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화
-상고 유적이 일찍 열리려고 한다!
바로 이때, 기령의 귓가에 운청휘의 음이 들려왔다.
-기령, 전력을 다하도록. 최대한 빠른 속도로 그자를 굴복시켜라.
-상고 유적이 앞당겨서 가동되었어?
기령이 의구심 어린 눈길로 신식을 펼쳤다. 삼천 장 높이의 제단을 얼른 훑어보니, 제단에 새겨진 부적이 살아 있는 듯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일 다경 후면 입구가 열리겠구나.”
기령이 중얼거렸다. 이내 기령은 운청휘의 분부대로, 가토왕의 분신을 꺾을 수 있게끔 전력을 다했다.
구경하던 이들은 기령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기령은 이제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한 환영으로 바뀌어 움직이고 있었다.
기령이 새로운 경지로 자신을 끌어올릴 때마다, 허공에 머무른 신형은 점점 더 늘어났다.
현장에 있던 누구도, 기령이 정말로 분신을 쓰고 있다고 순진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지만.
“아, 저길 좀 봐, 어린 신동의 그림자가 움직여……!”
별안간, 누군가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기령의 몸이 아주 느린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달팽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릿하게 이동하니,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라도 기령의 궤적을 볼 수 있었다.
“어? 이게 무슨 일이지, 가토왕의 분신이 보이지 않는걸?”
어떤 이들의 시선은 가토왕의 분신을 찾아 허공을 사방팔방 헤매고 있었다.
가토왕의 분신은 마지 인간 세상에서 증발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때, 기령이 조롱하듯이 외쳤다.
“어설픈 무위로 복수를 운운해? 사람들의 비웃음거리나 되려고?”
무리들은 기령의 소리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서남쪽 삼백여 장 바깥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기령은 몸을 날려 통통한 발로 가토왕 분신의 얼굴을 밟고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죽이거나 싸우는 것이면 모를까, 이런 방식으로 모욕을 주다니!
얼굴을 밟힌 가토왕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질지언정, 기령에 대한 복수를 멈추지 않겠다 다짐하고 있었다.
“어휴, 감히 날 노려보네? 끝을 봐야겠다 이거야?”
기령의 낭랑한 목소리에 이어, ‘짝’하고 맑은 소리가 울렸다.
기령의 손바닥이 가토왕 분신의 뺨을 매섭게 올려붙인 것이다.
다음 순간, 가토왕 분신의 뺨에는 통통하고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
여기저기서 다급히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 짐승 새끼야……! 본왕은 반드시 네놈을 산채로 찢어 죽이고 말 것이야! 맹세하겠다!”
분노가 극에 달한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가토왕의 분신은 100년 전 인간 인왕경의 매복에 걸려 죽을 뻔한 이후로, 이렇게 분노한 적이 없었다.
“네 체면을 세워 줄 생각이었는데, 죽음이 코앞에 와서도 그 소리야? 좋아, 네가 어떻게 나올지 한번 지켜보겠어!”
기령은 통통한 손바닥으로 가토왕의 분신 얼굴을 잡더니, 사정없이 얼굴을 후려갈겼다.
짝짝짝……!
어찌나 빠르던지, 백 번을 넘게 후려치자 가토왕의 분신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다.
이미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저런 식으로 굴욕을 주다니!”
“배짱이 과한걸!”
“같은 인왕경이라도 저런 식의 굴욕을 주진 않아!”
“저 정도 굴욕을 당했으니, 가토왕은 반드시 어린 신동을 죽이려 들 거야!”
“그래, 저런 굴욕을 당하면 못 참지!”
어느새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경악을 지나, 의구심이 들었다.
대체 기령은 무슨 생각이길래 저토록 모욕을 주고 있단 말인가?
“응? 어서 하늘 위를 보라구……!”
별안간 누가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어느새 기령과 가토왕의 분신은 지면에서부터 삼십 장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그들의 모습도 뚜렷하게 보였다.
이때, 기령이 번개같은 속도로 가토왕 분신의 목을 조르는 게 아닌가?
목을 졸린 분신이 버둥대는 사이, 기령의 주먹이 아랫배에 꽂혔다.
연달아 오는 충격에 가토왕의 분신은 입가에서 피를 흘렸고, 그대로 기령에게 붙들려 끌려내려왔다.
“잔상, 바…… 방금 우리가 본 것은 이전에 남겨둔 잔상이었어!”
“맙소사, 어린 신동의 속도가 이 정도라니…… 진짜 인왕경도 따라 하지 못할 거야!”
“더 과장하고 싶지 않아! 인왕경의 강대함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는데! 하지만 어린 신동의 속도는 확실히 인왕경에 접근했어!”
사람들은 기령의 속도에 놀라 제각기 수군거리고 있었다.
“어린 신동이 이렇게나 빠른데, 무위에서도 인왕경에 엄청나게 근접한 거야!”
“헤헤, 난 어린 신동이 원래 인왕경인데 지금 그저 위장한 거라 생각하고 싶군!”
누군가 무심코 흘린 말이었지만, 단박에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나섰다.
“그래, 어린 신동이 인왕경이라면 모든 일이 설명이 되는구만!”
“하찮은 범인의 식견이로군.”
바로 그때, 사람들의 어수선함을 단번에 정리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대붕족을 비롯한 4대 세력이 모여 있는 곳에서, 한 젊은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인상도 흔했고, 기질도 평범했으며, 걸음걸이도 모난 데가 없었고 옷차림도 무난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담긴 기운만큼은 단순하지 않았고, 천자의 위엄을 담은 듯했다.
