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해라, 핫산 (3)
호세의 대답은 ‘예스’였다.
그리 오래 생각하지도 않았다.
숙식을 제공하고 안정된 일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생각해보면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운 날에 땡볕 아래서 일을 하고 공사 현장을 옮길 때마다 숙소도 바뀐다.
몇 개월씩 옮겨 다니며 낯선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쉽진 않았다.
안 그래도 한국에 적응 중인 호세는 가능하면 한곳에 정착하고 싶어 했다.
다행히 일은 잘 풀렸다.
신정배 사장은 호세를 양보해줬다.
호세가 해외에서 온 동포이긴 하지만, 법적으로 보면 외국인 근로자였다.
방문 취업 비자로 들어온 그는 현재 연화 건설과 계약되어 있는 상태였다.
한국어도 잘하고 일도 열심히 하는 그에 대한 기대가 내심 컸으나 오저당을 향한 호세의 의지가 생각보다 강했다.
더구나 창고 공사를 하면서 우리 둘이 맨날 피곤에 쩔어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다니니 안쓰러우셨던 것 같았다.
하지만 곧장 일할 수는 없었다.
취득한 방문 취업 비자의 사업자 변경 신청도 해야 했고 연화 건설의 현재 사정도 어느 정도는 봐줘야 했다.
당장 호세가 빠지면 손이 부족해질 상황이라 당분간 연화 건설 소속으로 지내야 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창고가 완공된 이후에 합류였다.
현재 상황으로는 그게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하지만 내 예상보다 호세의 열정은 상당한 편이었다.
“일할 거 있으면 뭐든 시켜.”
간혹 공사가 쉬는 날이나,
퇴근 후에도 일거리를 찾았다.
하루라도 빨리 적응하려는 의지였다.
취업을 핑계 삼아 공짜로 호세를 부려먹을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일한 만큼의 돈은 시급으로 챙겨서 주었다.
우리는 일거리를 덜었고,
호세는 부업을 하나 얻었다.
더구나 숙식도 함께하는 중이다.
선생님이 사시던 집을 장기 임대해서 숙소로 쓰려고 했지만, 호세는 수호와 같이 방을 쓰는 거로 확정되었다.
수호가 원한 일이었다.
아직은 숙소를 추가로 섭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녀석의 주장이었다.
가능한 돈을 아끼자는 의미였다.
그런 핑계로 호세와 함께 지내며 녀석은 요즘 스페인어와 영어를 배우고 있었다.
호세와 나는 한국어로 대화하다가 답답하면 외국어로 소통하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수호는 옆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탓에 어떻게든 배우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겨우 한 사람에 불과했지만,
호세의 등장은 꽤 큰 영향을 주었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솟아나는 걸까.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덕분에 오저당의 평소 텐션은 한껏 높아지고 있었다. 사람 좋아하는 곰 같은 레트리버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어쩜 저렇게 활기찰까?”
이모도 인정할 정도였다.
멕시칸의 피가 혈관에 흐르는 녀석답게 흥이 흘러넘쳤다. 어디선가 템포 빠른 음악만 나오면 몸부터 흔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세에게도 한국인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었다.
태생적으로 느린 것은 절대 참을 수 없는 DNA가 종종 엿보일 때가 많았다.
한마디로 일할 때는 빡시게 일하고 놀 때는 정신줄 놓고 노는 스타일이었다.
아주 바람직한 자세였다.
“같이 일해보니 어떠세요?”
“아직 얼마 안 되었잖아. 고작 며칠도 안 되는데 그걸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지.”
“그래도 마음에 드시는 거는 맞죠?”
“물론이지. 우리 딸 서연이랑 나이가 비슷해서 그런지 개구쟁이 아들이 하나 더 생긴 느낌이야.”
정확하게는 넉 달 차이지만,
서연이보다 호세가 한 살이 많았다.
한동안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이모가 시계를 흘깃 바라봤다.
“그런데 이렇게 있어도 돼? 오늘 서울 가는 거 아녔어?”
“이제 슬슬 출발하려고요.”
“하룻밤 자고 오는 거지?”
“네, 모처럼 삼촌 댁에서 신세 지려고요.”
오랜만에 올라가는 서울이다.
한동안 일이 바빠 엄두도 못 냈다.
