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19화 (19/254)

일해라, 핫산 (1)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 세상을 혼자 사는 이는 없다.

혈연이든 학연이든 어떻게든 연결되는 지점이 있기 마련이다. 사업가라면 인맥도 하나의 자산처럼 여겨야 한다.

인맥이 좋은 이들은 같은 조건이라도 성공의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직접적인 도움을 바랄 수는 없지만, 네트워크를 통해 소개를 받는 등의 인적 교류가 수월하다는 의미다.

폭풍 같았던 지난 여름날.

내가 얻은 것은 돈보다는 인맥이었다.

오저당의 주막을 찾아온 이는 생각보다 많았고 사는 지역과 가지고 있는 직업도 정말 다양하고 제각각이었다.

정년퇴직 직전의 경찰관.

최전방에 근무 중인 직업 군인.

백화점에서 일한다고 하던 누나들.

그중에는 삼척과 태백에서 건설업과 인테리어 일을 하는 분들도 계셨다.

하지만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오풍리에 사시는 윤 씨 할머님댁의 아드님이 창고 건설도 한다고 들었다.

지금은 아이들 때문에 태백 시내에서 따로 살고 계시나 틈만 나면 마을로 찾아오셔서 술도 몇 차례 함께 마셨다.

[연화 건설 신정배 사장]

처음에는 연화가 딸 이름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이름은 태백시 인근에 있는 연화산에서 따온 거라고 했다.

회사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주변의 평가가 무척 좋은 편이었다.

공사비는 조금 비싼 편이지만,

적어도 장난질을 치진 않는다고 한다.

그걸 다 어디서 들었냐고?

한 다리 건너면 다 알게 되어있다.

좁은 지역 사회인 탓에 안 좋은 소문은 정말 순식간에 퍼지기 마련이다.

오저당도 그런 이유 때문에 평판 관리에 제법 많이 신경 쓰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그곳에 맡길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몇 곳에서 비용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견적을 받았다.

몇 곳의 견적을 받아서 비교하고 있자 수호가 다가와서 그중의 하나를 집었다.

잠시 내용을 살피던 녀석은 금액을 확인하고는 기겁했다. 하필 내가 어린 것을 보고 유독 비싸게 부른 업체였다.

“허얼··· 창고 하나 올리는데 뭐 이렇게 비싸? 도대체 0이 몇 개야?”

생전 처음 보는 단위지?

나도 매번 볼 때마다 놀라.

아직도 억 단위는 익숙하지 않았다.

현재 오저당의 매출도 상당했으나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있고 내 손에 떨어지는 돈은 수천만 원 단위에 불과했다.

더구나 그건 버는 거다.

쓰는 것과는 기분이 완전 다르다.

한방에 몇억씩 태우는 경험은 처음이라 자연스레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것도 물려받은 땅이 있기에 금액이 조금 작게 나오는 거다.

“두고 봐. 이건 시작에 불과할 거야. 앞으로 오저당이 얼마나 커질지 지켜봐.”

“뭘 믿고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냐?”

“다 믿는 구석이 있지.”

슬쩍 향이를 보며 대답했다.

내 비장의 무기는 바로 요정들이다.

녀석들이 없었다면 아마 선생님이 쓰러졌을 때 좌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녀석들이 있기에 더 질 좋은 벽향주를 빚을 수 있는 거라 여겼다.

“너도 의견이 있으면 내봐. 나중에 다 지은 다음에 뒷북치지 말고.”

수호의 의견도 중요하다.

녀석은 현장에서 일하는 멤버다.

내가 놓치는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일하는데 조금이라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미리 확인해놔야 했다.

“여기는 이렇게 렉을 올리고 2단으로 옹기를 배치하는 거는 어때?”

“옹기는 어떻게 올리려고?”

“지게차로 해야지.”

그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향이와 요정이 있다지만,

자주 술의 상태를 확인해야만 한다.

그때마다 옹기를 올리고 내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직접 렉 위에 올라가는 것도 조금 애매했다.

아직은 바닥에 깔아두는 게 편했다.

옹기의 크기를 생각하면 평당 1개씩 놓을 수 있다. 거기에 통로로 쓸 공간을 고려하면 적어도 70개 이상은 가능했다.

그 정도면 지금의 두 배 이상 생산량을 뽑아낼 수 있을 정도이니 충분했다.