누구도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을 정도의 고귀함이 있었다.
“일생의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영변의 짐승이, 범인들의 왕 노릇을 하는구나!”
그 젊은이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흘러나왔다.
자리에 있던 이들이 그 내용을 듣고 저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그 청년이 많은 이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지만, 동시에 의문도 던져 주었다.
일생의 천부적인 재능. 이 말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더욱이 영변경의 짐승이라니, 설마 그들이 보는 어린 신동의 무위가 영변경이라는 뜻일까?
혼란에 빠진 이들과 달리, 기령과 운청휘는 청년의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선제가 아니라면 보통 상황에서는 알아챌 수 없는 기령의 무위를, 저 청년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무엇보다 일생의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말을, 기령과 운청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구성 천교(天骄) 위가 바로 일생의 천부적인 재능이다.
일성 천교, 이성 천교, 삼성 천교 등 거듭 수련하여 마침내 구성 천교에 도달했을 때, 모든 천교는 경계를 뛰어넘어 적을 격파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이론상의 이야기로, 선천경에 도달한 이후 천부적인 재능은 점점 약화된다.
수련의 경계가 뒤로 갈수록 격차가 커지기에, 천부적 재능으로도 따라잡기 힘든 경지에 이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재능이 물 한 그릇이라면 이 그릇의 물을 다른 ‘통’에 옮겨 담으면 눈에 띄게 늘어나는 양을 볼 수 있다.
다만 이 그릇의 물을 ‘우물’에 부으면 어찌 될까? 늘어나는 양은 극히 미미해, 어떤 차이도 없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무인이 선천경에 가기 전 체내에 저장된 힘은 ‘통’에 해당하고, 선천경에 도달한 후의 힘은 ‘우물’에 해당한다.
물 한 그릇, 즉 천부적 재능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다만 이 천부적 재능으로 인해, 하나의 경계를 넘어 적을 격파할 수 있는 선이 결정되는 것이다.
기령과 운청휘가 경계를 뛰어넘어 적을 격파하는 것은 그들이 초월의 기재이기 때문인데, 무위의 향상에 따라 그들의 재능도 향상할 터였다.
조만간 이생의 재능, 삼생의 재능도 나타날 테니, 그들이 최소한 하나의 경계만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게 아니리라.
-운청휘, 어떡하지?
기령이 신식을 사용하여 둔천사 위에 있는 운청휘에게 음을 보냈다.
-확실히 시끄러워졌군.
운청휘도 침착하게 답했다.
저 극히 평범해 보이는 젊은이는 반절 인왕경의 무위를 지녔지만, 천부적 재능을 갖춘 초월의 기재가 아닌가. 전투력에서는 인왕경 다음으로 꼽을 수 있을 터였다.
-돌아와.
운청휘는 기령을 둔천사로 돌아오게 했다.
동시에 그는 둔천사의 조정실에서 모든 진법을 발동했다.
기령은 두말하지 않고 손에 든 가토왕의 분신을 데리고 가장 빠른 속도로 둔천사로 향했다.
“고작 영변경의 짐승이, 본왕의 손아귀를 벗어날 성싶으냐?”
청년의 말투는 차분했으나, 동시에 알 수 없는 싸늘함이 번져 나왔다.
별안간 그의 몸 뒤에서 빼곡한 ‘법원의 힘’이 터져나왔고, 이 힘은 그대로 기령을 덮쳤다.
기령은 솜털이 쭈삣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진정한 인왕경을 눈앞에 둔 듯했다.
“저 젊은이가 법원의 힘을 동원했는데, 서…… 설마 인왕경 분신인가?”
“인왕경 분신? 설마. 어린 신동이 방금 가토왕의 분신을 제압한 걸 못 봤나? 저 청년이 인왕경 분신이라면 싸우지도 않고 도망갈 리가 없지!”
“법원의 힘을 사용할 수 있지만, 인왕경의 분신이 아니라는 건…… 저 평범한 젊은이가 인왕경의 본체라는 뜻이야?”
“그것도 아닐 걸세! 정말로 인왕경이 나섰다면, 어린 신동은 도망갈 시간도 없었을 테니.”
“분신도 아니고 본체도 아니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구경하던 이들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식견으로는 다른 가능성을 제시할 수 없었다.
이때, 8대 가문에서 반절 인왕경 한 명이 비명을 내질렀다.
“저…… 저 젊은이는 영흥제국의 소천사(萧天赐)야!”
“뭐라고?”
“소천사?”
그 세 글자에 자리에 있던 이들이 파리 떼처럼 들끓었다.
반절 인왕경인 이들은 영흥제국에 가 본 적이 있었기에, 소천사의 이름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영흥제국에서의 소천사는 ‘소인왕’이라는 별호를 지녔는데, 비록 경지가 인왕경은 아니지만 ‘인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이다.
즉, 인왕경 다음으로 으뜸가는 실력자이자 인왕 분신이어도 대등하게 겨룰 수 있었다.
소천사는 방금 4대 세력이 모여 있는 곳에서 나왔기에, 다른 세력들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이해하였다.
“홍가 가주와 소천사는 친분이 있습니다. 필시 홍가가 불렀을 테지요.”
“그렇게 간단하지 않네!”
또 다른 반절 인왕경이 말을 이었다.
“홍가 가주가 소천사와 친하지만 소천사가 아무 대가도 없이 나설 리가 없어.”
“홍가가 중간 역할을 하고, 대붕족, 공작족, 풍가가 연합하여 청한 게 아닐까?”
“소천사가 거물이라지만, 4개의 세력이 연합하면 대가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