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회색 하늘과 암흑의 대지 사이,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에 이염죽이 서 있었다.
무수한 영혼들은 그녀의 인솔하에 차근차근 통로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곳은 왕생 통로로, 진짜 저승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었다.
별안간 멀리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분홍색 옷을 입은 두 소녀가 쏜살같이 날아와 대열을 흐트러트렸다.
두 소녀는 통로에 접어들었는데, 별안간 거대한 손이 그녀들을 잡고 들어 올렸다.
“껄껄껄…….”
거대한 손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지독한 살기가 배어 있었다. 마치 손 자체가 의지를 지닌 것처럼 날카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손아귀에 붙들린 두 소녀의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저승의 왕!”
이염죽의 안색이 변했고, 황급히 활시위를 당겨 파신전을 발사했다.
“꺼져!”
큰 손이 반격했고, 파신전을 날려 버리고 소녀에게 계속 달려들었다.
이염죽이 저승의 불을 일으켜 핏빛의 거대한 손에게 덤벼들었다.
“아……!”
저승의 불에 휩싸이자, 큰 손이 비명을 질렀다.
“저승의 불을 수복했단 말이냐? 그러나, 너무 약해. 짐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없단 말이다!”
이염죽은 황급히 양손에 저승의 불과 청연지심화를 피워 올리고 핏빛 큰 손을 공격해 들어갔다.
“저승의 주인. 당신은 경계를 넘었어. 여기는 당신의 근거지가 아니야!”
이염죽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개의 천화는 동시에 핏빛의 거대한 손에 직격했다.
-다, 당신에게서 청휘 오라버니의 기가 느껴지는군요!
이염죽은 두 소녀를 살필 겨를도 없이, 묵색 장궁의 활시위를 당겼다.
“아……!”
핏빛의 거대한 손이 비명을 지른 순간, 소녀 한 명이 발버둥을 쳐 겨우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소녀는 이염죽의 몸으로 달려들었다.
“짐은 그대의 기를 기억하겠다. 오늘의 치욕은 짐이 인간 세계에 가서 갚아주마!”
핏빛의 거대한 손이 물러나며, 한 소녀를 기어이 데리고 통로 너머로 사라졌다.
끌려간 소녀는 채아의 ‘미움’이었다.
“어찌하여 채아가…….”
운청휘의 몸이 휘청거리며 자신도 모르게 세 걸음이나 뒷걸음질쳤다.
그녀의 몸에 청연지심화가 있고, 운청휘의 낙인이 있어 채아가 자연스레 이끌리듯 이염죽에게 달려든 것이다.
“운청휘, 아직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어?”
이염죽의 곧은 눈빛이 자신을 직시하자, 운청휘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잠시 침묵 끝에, 운청휘가 입을 열었다.
“저승의 주인은 무위가 어땠지?”
“인간의 인왕경(人王境)!”
이염죽이 짧게 대답했다.
운청휘는 또다시 침묵했다. 말을 하려고 해도, 선뜻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결국 운청휘는 입을 열었다.
“채아의 ‘미움’을 찾아오면, 그대에게 있는…… ‘사랑’을 어찌할지 생각해 보지.”
“고려할 필요 없어!”
이염죽이 웃었다. 그녀의 미간에서 한 줄기 빛이 떠오르더니 그대로 그녀의 몸을 빠져나왔다.
이는 채아의 ‘사랑’이었다.
채아의 ‘사랑’은 그대로 이염죽을 떠나 채아의 몸으로 들어갔다.
이염죽이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오지 마!”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으스스한 화염이 치솟더니 운청휘의 접근을 막았다.
“감정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 깨졌으니, 의지가 흩어졌어……. 난 다시 돌아가야 해!”
말을 하는 이염죽의 눈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
그녀가 손에 든 묵색 장궁을 당기자, 파신전이 허공을 가르며 공간의 틈을 만들어 내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힘껏 솟구쳐 공간의 틈으로 뛰어들었다.