하지만 녀석의 말을 무시하진 않았다.

나중에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지는 일이 생기면 수호의 말처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벽향주를 장기 숙성하게 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나는 그 부분을 설명해주었다.

“만약에 벽향주의 생산량이 초과해서 남게 되면 네가 말한 대로 렉을 세우고 오크통을 넣자. 어차피 그건 나중에 해도 문제없잖아.”

“생산량이 초과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어서 보내 달라고 독촉 전화를 받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

“나도 같은 생각이야.”

말이 쉽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까지 생산량을 늘려야 할까.

꾸준하게 생산량을 늘려도 소용없었다.

그나마 얼마 전에 새로 들인 옹기에 벽향주를 빚으면 조금 해소될 것 같았다.

최근 오프라인 반응도 제법 좋았다.

은근히 막걸리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태백 물산에서 기존에 뚫은 막걸리 유통망에 벽향주도 밀어 넣고 있었다.

팔아주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었다.

그 덕분에 더 골치가 아팠다.

이제는 태백 물산에 배정되는 벽향주의 물량도 적지 않은 상황이었다.

경영을 하는 데 있어서 수요 예측이 가장 힘들다더니 이제야 그 말이 실감 났다.

거기에 수호가 한 가지를 더 제안했다.

“그리고 이번에 들이는 옹기는 조금 더 큰 10말짜리도 괜찮을 것 같아.”

“지금 8말짜리도 조마조마한데 우리 둘이서 그 큰 걸 닦을 수 있을까?”

“왜 그걸 우리 둘이 닦아. 창고 완공되면 사람 뽑을 거라고 약속했던 거 잊지 마.”

당연히 잊지 않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벽향주를 우리끼리 빚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10말짜리 옹기와 추가 인력을 요청하는 수호에게 알겠다며 대답했다.

한동안 새로운 창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얼추 마무리될 시점에 나는 책상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일단 이것부터 받아.”

“이건 뭐냐?”

“일종의 보너스랄까. 대단한 거는 아니야.”

분명 대단치 않은 거라 말했지만,

수호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녀석에게는 이게 돈 봉투로 보였나보다.

하지만 수호의 기대와는 달리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지적도였다. 그걸 보는 순간 녀석의 표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푸웁···!”

“이게 웃기냐?”

“일단 내 이야기부터 들어. 네가 하던 조경 이제는 제대로 해봐. 지적도 안에 있는 우리 땅 안에서는 뭘 해도 괜찮아.”

“나 돈 없다. 지금도 간당간당해.”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 그 비용을 따로 챙겨준다는 이야기잖아.”

“아하!”

그제야 수호는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모든 땅을 한 번에 풀어주진 않을 것이다.

오저당의 매출 기록이 갱신될 때마다 조금씩 주변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일종의 동기 부여 용도라는 말을 듣자 수호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돈으로 줘도 되는데···. 그것만큼 확실한 동기 부여가 어디 있겠어.”

“안 그래도 따로 준비해놨거든.”

“역시 주도찬! 나는 너를 언제나 믿고 있었어.”

“아닌 것 같은데, 방금 날 죽일 듯이 노려본 거 내가 봤는데.”

“절대 아닙니다.”

“이게 진짜 네가 받을 성과금이야.”

서랍을 열어 봉투를 하나 더 꺼냈다.

그 안에는 수호에게 줄 성과금 3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나를 믿고 따라와서 4개월 넘게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5만 원권이 두툼하게 들어 있는 봉투 안을 확인한 수호는 놀란 얼굴이었다.

한달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이었다.

“허얼, 이렇게 많이 준다고?”

“대신 월급 인상은 당분간 동결이야. 나도 너랑 똑같이 받는 거 알지? 적어도 1년은 채우고 다시 이야기하자.”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어. 지금은 양조장에 투자할 곳도 많잖아. 나중에 한 번에 정리해줘도 돼.”

창고는 시작에 불과했다.

손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았다.

가을에는 양조장 외벽을 다시 페인팅할 예정이었고 여건이 된다면 입구에 연결된 비포장도로도 조금 손봐야 한다.

장마 기간에 구덩이가 곳곳에 파여서 택배차가 들어오기 너무 힘들어했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양조장 주변에 있는 땅도 더 사들일 생각이야.”

“땅은 왜 사려고?”