양조장을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벽향주를 빚을 때와는 다른 것이 막걸리는 계속 옆에서 지켜봐야 한다.
수호와 나.
둘 중의 한 명은 남아야 했다.
벽향주만 만들 때는 그런 과정이 없어서 편했다. 스케줄만 잘 짜면 가끔은 아예 쉬는 날도 종종 있었던 적도 있었지.
더구나 우리에게는 호세가 있었다.
마침 오늘은 호세도 쉬는 날이었다.
공사는 거의 매일 진행되나 날씨가 안 좋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접어야 한다.
보통 그런 날을 손이 빈다고 하던가.
마침 시기가 들어맞아서 오저당은 잠시 수호와 호세에게 맡기기로 했다.
모처럼 멀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수호가 입을 삐죽 내밀고 기다렸다.
뭔가 불만이 많아 보였다.
이유는 너무나도 뻔한 것이었다.
나 혼자 서울에 가고 자신은 호세와 함께 오저당에 남아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표정을 보면 장난을 치고 싶어지잖아.
“벌써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어요? 기사님이 무척 부지런하시네요.”
“웃기고 있네. 택시비가 아까워서 버스 터미널까지 태워다주는 거니 내일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도착 시각 보내.”
보통은 직접 차를 끌고 가지만,
이번에는 버스를 타고 갈 예정이다.
차가 한 대라 내가 끌고 나가면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돈을 많이 벌면 차를 한 대 더 뽑든지 해야지.
이미 염두에 두고 있는 모델도 있다.
GMC 같은 힘 좋고 대형 픽업트럭 같은 게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시골에 살다 보니 유용한 게 짐이 많이 실리는 힘 좋은 종류의 차였다. 스포츠카 같은 거는 전혀 눈길도 가지 않는 환경이었다.
“마트 가야 한다니 차를 놔두고 가기는 하는데 무지성 쇼핑은 하지 마라.”
과연 이 녀석 얼마나 긁을까.
솔직하게 말하면 조금 무서웠다.
하지만 먹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제한을 두지는 않는 편이었다. 다 먹고 잘 먹고 잘살자고 일하는 거 아니겠어.
“지철이 형한테 축하한다고 나 대신 전해주는 거 잊지마.”
“어제도 통화했다며.”
“그래도 느낌이 다르잖아. 느낌이!”
오늘 서울에 가는 이유는 지철이 형의 사진 전시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저번에 도움받은 것도 있었지만, 우리가 계산적인 사이는 절대 아니었다.
그런 일이 없었더라도 지철이 형의 사진전이니 어떻게든 가야 했다.
태백에서 서울까지.
3시간 20분 정도가 걸렸다.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곧장 전시회가 열리는 삼청동으로 향했다.
여길 얼마 만에 오는 거더라···.
적어도 2년쯤 전인가?
너무 오래전의 일 같았다.
서울은 그사이에 바뀐 것이 없었다.
예전의 거리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바뀐 것은 나였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
반짝이는 수많은 불빛까지.
이제는 상당히 낯선 모습이 되었다.
오풍리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기에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거기에 군대에 있었던 시간까지 더하면 시골 촌놈이 다 되긴 했다.
“나도 한때는 나름 차도남이었는데···.”
그래도 외롭지는 않았다.
내 곁에는 항상 향이가 있었다.
녀석은 서울이 처음인데도 다른 곳에는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오롯이 나만을 바라보고 따라다니고 있었다.
껌딱지가 따로 없었다.
그 덕분에 지루할 틈은 없었다.
요즘은 애교도 무척 많아져서 펫 한 마리를 입양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인형처럼 생겨서 그러면 반칙이잖아.
그러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굿모닝’이라는 갤러리였는데 출발 전에 알아보니 상당히 유명한 곳인 것 같았다.
듣기로는 여기서 전시회를 한다는 것부터 대단한 일이었다. 작품성이 부족하면 대관도 안 해준다고 했다.
“그만큼 형이 인정받은 거겠지.”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조금 신기했다.
아직 무명인 지철이 형의 무엇을 보고 그런 결정을 내린 걸까.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해보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형의 사진에 매료된 걸까?
어서 가서 보고 싶은 마음에 안으로 들어서니 제법 많은 이들이 있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형이 보였다. 잠시 옆에 서서 기다리자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언제 왔어?”