공간의 틈새로 바람이 부는 절벽, 장신연이 보였다.
장신연으로 돌아간 후, 이염죽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었다.
그녀의 고운 눈가를 타고 핏빛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금껏 그녀의 목표는 강해지고 또 강해지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가족의 참상을 밝혀내고 그들을 부활시킬 수 없으니.
뜻밖에도 운청휘가 그녀에게 마음을 밝혔지만, 그녀는 조금의 동요도 일으키지 않았다.
감정을 없애는 수련을 해온 그녀는 텅 빈 그릇과도 같았다.
그런데 하필 그 그릇에, 채아의 ‘사랑’이 가득 채워지고 말았다.
엄밀히 말하면 이염죽에게는 몹시도 불공평한 상황이었다.
운청휘를 향한 마음이 인생의 목표가 된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무엇보다 그녀에게 깃든 ‘사랑’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는가.
-주인님, 저자가 주인님을 저버렸으니 그에게 고통을 주어야 합니다. 그의 모든 가족을 죽여 그의 영혼을 영원한 후회 속에 살게 하는 겁니다!
바로 이때, 이염죽 몸의 저승의 불이 악랄하게 말했다.
“닥쳐!”
이염죽이 호통을 쳤고, 저승의 불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비명을 질렀다.
-아악!
“그가 나를 저버렸기 때문에 증오할 뿐이지, 다른 감정은 없어. 그러니 운청휘에 대해 무례한 발언을 하면, 네 의식을 지워 버리겠어.”
이염죽이 눈에 보일 정도로 짙은 살기를 드러내자, 저승의 불은 급히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운청휘는 다시 두 몸으로 나누었다.
거수가 환화한 몸은 채아를 지키고, 다른 몸은 저승으로 향했다.
이염죽이 저승의 불을 수복한 후, 죽음의 기는 옅어지고 인세와 비슷해 보였지만 지하는 여전한 암흑으로 가득했다.
왕생 통로에 도달해 신식을 펼치던 운청휘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왕생 통로가 공간 통로라니…….”
공간 통로는 절세의 무위를 지닌 이가 공간에 강제로 개척한 통로로, 운청휘도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으나 그것은 틈에 가까웠다.
“이 공간은 천성대륙으로 넘어갈 때보다 열 배 이상 튼튼하군. 최소 진선을 뛰어넘는 무위가 있어야 이 통로를 개척할 수 있겠구나.”
그가 혼잣말을 하며 신식을 펼쳐 왕생 통로 너머로 보냈다.
신식을 계속해서 확장하고 나아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신식을 펼쳤음에도 왕생 통로는 끝이 나지 않았다.
“뭔가 있군.”
그때, 별안간 핏빛의 거대한 손이 통로의 끝에서 불쑥 나타나 휘적거렸다.
운청휘는 그 손의 정체를 알고 급히 신식을 거두며 검집을 뽑아들었다.
“선제진해 제1식, 횡추팔황!”“또 인간 세계의 도둑이냐. 짐의 저승이 네놈들이 노는 곳인 줄 아는 게냐?”
핏빛 손의 주인은 몹시도 분노한 듯 포효를 내지르더니 곧 운청휘의 ‘횡추팔황’에 정면으로 부닥쳐왔다.
콰르릉!
출구에서 굉음과 함께 통로 전체에 큰 진동이 일었다.
“저승의 주인 따위가, 감히 본제 앞에서 짐이라 칭하느냐?”
운청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검집을 휘둘렀다.
투욱!
거대한 손의 엄지가 잘리더니, 마치 산이 무너진 듯한 소리가 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엄지의 크기만으로도 삼십여 장은 족히 될 듯했다.
기이한 것은, 엄지가 땅에 떨어지자마자 핏물로 변하여 지하로 스며들었다는 점이다.
“천인오쇠!”