“해외에서는 수원지 보호를 위해 인근에 있는 땅도 싹 다 사들이더라. 상류에 축사라도 하나 들어오면 끝장나.”

물이 변하면 방법이 없다.

어떻게든 수질을 유지해야 한다.

과거에 미국에서 머물렀을 때 위스키 증류소를 가족과 함께 가본 적이 있다.

정확하게는 아버지에게 낚인 거였지.

갑자기 켄터키를 로드 트립 일정에 넣을 때부터 뭔가 쎄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지금은 좋은 경험이라 여겼지만,

당시에는 어려서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그때 본 것들은 꽤 인상 깊었다.

미국이 땅덩이가 넓어서 그런가 엄청나게 넓은 대지 위에 양조장 하나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모습은 낭비 같았다.

메이커스 마크 같은 경우.

축구장 570개의 면적이나 되는 땅이 있는데 개발을 전혀 안하고 있었다.

사람의 이빨을 닮아서 투스 레이크(Tooth lake)라 불리는 호수가 훼손될까 우려해서였다.

충분한 이유가 있기는 했다.

버번위스키의 고장인 켄터키.

그곳에는 수많은 증류소가 있다.

예전에는 많은 곳들이 자체 수원을 가지고 있었으나 워낙 많은 술을 빚다 보니 물이 말라버린 곳이 허다했다.

우리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때 들은 이야기를 해주자,

수호는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물이 마르면 벽향주를 빚을 수 없다.

그나마 이쪽에 있는 계곡에서는 우리가 가장 위쪽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작은할아버지가 양조장의 위치 선정을 끝내주게 해놓은 덕분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또 뭐가 있는데?”

“언젠가 우리 오저당도 대형 증류소처럼 투어 프로그램 같은 것을 운영하고 싶어.”

“일종의 마케팅 전략 같은 거냐?”

“충성 고객을 위한 서비스 같은 거지.”

해외에는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곳이 많이 있다. 잭 대니얼스(Jack Daniels)만 하더라도 160년 동안이나 술을 빚었다.

같은 시기에 조선에서는 병인박해가 일어났다지.

우리도 역사가 꽤 깊다.

오저당의 역사는 수십 년이지만,

벽향주는 무려 조선 시대의 술이다.

잘 꾸미면 나름 히스토리가 확실했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스토리텔링이다.

찾아오는 양조장?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조금 더 확장된 구상이 머리에 있었다.

외진 시골에서 별다른 유흥거리도 없이 살다 보니 이런저런 잡생각이 많아졌다.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내가 꿈꾸는 것들에 대한 청사진을 수호에게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당장은 도저히 이뤄낼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거기에 담긴 나의 메시지는 간단한 것이었다.

“복학할 생각은 이제 없구나.”

“그럴 생각이 있었으면 비싼 돈을 들여서 창고를 새로 지을 필요가 없었겠지.”

“나는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간단하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잖아.”

“시간은 넘치도록 많으니 걱정 마.”

“네가 말한 것들이 정말 가능할까?”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앞날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계속 가다 보면 국내 최고의 양조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정도의 희망은 가지고 있었다.

“수십 년이 걸려도 실현 가능할지 모를 이야기지. 그래도 꿈은 클수록 좋잖아.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빡시게 일을 해볼까?”

“무슨 소리야. 오늘 일과는 아까 다 끝났잖아.”

나중에 쓸 누룩도 빚었고,

택배로 보낼 물량도 다 나갔다.

평소라면 그것을 끝으로 쉬러 간다.

두어 시간마다 막걸리를 한 번씩 저어주는 것은 수호와 내가 매일 교대로 하는데 오늘은 내가 담당하는 날이었다.

진짜 할 일이 없을까?

찾아보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새로 들어온 옹기 중에 아직 비어있는 것들도 제법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벽향주를 빚을수록 돈이 된다.

그러니 일을 하자, 핫산!

“비워져 있는 옹기들 많잖아. 어서 빨리 벽향주를 빚어서 채워놔야지.”

“저걸 오늘 다 채우겠다고?”

“지금까지 내가 말한 거를 이루려면 갈 길이 머니 잔말 말고 따라와.”

수호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옹기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해 질 무렵까지 죽도록 일해도 끝내기 어려울 양이다.

그제야 수호는 지금껏 내가 한 모든 말들이 이 순간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놈아! 이렇게 일을 시키려고 지금까지 빌드업을 한 거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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