“조금 전에요. 첫 전시 축하드려요.”
“어휴, 정신없어 죽을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수호는 양조장을 지켜야 해서 같이 못 왔어요. 대신 저한테 축하드린다고 꼭 전해달라고 했어요.”
“너라도 와준 게 어디야. 오늘 밤에 바로 다시 내려갈 거야?”
나는 그렇지 않다며 고개 저었다.
하루 더 머물고 내일 내려가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에 온 김에 서울에서 해결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이왕에 왔으니 가능하면 작게나마 성과를 가지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내일은 주류 상사와 미팅이 있다.
얼마 전부터 오저당에 주류 유통망을 제안하는 업체의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제법 큰 회사도 있었지만,
아직 대형 주류 상사 쪽에서 연락이 오진 않았다.
생산량이 너무 작은 탓이다.
현재 오저당의 역량은 부족하다.
대량 주문은 감당하지 못할 것이 분명한 터라 나도 그쪽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지철이 형과 그런 고민에 대해 이야기를 했겠지만, 오늘만큼은 형이 주인공인 자리라 참아야 했다.
“그런데 사진 전시회에 찾아오신 분들이 상당히 많네요. 연령대도 상당히 다양한 것 같고요.”
“오늘은 내가 상주하는 날이라 다른 날에 비해서 많은 편이야. 어제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되게 한가했어.”
“아아··· 그렇군요.”
그래도 반응은 꽤 좋았다.
일부 사진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아마도 판매된 것을 구분한 것 같았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었고 집에 걸기도 적당했다.
“이제 저는 차분하게 사진 감상 좀 하려니까. 형은 가서 일 보세요.”
전시회를 찾은 관람객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에 나는 그쯤에서 형을 놔줬다.
여러 관람객 중의 하나인 내가 형을 독점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내 뒤에 기다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아마 형의 대학교 동기들 같았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다들 카메라 가방을 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었다.
형을 놔준 뒤에 사진을 한동안 구경하던 나는 이상하게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지갑과 스마트폰.
두 가지 모두 주머니에 있다.
그런데도 뭔가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잠시 가만히 서서 살피던 나는 문득 언제나 곁을 맴돌던 향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안 보였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엇! 이 녀석 어디로 갔지?”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지.
적어도 갤러리 앞에서 보긴 했지.
형과 대화할 때만 하더라도 곁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뒤로 기억나지 않았다.
혹시 길을 잃고 미아가 된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났다.
향이와 요정들만 믿고 창고까지 짓고 있는데 사라져버리면 큰일이었다.
다시 예전의 벽향주로 돌아가 버리면 망하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가득이나 선생님도 안 계신데 우리 실력만 가지고 현재 판매되고 있는 수준의 벽향주를 재현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아무리 따져봐도 불가능했다.
이미 기대치가 너무 높아졌다.
마니아층부터 먼저 떨어져 나가겠지.
현재 판매량의 코어가 그들인데 아마 한 모금만 마셔도 금방 알아챌 것이다.
나만 믿고 산골까지 따라온 수호와 호세는 어떻게 하지.
정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발걸음은 점차 빨라졌다.
하지만 주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5분 정도 지난 뒤에야 겨우 향이를 찾을 수 있었다.
녀석은 갤러리 한쪽 구석에 있는 사진 앞에서 맴돌고 있었다. 정확하게 사진을 보고 있는 여자에게 관심을 보였다.
평소에 나만 바라보던 녀석이 그런 모습을 보이니 조금 섭섭했다.
너 인마! 커서 뭐가 되려고,
어린 놈의 시키가 여자나 밝히고···.
그런데 이 여자, 어딘가 낯이 익었다.
어반 스카이에 왔던 손님이었나?
아니면 같은 과 동기나 후배던가?
옛날 여자친구는 확실히 아니다.
사귄 적도 없으니 그런 존재는 없다.
그나마 썸에 가까웠던 관계도 이곳이 아닌 미국에 있었고 라틴 아메리칸이라 그 정도는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단번에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러다 눈 밑에 점이 보였다.
애교점에 가까운 작은 크기였는데 작은 점 하나가 전체적인 인상을 바꿔놨다.
그와 동시에 이곳에서 마주칠 줄은 생각지도 못한 한 사람이 떠올랐다.
‘에이··· 설마?’