운청휘는 곧바로 천인오쇠를 방출했고, 천인오쇠는 순식간에 핏빛의 거대한 손을 가두었다.
“질서, 도덕, 인애!”
이어 세 줄기의 금빛이 마치 창처럼 손에 내리꽂혔다.
“아아아……!”
질서와 도덕, 인애는 끝없는 우주를 대표하는 힘이니 모든 사악함을 억누를 수 있었다.
과연, 핏빛의 손은 사악한 피가 뭉쳐 만들어진 것인지 금빛 줄기에 닿은 부분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 비열한 놈, 천만 영혼의 피로 단조한 손을 파괴하다니! 인간 세계로 넘어가 반드시 치욕을 갚아 주마!”
핏빛의 큰 손은 녹아내리면서도 위협을 멈추지 않았다.
“괴신 따위가 인간 세계를 꿈꾸는 게냐? 본제에게 무릎 꿇거라!”
운청휘는 단번에 선제의 위압을 방출했다. 핏빛의 손이 마치 엎드려 절하듯 손가락을 구부리고 말았다.
“영혼저주!”
운청휘가 선제의 정혈을 한 방울 꺼내어, 핏빛 손에 밀어넣었다.
“아, 인간이여, 무슨 기술이길래 지…… 짐의 영혼을 다치게 할 수 있는 게냐?”
핏빛의 손이 두려운 목소리를 내었다.
운청휘의 이 기술은 억만리 밖에 있는 저승의 주인에게 직접 닿아, 그의 영혼을 부식시키기 시작했다.
“그 여인을 풀어주거라. 그렇지 않으면 본제가 영혼을 파멸시켜 주마!”
운청휘가 한 손을 휘둘러 허공에 분홍색 옷을 입은 소녀의 모습을 띄웠다.
채아의 ‘미움’이었다.
“그녀를 위해 온 건가?”
핏빛 손이 잠시 말이 없더니 곧 크게 비웃기 시작했다.
“당치도 않은 소리! 인간의 육신을 단조하려면 일곱 개의 혼이 필요하지. 이 여인은 구음한맥인 데다 ‘미움’이니, 짐의 주 영혼이 될 자격이 있다.”
핏빛 손은 재차 말을 이었다.
“아쉽게도 ‘사랑’은 다른 인간에게 빼앗겼지. 최대 1~2년은 인간 세계로 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단 말이다!”
저승은 모든 생령이 죽고난 후 영혼이 가는 곳이다.
듣기 좋은 말로는 영혼이라 부르지만, 속된 말로는 귀(鬼)일 뿐이다.
이들을 부리고 통치하는 저승의 주인은 그저 보통의 귀보다 강한 귀에 불과했다.
산 사람이 저승에 들어갈 수 없는 이치처럼 귀들도 인세에 나오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만, 저승의 주인은 감히 인세를 통치하려는 야망이 있었다. 그 첫 걸음이 인간의 육신을 만드는 것이었다.
“짐의 몸이 단련에 성공하면, 그때 반드시 빛을 갚아 주마!”
마지막으로 위협을 가한 핏빛 손은 곧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 핏물을 흩뿌리며 터져 버렸다.
몇억만 리 떨어져 있는지 모를 끝없는 암흑 속. 그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궁전 안에서 혈색 옷을 입은 미녀가 피를 토했다.
“빌어먹을 인간, 감히 짐의 영혼의 힘을 삼 할이나 손상시키다니!”
그 후 3일이 흐르도록 운청휘는 왕생 통로를 지켰다.
일부러 통로로 뛰어들기도 해봤지만, 매번 저승의 밀어내는 힘에 밀려 나올뿐이었다.
어찌해야 이 통로를 넘어 채아의 ‘미움’을 구하러 간단 말인가?
고민하는 그에게 화답하듯, 검집이 윙윙 울기 시작했다.
“참천신검을 찾으면 그 힘으로 저승의 기운을 몰아낼 수 있다는 게냐? 괜찮은 방법이지만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