.
이윽고, 두 개의 안도하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격렬한 싸움을 하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은 오지 않는다.
여인도 운청휘도, 같은 생각을 한 터였다.
마음만 먹으면 여인과 동귀어진할 방법이 열 가지는 있었지만, 운청휘는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싸우더라도, 서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지는 않아야 했다.
기령을 나서지 못하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누가 이기든 운청휘와 여인은 결과를 받아들이겠지만, 제삼자가 끼어들면 결과를 알 수 없게 된다.
위잉! 위잉!
같은 생각을 한 둘에게서, 폭발할 듯한 기세가 흘러넘쳤다.
운청휘의 머리카락과 붉은 장포가 춤을 추듯 나부꼈다.
이전보다도 그에게서 위엄이 묻어나며 선계 전체를 호령하던 선제가 다시 현신한 듯했다.
여인의 기세는 운청휘처럼 패도적이진 않았으나, 기이할 정도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한 세계를 빚어낸 조물주가 심판을 내리는 듯한 공포만이 여인에게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